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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
658년 6월 25일
평화롭고도 평화로웠던 일요일은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너무 빨리 과거로 흘러가 버렸다. 그리고 지옥과 다름없는 월요일의 아침이 떡하니 내 앞에 나타났다. 나는 절망과도 같은 감정을 느끼며 느릿느릿 침대 밖으로 나왔다.
점점 무더워지는 날씨는 어느새 훌쩍 다가선 여름을 알리고 있었다. 그만큼 길어진 해 덕에 어느새 동녘 하늘이 어슴푸레 밝아오고 있었다. 새벽 수련이 생활이다 보니 이 시간이면 저절로 눈이 떠진다. 욕실로 가서 가볍게 씻고 옷을 갖춰 입고는 밖으로 나섰다.
우리 집 정원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아름드리고목. 막내 누나와 이야기하던 그곳이다. 고목 옆을 보면 일부러 준비해 놓은 듯한 널찍해 앉기 좋은 평평한 바위가 있다.
난 그곳으로 올라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우리 집안 검법을 수련하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호흡법을 수행하기 위해서다. 아버지께서 검법 수련은 금지하셨지만 호흡법의 수련까지 금지하신 건 아니다.
이건 내가 철이 들 때부터 해온 것이었다. 검을 배우지 않는 작은 누나와 막내 누나도 이 호흡법만큼은 열심히 수련했다.
이 시간이면 다들 일어나서 저마다의 장소에서 열심히 호흡법을 수련하고 있을 터였다. 밤과 아침이 바뀌는 시간. 천지간에 존재하는 기운이 적절히 섞여 가문의 호흡법을 수련하기에는 최고의 시간이라고 했다. 해질녘 역시 마찬가지였다.
호흡법은 많이 하면 할수록 좋지만 어디 그게 가능한 일인가? 하지만 해 뜰 때와 해 질 때. 이때만큼은 가급적 다들 호흡법을 수련하도록 노력한다. 형과 아버지도 왕궁의 근무가 없는 날이면 이 시간에는 호흡법을 수련하신다.
자하신공(紫霞神功).
발음하기도 무척이나 까다로운 이 이름이 내가 수련하는 호흡법의 명칭이다. 그 성취가 극에 이르면 호흡법을 수련할 때 온몸에 자색 노을과 같은 서기가 어린다고 하는데 본 적이 없으니 믿거나 말거나 하는 소리이다.
하지만 이 호흡법이 검법 수련에 큰 도움이 되는 건 사실이다. 해서 이 호흡법만큼은 절대 가문 밖으로 유출시키지 않는다. 우리 가문의 사이몬 기사단이 왕국기사단 못지않은 실력을 가질 수 있는 것도 다 저 호흡법 덕이다.
물론 자하신공이라는 호흡법을 가르치진 않는다. 이 호흡법을 익힐 수 있는 자격은 사이몬이라는 성을 쓰는 사람뿐이므로.
다만 사이몬 기사단의 기사들은 자하신공에서 파생된 기본적인 호흡법을 익힌다. 그것을 한월공(寒月功)이라 한다. 역시 발음이 무척이나 까다롭다.
무슨 호흡법 이름을 이리도 까다롭게 지어놓았는지 의아해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여기에는 사정이 있다. 그 사정에 관해서는 차후에 밝히도록 하겠다.
이 호흡법들은 건강과 미용에도 탁월한 효과가 있어서 우리 누나들의 미모에도 한몫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반짝반짝 빛이 나지. 심지어 그 성깔 안 좋은 큰누나마저.
호흡법을 마치니 온몸이 상쾌하다. 몸속에 가득 찬 기운이 절로 활기를 불어넣는 이 기분. 이건 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로 모른다.
하늘을 보니 해가 어느새 제법 높이 올라가 있었다. 슬슬 아침 시간인 것 같다. 보통 호흡법을 한 번 수련하면 두 시간 정도는 걸리니 마치면 딱 아침때다. 나는 느긋한 발걸음으로 식당을 향했다.
아버지와 형이 없는 걸 보니 근무날인 모양이었다. 아마도 저녁때쯤 들어올 것이다. 퀭한 눈을 하고서.
