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92화 (9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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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

물론 만반의 대비는 해두었다. 시메티딘을 시켜 캐서린 자신도 모르게 마법으로 몇 가지 암시를 걸어둔 것이다. 공작같이 철두철미한 인물이 그리 쉽게 일을 진행시킬 리는 없었다.

“파이어 경.”

“네, 공녀님.”

캐서린과 함께 지금의 처지에 한탄을 하던 포르시아가 갑자기 자신을 부르자 다프네는 자세를 바로 하고 대답했다.

“후훗. 적어도 우리끼리 있을 때는 그런 딱딱한 자세는 취하지 않아도 된다니까요.”

“아닙니다, 공녀님. 기사로서 그런 일을 절대 있을 수 없습니다.”

다프네의 대답에 포르시아는 손가락으로 턱 끝을 문지르더니 생긋 웃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여자잖아요.”

“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다프네는 되물었다.

“그러니까, 경은 기사이기 이전에 여자잖아요. 그리고 이 마차는 여자들만 셋이 있다구요. 그러니까 그런 남자 같은 딱딱한 격식은 치워도 된다는 거죠. 알겠어요?”

여전히 생긋 웃고 있는 포르시아.

“하지만 그것은…….”

“제가 굳이 ‘명령’이라는 말을 해야 해요?”

결국 포르시아는 기사의 주군이 가진 전가의 보도를 빼 들었다. 주군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충성해야 하는 기사에게 있어 포르시아의 ‘명령’이란 말은 절대의 권위를 지닌 언령이나 다름없었다.

“아, 아닙니다, 공녀님.”

대답을 하는 다프네의 어깨와 허리에서 힘이 빠졌다.

“그것 봐요. 힘을 빼고 한결 편안히 있으니 훨씬 보기도 좋네요. 너무 딱딱한 자세로 있으면 보고 있는 내가 숨이 막히거든요.”

“네…….”

포르시아의 말에 다프네는 마지못해 말을 길게 늘어뜨리며 대답했다.

“아, 내가 말하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포르시아가 잊었다는 듯 손벽을 ‘짝’하고 치면서 말했다.

“무슨……?”

“파이어 경, 아직도 제 모습이 적응 안 되나 봐요?”

“그… 그것은…….”

다프네는 태어나서 오늘처럼 한꺼번에 당황한 일은 맹세코 단 한 번도 없었다. 포르시아는 오늘 다프네에게 생애 첫 경험을 멋지게 선사하고 있었다.

“후훗. 얼굴에 다 보인다고요. 내가 아무리 캐서린하고 이야기하고 있어도 경의 얼굴 정도는 보거든요.”

“죄, 죄송합니다, 공녀님.”

즉각 머리를 숙이며 용서를 구하는 다프네의 행동에 포르시아는 손사래를 쳤다.

“그러지 말아요. 탓하는 게 아니니까요. 단지 이제 그만 적응하라는 거죠. 그리고 좀 전에 말했듯 이 안에서는 좀 더 편안히 지내라는 뜻이기도 하고요.”

포르시아의 말에 다프네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경은 무언가 큰 착각을 하는데요, 제가 경에게 기사이기 전에 여자라고 했듯, 저 역시 공녀이기 전에 그냥 평범한 여자예요. 그러니까 너무 공녀라는 틀로만 저를 바라보지 않았으면 해요. 저도 그냥 또래 친구들이랑 수다 떨고 놀기 좋아하는 평범한 여자인걸요.”

다프네는 포르시아가 말하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해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평범한 여자의 일상 같은 것은 경험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생각한 적도 없었으니까. 그녀의 생활은 오로지 수련의 연속이었다. 좀 더 강한 기사가 되기 위한 수련에 수련. 파이어 가의 딸로서 스스로 선택한 길이었기에 후회는 없었다.

‘조금은 부러워.’

포르시아와 캐서린의 모습을 지켜보는 그녀의 솔직한 느낌이었다. 내색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알겠습니다, 공녀님. 노력하도록 하죠.”

“그래요. 일단 노력하는 게 중요하니까요.”

다프네의 대답에 포르시아는 환하게 웃었다.

