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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24장. 생각보다 여행이란 게 많이 따분하네요
“아가씨.”
“무슨 일이죠?”
포르시아는 즐거이 보고 있던 책에서 시선을 떼며 에드워드를 바라보았다.
“제도에서 기사 분이 오셨습니다.”
“그래요?”
그의 말에 포르시아는 책을 덮으며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주일 전의 그 소동으로 제도에서 새로운 기사가 왔으니 자신이 맞아야 했다.
임시 기사인 이니안에게만 포르시아의 경호를 맡기는 것은 칸세르 공작가의 입장에서는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랬기에 네오마인의 소식을 들은 칸세르 공작이 서둘러 새로운 기사를 보낸 것이다.
“좀 심하긴 심했어…….”
일주일 전 자신이 본 네오마인의 모습을 떠올린 포르시아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온몸을 붕대로 감은 인간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처음 알았으니 말이다.
“손님은 어디에 계시죠?”
“응접실에 모셨습니다.”
에드워드의 대답에 포르시아는 서재의 문을 열고 복도로 나섰다. 어린 시절부터 알았지만 에드워드의 일 처리는 깔끔하기 그지없었다.
“공녀님을 뵙습니다.”
포르시아가 응접실에 들어서기 무섭게 소파에 딱딱한 자세로 앉아 있던 기사가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반가워요. 응?”
그 모습에 역시 딱딱한 기사라며 쓴웃음을 띠며 인사를 하던 포르시아의 눈에 이채가 띠었다. 지금까지와는 달랐던 것이다.
제도의 아버지가 보내준 기사라기에 의례 남자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눈부신 금발의 미녀가 지금 그녀의 눈앞에 서 있었다.
허리에 검을 차고 기사의 예복을 입지 않았더라면 절대 기사라고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여인이었다. 포르시아가 절로 질투를 느낄 정도로.
“칸세르 기사단의 하이 나이트 다프네 파이어라고 합니다.”
기사의 소개에 포르시아의 뒤에 서 있던 에드워드의 얼굴에 은은한 놀람이 떠올랐다.
칸세르 기사단 유일의 여성 하이 나이트가 바로 그녀였다. 또한 그녀는 대륙의 3대 여기사 중 한 명이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을 가진 여기사.
여자의 몸으로 칸세르 기사단의 기사들 중 상위 다섯 명 안의 실력을 가진 자다. 에드워드는 그런 사실들을 알았기에 은근히 경악을 드러낸 것이다.
“아! 파이어 경이로군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답니다. 대단한 실력의 여기사 분이시라죠. 그리고 파이어 자작가의 영애이시기도 하고요.”
다프네에 관한 이야기는 포르시아도 익히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녀는 그 정도로 유명한 인물이었으니까.
“반가워요. 저 때문에 제도에서 이곳까지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어요.”
“아닙니다. 공녀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다프네의 두 눈동자는 포르시아를 향한 공경으로 가득 차 있었다. 주군의 딸을 바로 곁에서 경호하는 일, 그것은 주군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에게는 더없이 영광인 일이었다.
“파이어 경, 일단 저녁까지는 쉬도록 하세요. 제도에서 이곳까지 오는 것만으로도 상당히 피로하실 거예요.”
“아닙니다, 공녀님. 주군을 지키는 것은 기사로서 당연한 일. 겨우 그 정도의 일로 임무를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다프네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하지만 저는 아직 경이 저를 경호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답니다.”
다프네의 대답에 포르시아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그건…….”
포르시아의 말에 다프네는 아무런 대꾸도 못했다. 자신은 칸세르 기사단에서 이곳으로 가서 포르시아를 지키라는 임무를 받았지만 그 임무는 포르시아가 받아들일 때부터 시작이다.
분명 포르시아는 다프네와 인사를 했을 뿐, 그녀의 경호를 받아들이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럼, 에드워드, 파이어 경이 쉬실 곳을 안내해 주세요. 먼 길을 오시느라 많이 피곤하실 거예요.”
“알겠습니다, 아가씨.”
포르시아가 빙그레 웃으며 자신을 계속 바라보자 다프네는 할 수 없다는 얼굴로 에드워드에게 다가갔다. 그 모습에 에드워드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몸을 돌렸다.