아무리 아버지께서 그랜드 마스터라지만 24시간 내내 국왕 폐하 옆에서 긴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고된 일이다.
현재 왕국은 무척이나 평안하다. 현재의 국왕 폐하까지 3대에 걸쳐 카일로니아의 국왕 폐하들께서는 성군이라는 칭송을 듣는 분들이시다.
덕분에 근 10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우리 왕국은 무척이나 평화로웠고 또 풍요로웠다. 이런 때이니만큼 근무 때 적당히 해도 될 터인데 아버지와 형에게는 그런 요령이 없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초췌한 모습으로 들어오니 보는 내가 다 안쓰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또 목욕 한 번이면 금세 보통 때의 모습을 회복하니 그 초췌한 모습이 의도한 연극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머리 한쪽에 자리하고 있었다.
맛있는 아침 식사가 끝난 시간. 든든한 포만감에 한창 기분이 좋아야 할 시간이지만 난 그렇지 못했다.
큰누나와의 공부라는 지옥이 기다리고 있으니. 아니, 이제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로 했지. 당당히 맞서야 한다. 큰누나의 음모에 당당히 맞서 그 음모를 깨부수리라.
지난주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 마냥 공부방으로 향했지만 오늘의 나는 당당하게 걸음을 옮겼다. 사이몬 가의 핏줄을 타고난 나 이니안 케이 사이몬에게 무에 두려울 것이 있겠는가. 당당히 맞서서 깨부숴 주겠다.
그런 나의 모습을 보는 큰누나는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곧 나를 따라 공부방으로 들어섰다.
“어서 어서 앉아라. 응?”
방으로 들어선 누나는 평소와는 다르게 나를 재촉했다. 방으로 들어올 때까지는 여유롭게 날 바라보더니 갑자기 왜 저러는지… 하긴 큰누나의 성격을 누가 짐작하겠는가?
“그럼… 오늘은 여기서 여기까지. 시간은 점심식사 전까지.”
큰누나의 말에 나는 순간 정신이 나갔다. 이건 평소와 패턴이 다르다. 평소에는 이러지 않았다. 30분 간격으로 나오던 과제가 오늘은 세 시간이라니. 게다가 양이 더 많았다.
시간이 여섯 배로 늘었으면 양도 여섯 배로 늘어야 할 터인데 이건 아니다. 무려 열 배는 늘었을 것 같다, 저 두께를 보면. 으으. 큰누나, 역시 강적이다.
“너, 그때까지 다 못 외우면 점심 없다. 그게 오늘부터 추가되는 새 벌칙이다. 그럼 난.”
그 말을 남기고는 사라져 버린 큰누나.
이럴 수가… 이젠 먹는 것마저… 패는 걸로는 부족해 굶기겠다니 악마가 와서 가르침을 청할 정도의 사악함이지 않은가. 이럴 수는 없는 거다.
어찌 생존을 위한 가장 순수하고도 고귀한 식사 행위를 강제하려 하는가!
내가 이렇게 절망에 빠져 투덜거리는 사이 시계 바늘은 참으로 부지런히도 움직였다. 그사이 10분이라는 금쪽같은, 아니, 맛있는 식사와 같은 시간이 사라졌으니.
토요일. 막내 누나의 말을 듣고 결심한 것도 있고 하니 열심히 하기로 했다. 게다가 맛있는 점심까지 걸려 있으니 이렇게 어물쩡거릴 시간 따위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간과하고 있었다. 지난 토요일 검투장에 다녀온 뒤 큰누나의 행동이 조금 변했다는 것을. 일요일인 어제 큰누나를 도통 볼 수 없었다는 것을.
이때 나는 이 사실들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을 했어야 했다. 한 끼 식사에 눈이 어두워 놓칠 만큼 간단한 사안이 아니었으니. 이때 놓쳐 버린 그 사실이 뒷날 나에게 어떻게 돌아올 지 이 당시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쿡쿡쿡. 정말 재미있다. 아빠 일기.”
네이라가 손으로 입을 가리며 소리 죽여 웃었다.
“정말 그렇지?”
아이덴의 입에도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바위, 아빠가 어릴 때도 있었구나.”
“정말. 오래된 바위였어.”