***

[재미있군. 공녀라는 아이.]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 들려온 칼의 목소리에 이니안이 의아한 듯 물었다. 마차는 마법을 사용한 방음막이 쳐져 있어 안의 소리를 밖에서 듣지 못하게끔 되어 있다. 안에서는 밖의 소리를 들을 수 있지만 말이다.

물론 안에 탄 사람이 원한다면 안의 소리가 밖에 들리게끔 할 수 있다. 방음막의 일시 해제어를 말하면 된다.

아무튼 이니안은 마차 안의 소리를 전혀 들을 수 없었기에 안의 상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영혼의 상태인 칼은 충분히 마차 안에 들어갈 수 있기에 그사이 마차 안의 상황을 지켜보고 온 것이다.

[으음… 포르시아라는 아이, 지켜보고 있으니 상당히 재미있어서 말이야.]

“또 마차 안에 갔다 온 거야?”

이니안의 주변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 정도라도 칼은 들을 수 있었기에. 사실 의념으로 말을 걸어도 되지만 의념을 사용한다는 것은 상당한 정신 집중을 요했다. 그것이 귀찮았기에 이니안은 그냥 소리 내어 말한 것이다.

케라우 역시 이니안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이니안에게서 블랙 드래곤의 영혼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실제로 봤을 때 얼마나 놀랐던가. 비록 영혼이라 할지라도 뱀파이어인 케라우는 그 존재감을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그때의 그 어마어마한 압박감이란… 그런데도 저렇게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니, 이니안 저 녀석도 엄청난 별종이야.’

이니안의 중얼거림을 들은 케라우는 그가 칼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고 그냥 모르는 척 잠자코 있었다. 칼이라는 존재는 현재의 케라우에게 있어 가장 껄끄러운 존재였다.

[그 아이에게 걸린 대법을 풀 실마리를 찾으려면 계속해서 관찰해야 하니까 어쩔 수 없지.]

“그냥 보고 즐기려는 것이 아니라?”

[보고 즐길 게 뭐가 있다고?]

“하긴 마차 안에 뭐 특별히 볼 건 없지.”

이니안은 납득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노노노. 이니안. 세 미녀가 있는 마차 안은 그저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낙원이다. 멍청한 녀석.’

포르시아와 다프네뿐만 아니라 캐서린도 상당한 미모를 자랑한다. 공녀의 전속 시녀인데 아무나 뽑을 리가 없었다.

실상은 관찰은 단지 핑계이고 칼은 은근히 세 여자가 대화하는 것을 재미있게 들으며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사실 상당히 재미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정말 포르시아의 대법은 너도 풀기가 불가능 한 거야?”

[그래. 원래가 상당히 복잡한 대법인데다가 그게 세 번이나 덧씌워졌어. 게다가 두 번째 대법을 펼칠 때 어떤 일인지 모를 방해로 대법이 불안정해졌고 그것을 바로잡으려고 억지로 세 번째 대법을 펼쳐서 얽히고설켜서 정말이지 제대로 꼬였어. 이건 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상당히 난해한 문제야. 본디 드래곤의 세계에는 없는 마법이고. 세상에 드래곤의 눈물을 마법의 재료로 이용하다니, 드래곤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야. 오직 인간만이 가능한 발상이지.]

길게 이어지는 칼의 설명을 이니안은 잠자코 들었다. 마법에 관해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기에 그저 그렇다고 하니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로 듣고 있는 것이다.

[그럼, 난 이만.]

그리고 곧 칼의 존재감이 사라졌다. 아니, 정확히는 마차 안에서 느껴졌다.

“케이로스.”

[예, 마스터.]

“칼 말인데.”

[네.]

“정말 순수하게 대법의 해제 방법을 알아보려고 마차에 들어가 있는 걸까? 내가 마법은 잘 모르지만 우리 누나가 마법에는 천부적이거든. 가끔 누나를 보면 마법 문제로 고민이 있을 때는 주로 명상을 하던데 말이야.”

[…….]

의심쩍다는 듯한 이니안의 물음에 케이로스는 아무런 대답을 않았다. 비록 이니안이 자신의 주인이라고는 하나 칼그레이언은 자신의 창조주. 쉽사리 무어라 할 수 있는 일이 아닌 것이다.

“어이, 케이로스. 말 좀 해봐.”

[저는 모르겠군요…….]

하지만 이니안은 한 번의 침묵 후 이어진 어정쩡한 대답에 의심을 더욱 키웠다.

