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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
어쩌다가 이렇게 되었을까?
포르시아는 영지를 떠나자 그 모습이 급변했다. 영지에서 보여주었던 공녀로서의 위엄과 기품, 고아한 자태와 그 존재감은 옅어지고 오히려 그 나이에 처음 여행을 떠나는 평범한 여인이 자리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또 여행 도중에만 그랬다. 마그나 후작의 영지에서는 다시 예전 영지에서의 모습을 회복했다. 어쩌면 그렇게 완벽하게 변화무쌍할 수 있을까?
지금도 초롱초롱한 포르시아의 눈빛에 이니안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었다.
“…알겠습니다.”
이니안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며 대답했다.
“고마워요, 세이버 경.”
이니안의 허락에 포르시아는 진심을 담아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 순간만은 공녀 포르시아 오마 칸세르다운 기품있는 모습이 나타났다.
대열은 곧 이니안의 지시에 따라 산맥에 좀 더 근접한 경로로 이동했다. 사실 산맥에 근접해서 이동하면 할수록 이들의 이동 거리와 시간은 단축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산적들의 위험 때문에 일부러 멀리 돌아가는 경로를 선택했던 것이다.
“정말로 산적들이 나올까요?”
마차의 창을 닫은 포르시아가 맞은편의 다프네에게 물었다.
“아마도 그럴 겁니다. 저 역시 이번만큼은 세이버 경의 의견과 같습니다. 산맥에 더 근접해서 이동하는 것은 확실히 위험합니다.”
이니안을 보면 개가 고양이를 보듯 으르렁거리는 다프네가 의외로 이니안의 의견에 동조하자 포르시아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더군다나 길리안 산맥은 길리안 길드라고도 불리는 산적들이 유명하죠.”
다프네는 기사 수행 때의 경험을 떠올리며 말했다.
“산적들인데 길드라고 불러요?”
“그네들 스스로 그렇게 부른다더군요. 그리고 그 규모도 엄청납니다. 무려 삼만이라 하더군요.”
다프네의 말에 포르시아와 캐서린 둘 모두 입을 크게 벌리고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그 자세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저… 공녀님.”
그 모습에 다프네가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
“아, 예, 파이어 경.”
“많이 놀라신 듯하시네요.”
다프네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에 동조하듯 곁에 앉은 캐서린도 고개를 끄덕였다.
“삼만이면 거의 군대 수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그런데 그런 집단이 산적으로 존재한다고요?”
“퇴치하기에는 그 수가 너무 많고 또 길리안 산맥이 너무 험준하니까 제국에서도 어떻게 하지 못하고 있는 거죠.”
다프네의 설명에 포르시아는 이해했다는 듯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다프네는 그녀의 표정에서 완전히 이해하지 못했음을 알 수 있었다.
‘하긴, 공녀님께서 그런 곳의 험준함과 치열함을 이해하실 수 있을 리가 없지.’
다프네와의 대화가 끝나자 포르시아는 마차의 창턱에 팔을 괴고는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산줄기의 풍경에 몰입해 갔다. 처음 거대한 산의 모습이 신선하기도 했지만 그것 외에 무척이나 친숙한 어떤 것이 느껴졌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덕분에 포르시아는 더욱 산의 모습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네 시간쯤 달리자 어느새 저녁때가 다가왔다. 서쪽 하늘이 붉게 물드는 이때 마차는 산맥에 상당히 근접해 있었다. 조금만 더 가까이 가면 평원의 길이 끝나고 험준한 산의 길이 시작되는 낮은 경사가 나타날 정도의 거리였다.
“하아∼ 역시나로군.”
“그렇지?”
이니안은 마차를 향해 몰려드는 인기척에 한숨을 쉬었다. 곁에 있던 케라우는 그럴 줄 알았다면서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이니안은 마차의 바로 곁에 다가가 창을 두드렸다.
“무슨 일이죠?”
창이 열리며 포르시아의 얼굴이 나타났다.
“산적들입니다.”
이니안의 대답에 포르시아의 얼굴에 놀람이 떠올랐다. 겨우 네 시간 정도 달린 것에 불과한데 산적이 나타났다는 말에 상당히 놀란 것이다.