네이라와 아이덴도 매일같이 그 바위에서 호흡법을 수련하고 있었다. 이니안이 어린 시절 익힌 자하신공을 익히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아빠가 지금 익히고 있는 것은 천령조화공(天靈造化功) 아니야?”
“그러네. 그런데 어떻게 어릴 때는 자하신공을 수련하셨지?”
남매는 서로를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고민의 시간은 오래 가지 않았다. 별 도움도 안 되는 것을 계속 고민하기에는 아빠의 일기가 내보내는 유혹의 기운이 너무나도 강했던 것이다.
658년 9월 20일
“훗. 그럼 그렇지. 내가 이렇게 공부를 했는데 합격 안 할 리가 없지.”
누나들과 즐겁고도 한편으로는 눈물겨운 공부를 한 지 어언 세 달의 시간이 흘렀다. 그리고 나는 왕립학교에 편입하기 위한 시험을 치렀고, 이렇게 당당히 합격증을 두 손에 받아 들었다.
내가 그 고생을 했는데 이런 결과가 안 나온다면 그건 세상이 망할 징조다. 당연하지 않은가? 이 천재 이니안이 무려 세 달이나 공부를 했는데 고작 왕립학교 편입 시험도 합격을 못한다니. 보통의 귀족가 자제들은 열 살에서 열두 살 사이에 합격하는 시험을 말이다.
덕분에 집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가벼웠다. 아니, 정확히는 마차를 타고 집으로 향하고 있으니 마차에 탄 나의 몸이 날아갈 듯 가볍다고 할까? 얼마 만에 느끼는 상쾌한 기분인지.
무엇보다 기쁜 건 이 합격증을 아버지께 드리면 나의 애검(愛劍)이 돌아온다는 것이다. 오늘은 정말 지쳐서 뻗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 봐야겠다.
무려 세 달 만에 진검을 잡는다고 생각하니 벌써부터 온몸이 흥분으로 인해 부르르 떨렸다.
그사이 마차는 어느새 우리 저택의 정문을 지나 현관 앞에 당도해 있었다. 마차의 문이 열리자마자 나는 쏜살같이 집 안으로 들어갔다. 마침 오늘은 아버지와 형의 비번 일. 분명 서재에 계시든, 연무장에 계실 것이다. 일단 서재를 목표로 정하고 나는 듯 달려갔다.
“헉헉헉.”
마나를 운용했다면 이렇게 숨 찰 일도 없었을 텐데 너무 흥분한 나머지 그냥 무작정 뛰었더니 무척이나 숨이 가빴다. 잠시 문 앞에서 숨을 고른 후 두근거리는 심장을 부여잡고 서재의 문을 가볍게 두드렸다.
똑똑똑.
노크 소리가 이렇게 맑고도 상쾌하게 울릴 수 있다는 사실을 나는 오늘 처음으로 깨달았다.
“들어오너라.”
웃. 나이스! 둘 중 하나를 찍었는데 다행히 아버지가 서재에 계셨다. 나는 곧 내 손에 돌아올 검을 생각하며 문을 조용히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런데 서재 안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아버지뿐만 아니라 어머니에, 형에, 누나들까지 모두 모여 앉아 있었다.
특히나 큰누나의 저 살기 어린 시선과 작은 누나와 막내 누나의 걱정 가득한 시선. 마지막으로 형의 저 장난스럽고도 음흉한 시선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나의 감각에 위험 신호를 격렬히 보내고 있었다.
아니, 내가 왕립학교 편입 시험에 합격한 이 좋은 날, 이 무슨 무거운 분위기란 말인가.
“저, 아버지. 여기, 왕립학교 편입 시험 합격증입니다.”
“으음.”
아버지께서는 내가 공손히 내민 합격증을 받아 드시더니 침중한 눈빛으로 한참을 바라보셨다. 그 곁에는 어머니의 걱정 가득한 눈빛도 함께였다.
“이니안.”
“예.”
아버지의 목소리가 극히 낮게 울렸다. 이건 좋지 않다. 저 목소리는 아버지께서 상당히 화가 나셨다는 증거. 세 달 전 즐겁던 저녁 식사 시간 중 내 검을 압수당할 때도 딱 이런 분위기였다. 잔뜩 긴장한 나는 입 안이 바싹바싹 타 들어갔다.
