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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
“그런데 큰언니는 대체 어떻게 가르치길래?”
막내 누나는 가르치는 방법에 대해서는 이야기를 듣지 못한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못 들었어?”
“응.”
세상에. 나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험담을 늘어놓고 어디까지 공부했으며 얼마나 공부를 못하는지 까지 세세히 말한 큰누나가 공부 방법을 말하지 않다니!
분명 본인도 자신의 방법에 찔리는 것이 있으니 그랬을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왜 말하지 않겠는가? 역시 분명 나를 괴롭히고 있는 걸 즐기는 것이 틀림없었다.
“어떻게 가르치느냐 하면 말이지…….”
그 사실에 분노한 나는 지난 5일 간의 일을 낱낱이 막내 누나에게 말했다. 내가 이 말을 막내 누나에게 한다고 특별히 달라질 일은 없을 것이다. 막내 누나가 무슨 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슈데인 형조차도 큰누나에게는 찍 소리도 못한다.
나이로 서열을 매기자면 아버지, 어머니, 이슈데인 형, 로레인 누나, 이리아 누나, 메이린 누나, 나. 이런 순서다.
하지만 실제 가족에게 미치는 힘으로 서열을 매기면 이슈데인 형과 로레인 누나의 위치가 바뀐다. 큰누나는 그런 존재다. 그러니 내가 지금 막내 누나에게 늘어놓는 말들은 어디까지나 나의 한풀이일 뿐이다. 처량한 내 신세.
“푸웃. 그랬단 말이야? 큰언니가?”
나의 한이 절절이 스며든 설명이 끝나자 막내 누나는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웃음을 터뜨렸다.
“뭐야? 그 반응은? 난 정말 절박했다고.”
전혀 의외의 반응에 서운한 나의 칭얼거림 비슷한 말에 막내 누나는 황급히 손을 휘저었다.
“아, 미안. 정말 미안. 하지만 생각하니까 너무 우스워서.”
우습다니, 나의 이 절박하고도 불쌍한 이야기들이 우습다니! 정말 그 천사와 동격인 나의 막내 누나가 맞단 말이야? 이런 나의 감정은 고스란히 얼굴로 전해졌고 곧바로 표정에 반영되어 나타났다.
“아. 미안. 그렇게 기분 상해 하지마. 왜 우스운지 이야기해 줄 테니까.”
나의 얼굴을 본 막내 누나는 황급히 웃음을 멈추고는 다급히 이야기했다.
“그러니까 말이야. 사실 큰언니도 그렇게 공부를 썩 잘하지는 않았었대. 이 이야기는 이슈데인 오빠한테 들은 거니까 확실할 거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큰누나는 왕립 학교에서 성적도 좋았다면서?”
“그랬지.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말이야……. 전부 외웠대.”
“응?”
“그러니까 전부, 모조리 다 외웠다는 거야. 교과서랑 교수님이 수업하신 내용의 필기를.”
“전부?”
“응.”
“하나도 빠짐없이?”
“응.”
어이없어 하는 나의 물음에 대해 돌아온 대답은 전부 ‘응’이라는 긍정의 대답이었다. 세상에 어찌 그리 무식한 방법이 있단 말인가? 전부, 모조리 외워 버리다니.
“그럼 이해는?”
“그런 거 없이 그냥 외웠대. 내가 오빠한테 그 이야기를 듣고 큰언니한테 물었더니 그냥 무작정 외우다 보면 어느 순간 이해하고 있대. 그래서 큰언니는 뭐든 일단 외우면 된다고 하더라.”
이럴 수가. 설마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니. 그러니 그렇게 무식하게 날 가르쳤지. 자기 자신이 무언가를 이해하려 하지 않고 그냥 무작정 외웠으니 나에게도 그렇게 가르칠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세상에나.
“그래서 아까도 나한테 ‘그냥 무조건 외우게 하면 돼. 그거면 공부 끝이야. 다른 건 필요 없어.’라고 말하던 걸. 난 설마 너한테까지 그렇게 가르친 줄은 몰랐지. 아, 가르쳤다기보다는 과제를 그렇게 준 거라고 해야 하나?”
아아, 그런 비화가 있었다니. 그렇다면 앞으로의 큰누나와의 공부는 보나마나 뻔했다. 사실 그다지 기대도 안 했지만 막상 현실로 확정되어 버리니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그런데 사실 그 방법이 의외로 효과가 있어. 어떤 걸 외우려면 몇 번이고 반복해서 읽고 또 읽어야 하는데 그게 이해하기 위한 가장 빠른 방법이기도 하거든. 어때? 우리도 그 방법으로 할까?”
나는 필사적으로 머리를 저었다. 가문의 검술에 따라 검을 놀릴 때도 이렇게 빠른 속도로 움직여 본 적은 없었다. 그만큼 절박했다. 나는 분명히 말하건데 조금 전의 막내 누나가 가르친 방법이 훨씬 마음에 들었다. 내가 공부하기도 편하고.