“역시.”
다프네는 이니안의 말에 맞게 중얼거렸다.
“혹시 그 길리안 길드라는 사람들인가요?”
“길리안 산맥의 산적들이라면 그들일 것입니다.”
이니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차 안을 부탁드리겠습니다, 파이어 경.”
이니안은 포르시아의 얼굴 너머로 보이는 다프네를 향해 말했다. 다프네는 작게 머리를 움직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럼, 창문을 닫고 장막을 치고 계십시오. 공녀님께서 보실 필요가 없는 일들입니다.”
이니안은 그 말을 끝으로 마차에서 떨어졌다.
“대형을 바꾼다, 마차를 중심에 두고 원형진을.”
이니안의 지시에 기사들과 병사들은 재빨리 몸을 움직여 마차를 둥글게 감쌌다. 이동을 위해 마차의 전후에 병사와 기사들을 두텁게 배치하고 양 측면에 비교적 소수의 병사들을 배치했던 진형에서 완전히 마차를 지키기 위한 대형으로 바뀐 것이다.
마차를 원형의 진으로 완전히 감싼 후 이니안과 케라우는 원의 밖으로 나가 있었다.
“이거 위험한데? 해가 지고 있다니. 나 시간 별로 없으니 빨리 끝내자.”
케라우가 점점 더 산맥 너머로 기울고 있는 태양을 보며 기분 나쁜 듯 중얼거렸다. 그 모습에 이니안이 피식 웃었다.
“몇이나 몰려왔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거지.”
“쳇.”
케라우는 진심으로 귀찮다는 눈빛을 아무도 없는 산을 향해 던졌다.
대형을 바꾸고 잠시의 시간이 흐른 후 대략 이백 명에 조금 못 미치는 인원들이 마차를 향해 달려왔다.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숫자를 보고 그 정도의 규모로 달려든 것 같았다.
길리언 길드에 남는 것이라고는 사람뿐이니 당연한 일이라고 할까.
“멈춰라!”
이백 명의 산적을 이끄는 대장으로 보이는 듯한 인물이 선두에서 이니안들을 향해 큰 소리로 외쳤다.
“이미 멈춰 있거든?”
케라우가 짜증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산적의 대장은 듣지 못했다는 듯 형형한 눈빛을 발하며 마차를 둘러싼 병사들을 훑어보았다.
“네가 이 일행의 우두머리인가?”
산적들의 대장이 이니안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군요.”
이니안이 빙그레 웃으며 대답했다. 알 수 없는 웃음과 기사라면 절대 하지 않을 경어에 산적의 대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길리안 길드의 제13중대 중대장 제피라고 한다. 너희들이 가지고 있는 모든 재물 중 절반을 내놓는다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스스로를 제피라고 밝힌 사내의 말에 케라우가 피식 웃었다. 저 녀석들이 지금 대체 이 일행을 뭘로 보고 있는지가 궁금했다.
“흐음… 가진 재물의 절반이란 말이죠?”
마치 한 번 고려해 보겠다는 듯한 말투. 케라우가 무얼 생각하든 상관없이 이니안은 자신의 생각대로 대화를 끌고나갔다.
그런 이니안의 반응에 마차를 마주한 이백의 산적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아무리 산적이라지만 그들도 자신의 몸이 다치고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는 전투를 하고 싶을 리 없었다.
반면 마차를 감싸고 있는 병사들과 기사들의 눈은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감히 공작가의 행렬을 털려고 하는 간 큰 산적들에 대한 분노로 가득한 것이다. 일부는 이니안의 대응에 노골적인 불만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제피님, 저기 저 깃발이 안 보이시나요?”
“사자 깃발 말인가?”
기사임이 분명해 보이는 이니안이 계속 말을 높이자 제피는 그려려니 하고 자신은 자신대로 응대를 했다.
“예, 그 문장의 깃발이요.”
“분명히 보인다.”
“하면 저 깃발이 무엇을 뜻하는지 모릅니까?”