꿀꺽.
있지도 않은 침을 억지로 삼키고는 두려운 눈으로 조심스레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네 나이가 올해 몇이더냐?”
“열다섯입니다.”
“그렇다면 왕립학교는 몇 살부터 입학을 하더냐?”
“일곱 살입니다.”
갑자기 내 나이와 왕립학교의 입학 연령이라니. 난 대체 무슨 이유인지 알 수가 없었지만 일단 아버지의 분위기에 말려 조용히 대답했다.
“그렇다면 넌 올해 몇 학년에 편입하여야 하느냐?”
가만 보자. 일곱 살이 1학년이니 열일곱 살은 10학년. 그렇다면 나는 8학년이다.
“8학년입니다.”
나의 대답에 아버지께서는 고개를 끄덕이셨다.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네가 가져온 이 합격증을 다시 한 번 보거라.”
아버지께서 다시 나에게 내미신 합격증을 받아들어 다시 한 번 꼼꼼히 읽어보았다.
[합격증]
이니안 케이 사이몬.
위 사람은 왕립학교의 편입 시험에서 기준 이상의 점수를 얻어 6학년에 편입할 자격이 있음을 증명합니다.
왕립학교 교장 라이가르 데오 퓨이어스.
호오. 다시 봐도 자랑스러운 나의 합격증. 내가 왕립학교 6학년에 편입할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한다고 하지 않는가? 이게 어디가 어떻다는 건지.
가만. 뭐? 6학년? 잠시… 내 나이라면 분명 좀 전에 말한 대로 8학년이어야 하는데, 6학년? 이게 어찌 된 일이지? 합격을 했다는 사실에만 기뻐하며 간과한 사실 하나를 나는 이제야 알아차렸다.
그 사실을 알아차리자 내 몸은 서서히 굳어들어 갔다. 이럴 수가, 6학년이라니. 그렇다면 나보다 두 살이나 어린 열세 살 꼬마들이랑 같이 학교를 다녀야 한단 말인가?
“이제야 알아차렸느냐? 한심한 녀석 같으니.”
일기의 그 페이지는 그렇게 끝이 나있었다.
하지만 네이라도 아이덴도 뒷장으로 넘기지 않았다.
대신,
“에에. 아빠, 두 학년이나 밑으로 편입했던 거야?”
네이라가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사정이 있었겠지. 그나저나 이때 할아버지 엄청 화나셨겠다. 화 한 번 나면 무척이나 무서우신데…….”
이미 과거의 일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덴은 자신의 아버지를 진심으로 걱정했다. 딱 한 번 거짓말을 했다가 할아버지의 분노를 온몸으로 받아본 적이 있는 그였기에 절대 남의 일 같지 않았던 것이다.
두 사람의 할아버지인 사이몬 공작은 무척이나 인자했다. 물론 이 저택에서는 그 두 사람 한정인 조건이다.
메이린과 이니안을 제외한 다른 이들은 모두 분가를 했다. 그리고 메이린은 아직 자식이 없었다. 그랬기에 현재 저택에 공작의 손자와 손녀는 두 사람이 전부인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이 공작은 오죽 귀여울까?
하지만 공작은 애정에 눈이 멀어 아이들이 잘못된 길로 들어서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사람이 아니었다. 엄격해야 할 일에는 엄격했고. 그 엄격함에 아이덴이 호되게 당한 적이 있는 것이다.
“오빠, 안 넘겨?”
아이덴이 일기장에 손을 올린 채 망설이고 있자 네이라가 의아한 듯 물었다.
“으응. 할아버지가 상당히 화나신 듯해서 뒷장을 넘기기가 무서워.”
네이라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오빠가 혼나는 것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오빠는 고개를 숙이고 가만히 있는데 오죽 무서웠으면 오히려 자신이 울었을까.
네이라도 고민에 휩싸인 눈으로 일기장을 바라보았다.
저것을 과연 넘겨야 할까?
남매는 지금 할아버지의 분노한 모습에의 공포와 호기심 사이에서 고민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