다프네의 방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녀의 짐은 하인들이 그곳으로 옮긴 후다. 에드워드는 천천히 걸으며 그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에드워드를 뒤따르기 전 다프네는 포르시아를 향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한 후 절도 있는 걸음으로 점점 멀어져 갔다.
“꺄악!”
다프네가 에드워드를 뒤따라 나간 직후 저택의 현관에서 하녀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에 포르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쉬었다.
“후우. 벌써 오 일이 지났는데 아직도 적응을 못하다니.”
소파에서 가볍게 몸을 일으킨 포르시아는 하녀들의 비명이 들린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일단 자신이 하녀들을 진정시켜야 했기에. 이 일의 원인 제공자가 그녀였기에 그 일은 그녀의 몫이었다.
현관에 도달한 포르시아의 눈에 비친 광경은 지난 오 일 동안 보아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현관 한가운데 떡하니 버티고 서 있는 케이로스의 당당한 모습. 그리고 그 곁에 난감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이니안, 그 모습을 재미있게 지켜보고 있는 이니안의 친구라는 용병 케라우. 케이로스를 중심으로 사방으로 흩어져 있는 세 명의 하녀.
절로 한숨이 나오는 모습이었다. 다만 항상 웃는 이니안이 이럴 때만큼은 곤혹스러운 표정을 짓는다는 사실이 조금 재미있을 뿐이다.
“자자, 다들 진정해요.”
벽에 붙어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하녀에게 포르시아가 따뜻하게 말했다.
무려 이틀의 투쟁 끝에 에드워드에게서 케이로스를 저택에 들이는 것을 허락받았다. 그것을 하녀들의 이런 반응 때문에 허사로 돌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포르시아가 나서서 진정시키자 하녀들의 떨림이 조금 멎었다. 그녀들에게 있어 케이로스는 언제 봐도 무섭고 사나운 늑대다. 하지만 그런 늑대를 생긋 웃으며 바라보는 포르시아의 모습에 하녀들의 소란이 조금씩 가라앉는 듯했다.
“무슨 일입니까?”
그때 비명 소리를 들은 듯 다프네가 서둘러 달려왔다. 어느새 그녀의 오른손은 검집에 꽂힌 검의 손잡이에 가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에서라도 최적의 발검을 하기 위한 자세였다.
“이… 이건…….”
서둘러 달려온 다프네는 눈앞에 떡하니 버티고 있는 케이로스의 모습에 말을 더듬었다.
“이거, 이거. 역시나 이번에도 이 녀석이 문제로군요. 자꾸 이런 일이 벌어지면 곤란합니다, 아가씨.”
그 뒤로 에드워드가 여유로운 걸음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 저택에서 케이로스를 무서워하지 않는 네 번째 인물이었다. 에드워드의 말에 포르시아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말은 가볍게 하고 있었지만 그 어조에 담긴 그의 의지가 결코 가볍지 않음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공녀님, 이분은 누구시죠?”
기세등등한 모습으로 나타난 다프네를 바라보며 지금까지 침묵하고 있던 이니안이 입을 열었다.
“아, 저녁 식사 때 소개시켜 드리려고 했는데 이렇게 되었으니 지금 소개시켜 드리도록 하죠.”
이니안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 와중에 커다란 비명을 질러 자신을 이런 곤란한 상황으로 몰고 간 하녀들을 살짝 흘겨봐 주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녀의 그런 시선을 알아챈 사람은 이니안과 케라우, 에드워드 세 사람뿐이었다.
“파이어 경, 이쪽은 2년간 우리 가문의 기사 작위를 받은 이니안 세이버 경이에요. 그리고 옆의 분은 세이버 경의 친구인 용병 케라우 씨이고요.”
포르시아로부터 이니안을 소개받은 다프네의 두 눈이 번쩍 빛났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 네오마인의 몰골을 똑똑히 보았었다, 당연히 동료 기사를 그런 폐인으로 만들어 버린 이니안에게 분노를 느낄 수밖에.
“세이버 경, 이쪽은 아버지께서 새로이 제 개인 경호를 위해 칸세르 기사단에서 차출해 보내주신 다프네 파이어 경이라고 해요. 앞으로 세이버 경과 같이 잘 협조해서 절 보살펴 주실 분이죠.”