“호호호. 알았어. 그냥 장난쳐 본 거야.”
나의 반응에 막내 누나는 한 손을 입을 가리고는 기분 좋게 웃었다. 가끔씩 나에게 저런 장난을 치긴 하지만 저 장난마저도 미워할 수 없는 그런 누나다, 막내 누나는.
“아, 그리고 벌칙 말인데… 이런 얘기해도 될까 모르겠는데… 그래도 모르고 당하는 건 너무 불쌍하니까 이야기해줄게.”
벌칙. 그 무시무시한 벌칙. 그 벌칙에 대한 이야기가 막내 누나의 입에서 나오자마자 나의 표정은 금세 진지하게 변했다. 이런 자세로 공부를 했더라면 훨씬 잘 할 수 있었겠지?
“어머? 이니안, 너 지금 같은 얼굴로 공부했으면 큰언니한테 그렇게 당하지도 않았을 거야. 공부도 좀 그렇게 진지하게 해보렴.”
나의 얼굴을 본 막내 누나는 그렇지 않아도 잠시 내가 머릿속에 떠올린 생각을 그대로 말했다. 가뜩이나 찔리는데 그렇게 콕 집어주니 금세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음, 너 큰언니랑 종종 대련했었지?”
“응.”
“그때 큰언니 검에 몇 번이나 맞았어?”
“맞다니? 명색이 소드 마스터인 내가 아무리 누나라지만 소드 마스터도 아닌 사람의 검에 맞으면 무슨 망신인데. 당연히 한 대도 안 맞았지.”
큰누나와의 대련을 떠올린 나는 당당한 얼굴로 대답을 했다.
“그렇지? 아무래도 큰언니 실력으로 너에게 타격을 입히는 건 무리겠지?”
검에 관해서는 잘 모르는 막내 누나도 저런 말을 할 정도로 큰누나와 나의 실력 차이는 컸다. 막내 누나의 말에 긍정하기 위해 나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바로 그게 화근이야.”
“응? 그게 무슨 말이야?”
의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다급히 막내 누나에게 물었다.
“그러니까 너랑 대련한 날이면 큰언니가 얼마나 짜증을 부렸는데. 제대로 된 일격을 먹이기는커녕 스쳐보지도 못했다면서 무척이나 분해했었어.”
“그래서?”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시큰둥하니 대답했다. 그 분함이야 나도 매일 겪다시피 하는 것이니 별로 대단하게 여겨지지도 않았다.
형과 대련을 할 때면 나 역시 스치지도 못하고 번번이 패하니까. 결국 실력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서는 뭐. 언젠가는 제대로 두들겨 주겠다고 하던걸? 그러니까 너의 그 벌칙은 그동안 큰언니가 쌓아둔 분함의 복수라고 할까? 그런 걸 거야.”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일순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잊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이유로 나에게 그런 벌칙을 정했단 말인가? 실력이 모자라면 실력을 키워 정정당당하게 나에게 맞서야지, 그렇게 간악하고도 치사한 방법이라니.
“흐응. 제법 충격을 받았나 보네?”
내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막내 누나는 그럴 줄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너무 비겁한 거 아냐?”
어이없음에서 회복되자 이번에는 분노가 몰려왔다. 온몸을 휘감고 도는 분노에 두 손을 부들부들 떨며 씹어뱉듯 천천히 말하자 막내 누나는 그저 웃었다.
“알잖아? 큰언니 성격. 어쩌겠어? 오빠도 감당을 못하는데.”
그 말을 들으니 맥이 탁 풀려 버렸다. 그렇다. 큰누나는 형도 감당하지 못한다. 세상에 그 천하의 이슈데인 케이 사이몬이 감당을 못한단 말이다. 그게 다 큰누나가 한 성깔하기 때문이다.
그 성깔에 대해서는 이미 수도인 사우론 전체에 퍼져 있다. 그러니 혼기가 꽉 찬 공작가 영애에게 여태껏 그 흔한 청혼 하나 들어오지 않지.
누나가 아직 결혼을 하지 않은 것은 누나가 결혼에 관심이 없기도 하지만 좀 전에 말한 것처럼 청혼이 없어서이기도 하다.
아마 어느 집안이든 청혼만 들어오면 부모님은 당장 큰누나를 시집보내 버릴 것이다. 거기에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다. 특히나 어머니께서 얼른 큰딸을 치워 버리고 싶어 하시는 기색이시다.
그리고 그건 나의 바람이기도 하다. 큰누나가 시집 가버리면 이 집에서 나의 천적이 하나 주는 셈이니.
뭐, 그건 어디까지나 감히 바람이란 걸 잘 안다. 수도의 어느 귀족가의 자제가 우리 큰누나를 데리고 살려 하겠는가? 예쁘고 착하고 부드러운 귀족가 영예들이 널려 있는 곳이 수도이건만.
“후우… 그것도 그렇네. 그럼 난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당해야 하는 거야?”