“뭐, 귀족가의 문장이겠지. 하지만 그딴 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 있다는 거지?”
역시나 이들은 귀족가의 문장이라는 것만 알지 어느 귀족가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흐음… 이 마차에 타고 계신 분은 칸세르 공작가의 영애이십니다. 즉, 칸세르 공작가의 마차라는 거죠.”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칸세르 공작가의 이름이 언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피의 얼굴에는 추호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머지 산적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모습에 이니안은 직감할 수 있었다. 이들은 공작이 아니라 제국의 황제가 나타나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라는 것을.
솔직히 길리안 길드를 토벌하려고 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이들이 이런 자신감을 보이는지도 몰랐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함부로 제물을 내놔라 어쩌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니안이 생긋 웃으며 친절하게 대답했다.
“흥. 결국은 피를 봐야 하겠다는 거구나.”
제피의 입에서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산적들의 분위기는 급변했다. 두 눈에서 형형한 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살기와 투기의 대치.
양측에서 솟아오른 살기와 투기는 팽팽히 맞부딪쳤다.
“누가 피를 보게 될 건지는 모르는 일이죠.”
그 말을 하는 순간 이니안의 웃음에 살기가 한 겹 덧씌워졌다. 이런 부류는 많이 상대해 봐서 알고 있다. 어설프게 상대하느니 그냥 원하는 대로 제물을 주어서 돌려보내는 것이 낫다는 것을. 앞으로 이들과 몇 번을 부딪쳐야 할지 모른다. 명색이 삼만의 인원이 모여 있다는 길리안 길드와의 충돌인 것이다.
“쳐라!”
제피가 크게 지시를 내리는 순간 이미 케이로스와 한 몸이 된 이니안이 뛰쳐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이니안이 뽑아 든 검이 눈에 보이지 않을 빠르기로 휘둘러졌다.
써억.
툭.
제피의 외침 뒤에 이어진 간결한 소리.
그리고 그 소리의 결과는 땅으로 떨어지는 제피의 머리였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벌어진 일에 고요함이 그 주변을 지배했다.
“휘유. 역시 깔끔한 실력이라니까.”
낮은 휘파람과 함께 울린 케라우의 감탄성이 적막과 함께하는 고요를 깨뜨렸다.
이니안의 일검이 미친 영향은 컸다.
병사들의 투기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고 산적들의 살기는 주춤했다.
“대형을 유지하고 마차의 보호를 최우선으로 해라!”
이니안의 명령에 당장이라도 산적들을 향해 뛰어들려던 병사들이 그 자리에 못이라도 박힌 듯 멈춰 섰다. 하지만 두 눈은 여전히 투지로 불타고 있어 조금이라도 접근하는 자가 있으면 그 투기에 갈가리 찢길 듯한 기세였다.
“대장이 죽었으니 부대장은 누군가요?”
이니안은 산적들을 바라보며 물었다.
“저, 접니다.”
이니안의 실력에 겁을 먹은 것일까? 부대장이라는 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피를 보는 것은 이 정도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부드러운 목소리로 이니안은 상대에게 말했다.
이쯤해서 물러가라는 완곡한 표현.
“기, 길리안 길드를 우습게보지 마라!”
하지만 오히려 그런 이니안의 말이 상대를 자극한 것일까? 부대장은 악에 받쳐 소리를 질렀다.
“후우. 그렇다면 어쩔 수 없군요, 싸울 수밖에.”
그 말이 끝나는 순간 케이로스는 산적들의 사이로 뛰어들었다. 일단 싸우기로 했으면 상대에게 틈을 주지 않고 몰아쳐야 한다. 그래야 어려울 수 있는 싸움도 쉽게 싸울 수 있다.
일단 결심을 했다면 손속에 사정을 주면 안 된다는 사실 이니안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니안의 검이 한 번 움직일 때마다 피가 튀었다. 게다가 이니안이 타고 있는 케이로스가 발을 한 번 휘저을 때마다 산적 하나가 커다란 발톱 자국이 난 채 날아갔다.
이니안과 케이로스는 종횡무진 산적들을 누비며 차례로 처리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