포르시아의 소개에 이니안은 빙그레 웃었다. 아니, 포르시아에게 말을 걸 때부터 그는 웃고 있었다. 이니안이 웃지 않을 때는 케이로스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비명을 지를 때 정도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이니안 세이버라고 합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그렇잖아도 남자의 몸으로 공녀님의 경호를 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많았는데 이렇게 유명하신 파이어 경이 오셔서 마음이 한결 놓이는군요.”
이니안도 용병 시절 다프네의 명성을 익히 들었던 터였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하이 나이트이자 자신의 큰 누이인 로레인과 함께 대륙의 3대 여기사에 이름을 올린 이였다. 물론 로레인은 따로 대륙제일의 여기사라는 수식어가 붙기도 했지만. 어쨌든 충분히 관심을 가질 만한 기사였다.
“흥. 과연 나에게도 네오마인 경에게 한 것처럼 할 수 있을까요? 기대하겠어요.”
이니안의 인사에 돌아온 것은 코웃음과 함께 냉담한 말이었다. 어떻게 보면 폭언으로 들릴 수 있는 말에도 이니안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쓴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네오마인 경의 일은 유감입니다만 정당한 대련이었습니다.”
다프네의 눈에는 이니안의 쓴웃음이 능글맞은 웃음으로 비추어졌다. 어찌 정당한 대련으로 인간을 그런 폐인으로 만들 수 있단 말인가. 사람이 50센티미터 이내에만 접근하면 벌벌 떨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정당했는지 어쨌는지는 두 사람만 알 뿐이죠. 그럼 공녀님, 저는 이만 쉬도록 하겠습니다.”
찬바람을 쌩 일으키며 다프네는 이니안에게서 몸을 돌렸다. 포르시아에게 인사를 한 그녀의 시선은 에드워드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 눈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쉬이 알아챈 그는 다시 그녀의 방으로 안내했다.
네오마인의 상태에 대해서는 포르시아도 어느 정도 알았기에 그녀는 다프네의 심정을 이해했다. 그랬기에 일견 무례해 보일 수 있는 그녀의 행동에도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지켜본 것이다.
“휘유∼! 성질 한번 참 드센 분이로군요.”
지금껏 가만히 지켜보던 케라우가 그녀가 시야에서 사라지자마자 휘파람과 함께 특유의 평가를 내렸다.
“그렇네요.”
케라우의 말에 포르시아는 웃으며 대답했다.
그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런 사람이었다. 여자도 질투를 느낄 정도로 아름다운 외모를 지녔음에도 오히려 항상 익살과 장난으로 가득한 사람.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성격이지만 오히려 그는 그 두 가지가 절묘하게 어울렸다.
그랬기에 그는 항시 그녀의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지금도 그렇다. 다른 사람이 했으면 인상을 썼을지도 모를 말이건만 케라우가 이야기하자 그녀는 웃음을 짓고 말았다. 도저히 보통 용병이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이니안, 너 앞으로 고생 좀 하겠다. 크크크.”
케라우의 놀림에 이니안은 그저 씨익 웃었다.
‘누가 고생할지 아직은 모르는 일이지.’
이니안의 그런 내심을 읽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럼 공녀님, 여행 일정은 예정대로 진행해도 될까요?”
이니안의 물음에 포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어차피 파이어 경을 맞이하기 위해 사흘을 연기하기는 했지만요.”
“알겠습니다. 그럼.”
이니안은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케라우가 그 뒤를 따랐으나 케이로스는 여전히 저택의 현관에 앉아 있었다.
“후훗. 케이로스, 너는 나와 서재로 가자꾸나. 아직 다 읽지 못한 책이 있단다.”
케이로스는 포르시아의 말에 그녀의 몸에 잠시 머리를 비빈 후 그 뒤를 따랐다.
케이로스를 저택에 들인 후 케이로스의 주인이 모호해져 버렸다. 일단 저택 안에 들어오면 주인인 이니안보다 포르시아를 더 잘 따랐기 때문이다. 그런 케이로스의 모습에 포르시아는 일견 이니안에게 미안해하는 듯했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기뻐했다.
‘후우… 마스터, 언제까지 이런 애완견과 같은 생활을 해야 하는 겁니까?’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는지 케이로스는 이니안이 들을 수 없는 푸념을 마음속에 늘어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