막내 누나가 큰누나의 성격을 언급한 그 순간 난 이미 포기했다. 어느 누가 그 성격을 이겨낼까?
“호호. 그건 아니지. 왜 계속 당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거니?”
“응? 그건 무슨 말이야?”
앞으로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황급히 물었다.
“큰언니가 내주는 과제를 완벽히 해내면 되잖아, 그러면 벌칙도 없을 테고.”
“쳇. 난 또 뭐라고.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과제가 아니야. 큰누나의 목적은 날 가르치는 게 아니라 그 분풀이를 하려는 거라고.”
퉁명스러운 나의 말에 막내 누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아냐.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큰언니가 내준 과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양이야.”
“뭐? 그 엄청난 양이?”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에이. 그건 형이나 작은 누나, 막내 누나 같은 사람들 얘기겠지.”
뒤이어진 나의 말에 막내 누나는 담담한 시선으로 날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이니안?”
“응? 그거야 형이나 누나들은 천재들이잖아, 나랑은 다르게.”
나의 말에 검지로 자신의 볼을 가볍게 만지던 막내 누나가 나에게 물었다.
“그럼, 넌? 불과 열다섯에 소드 마스터가 된 너는 천재가 아니야?”
“그거야 난 검에 관해서는 당연히 천.재.지만 다른 부분에서는 지극히 평범하다고.”
내가 천재인 건 사실이다. 그건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다만 그 분야가 검으로 국한된다. 검에 관해서 내가 천재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지만 공부에 관해서는 평범할 뿐이다.
하지만 나의 대답에 막내 누나는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건 이니안 네 스스로 네 한계를 정했기 때문이야. 누가 뭐라고 해도 너 역시 우리 사이몬 가문의 혈통이야. 네가 천재라고 한 오빠나 언니, 그리고 나 역시 너와 같은 피를 나눈 남매라고.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네가 할 수 없다니 말도 안 돼.”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거세게 반박했다.
“같은 피를 나눈 남매인 건 분명하지만 능력은 확실히 차이가 난다고.”
“그래 네 말이 맞아. 차이가 나지. 하지만 차이가 나는 중에도 기본 실력이라는 게 있어. 내가 검을 싫어해서 배우지는 않았지만 나에게 검에 대한 재능이 없을까?”
누나의 물음에 나는 아무런 대답을 못 했다. 누나가 검에 대한 재능이 없다니. 보통 사람들에 비한다면 차고 넘칠 정도로 많았다.
다만 막내 누나는 검보다는 책을 좋아했고, 또 검을 배운 큰누나를 본 부모님들이 작은 누나와 막내 누나에게는 검을 가르치시지 않은 것뿐이다.
내가 아무 말도 못하고 가만히 있자 막내 누나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살짝 웃었다.
“이니안, 너는 머리가 좋아. 머리가 나쁘면 우리 가문의 검법을 절대 익힐 수 없지. 그 이치는 아주 어려운 거니까. 그런데 넌 쉽게 했잖아. 다만 공부가 하기 싫어서 안할 뿐. 흥미가 없어서 그런 건 이해를 하지만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도 해야 해. 넌 능력이 있고 큰언니가 네게 내준 과제는 그 능력 안의 일이야. 그러니까 한 번 열심히 해보렴. 어쨌든 왕립 학교에 들어가야 아버지께 검을 돌려받을 수 있잖니?”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맞다. 난 그동안 큰누나의 구박에 잊고 있었던 것이 있었다.
내 검, 나 목숨과도 같은 검. 왕립 학교의 편입 시험에 합격하기 전에는 만질 수조차 없는. 그것을 되찾기 위해서라도 큰누나의 구박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난 공부를 해야 했다.
좋다. 까짓 공부, 하면 될 거 아냐! 이 천재 이니안님께서 해주겠다고!
막내 누나의 말이 좋은 자극제가 된 것일까? 아니면 막내 누나가 잘 가르쳐서일까? 오늘 오후의 공부는 무척이나 순조롭게 끝났다, 막내 누나가 감탄할 정도로.
“그것 보렴. 하면 되잖니? 호호.”
책을 덮고 내 공부방을 나서는 막내 누나가 한쪽 눈을 찡긋 하며 남긴 말이다. 하면 된다. 그렇다 나는 하면 된다. 지금까지 깜빡 잊고 있었지만 나는 천재니까 말이다. 하하하.
“것 봐. 아빠도 머리는 좋았잖아.”
아이덴이 네이라를 보며 말하자 네이라는 방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빠라면 당연히 이래야 했다. 아빠는 안 한 것일 뿐인 것이다.
“근데… 로레인 고모, 무서울 뿐만 아니라 무식하기까지 하구나.”
“응.”
여동생의 말에 아이덴은 짧게 대답했다. 과연 둘의 이런 모습을 로레인이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까?
“메이린 고모는 이때에도 천사였고.”
“그렇지?”
극과 극을 달리는 엇갈리는 평가. 서로의 눈을 마주 본 남매는 일기를 넘기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