“그러면 역시 그냥 놀려고 마차에 들어간 건가?”

[…….]

케이로스는 역시 아무런 말이 없었다.

‘쯧쯧, 이니안. 어리구나, 어려.’

케라우는 안타깝다는 듯 속으로 혀를 차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늘을 향해 포효하는 사자의 문장이 그려진 깃발이 꽂혀 있는 마차는 아무런 일 없이 순조롭게 나가고 있었다. 칸세르 공작가의 문장인 사자가 마차를 지켜주듯 여행은 평화롭고도 조용하게 계속되었다.

마그나 후작령을 떠난 지 하루가 지났다. 그러자 주변 풍경에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우와!”

창문을 열고 밖의 풍경을 보는 포르시아의 입에서 절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녀의 시선 끝에는 장대하게 펼쳐져 있는 산맥의 줄기가 있었다.

“저게 길리안 산맥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마차의 창 곁에 있는 이니안이 포르시아의 물음에 답했다.

“이 부분은 산맥의 끝자락이라 산들이 상당이 낮은 편이죠. 길리안 산맥의 가운데 줄기의 장엄함에 비하면 저 줄기는 그냥 애들이 키 재기하고 있는 것 정도죠.”

어느 사이 곁으로 다가온 것일까? 케라우가 포르시아를 보며 주절주절 떠들었다. 그런 케라우의 설명을 포르시아는 눈을 빛내며 들었다.

그녀의 인생에서 이렇게 큰 산을 보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이 정도가 애들 키 재기라니, 길리안 산맥의 진면목이 어떨지 호기심이 생겼다.

그때 그녀의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영상. 그것은 굽이굽이 이어진 거대한 산들이 이루는 줄기의 모습이었다. 마치 거대한 드래곤이 용틀임이라도 하는 듯한 장엄한 풍경.

“어라?”

“응? 왜 그러시죠?”

케라우가 포르시아의 이상한 반응에 물음을 던지는 순간 머릿속에 떠올랐던 그 풍경은 씻은 듯 사라졌다.

“아, 아니에요.”

포르시아는 머리를 흔들며 어색하게 대답했다. 그 모습에 케라우를 비롯한 이니안이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본인이 아무 일도 아니라니 달리 뭐라 할 수 없었다.

‘그건 대체 뭐였지? 난 그런 풍경을 본 적이 없는데…….’

케라우의 설명에 자신이 호기심을 보인 순간 떠올랐다가 사라진 그 아릿한 영상이 왜 그리 가슴 저미는 감정을 불러일으키는지 알 수 없었다.

“산맥의 모습을 좀 더 가까이서 보고 싶은데 산맥에 다가가서 우회할 수는 없을까요?”

아련한 눈으로 지평선 위에 우뚝 솟은 길리안 산맥을 보며 포르시아가 말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만… 단지…….”

“단지 뭐죠?”

이니안이 대답을 얼버무리며 길게 끌자 포리시아가 바로 질문을 던졌다.

“이런 곳에는 꼭 있는 녀석들이 있지요. 산맥의 끝자락은 몬스터들도 그렇게 강한 녀석들은 없고 또 여행객들도 주변에 종종 나타나고 하니까요.”

대답은 케라우가 했다. 하지만 케라우의 대답에도 포르시아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자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은 산적들입니다.”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딱딱한 목소리. 다프네의 간결한 설명에야 포르시아는 이니안이 망설이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래도 공작가의 깃발이 걸린 마차인데 산적들이 습격할까요? 기사들과 병사들도 이렇게 많은데?”

“산적들이 공작가의 깃발을 알아보고 알아서 보내줄 거라고 기대하기는 힘듭니다.”

“하지만 산으로 들어가는 것도 아니고 산맥 옆을 돌아가는 건데도요?”

“그래도…….”

어떻게 해서든 꼭 가까이서 보고 싶은지 포르시아의 질문은 쉬지 않고 이어졌다. 계속되는 질문에 이니안은 제대로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경험과 직관으로는 분명 산적들이 존재하고 산적들은 자신들을 습격할 것이다.

하지만 포르시아는 그 사실을 납득하지 못하고 있었다.

“좀 더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요.”

“후우…….”

이니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포르시아의 가녀린 눈망울에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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