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85화 (8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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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

“몸이 도저히 일을 수행할 상태가 아니라면 당신이 경호를 그만두더라도 그 누구도 당신에게 뭐라 하지 않을 겁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할 정도의 몸이라면 경호를 못하게 된다 해도 그 누구도 의무를 저버린 기사라고 당신을 욕하지 않을 겁니다. 제가 당신의 명예를 지켜 드리지요.”

네오마인의 이니안의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그랬기에 그의 등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눈앞의 악마는 자신에게 말하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지 못하게 철저하게 부셔주겠다고.

“나… 나는…….”

네오마인이 막 무어라 말하려는 찰나, 그의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빛의 정체는 물론 이니안의 다리다. 그 순간 네오마인은 앞으로 고꾸라졌다. 양 무릎 뼈가 모두 부러졌으니 당연한 일이다.

이니안은 한 걸음 네오마인에게 다가갔다.

“이런. 고귀하신 기사님의 얼굴이 바닥에 처박히다니. 이러면 안 되죠.”

이니안은 발끝으로 가볍게 네오마인의 몸을 뒤집었다.

“난, 나는…….”

“압니다. 아무 말씀 안 하셔도 제게 감사의 말을 하시려는 것쯤은. 괜찮으니 아무 말 하지 마십시오. 제가 부담스럽습니다.”

그 말과 함께 이니안은 네오마인의 오른팔을 사뿐히 밟았다.

“크아악!”

순식간에 부러진 무릎과는 달리 극렬한 통증이 뇌를 뚫고 발끝까지 미쳤다.

“기쁨의 환성을 지르시군요. 저도 기쁩니다.”

이니안은 웃으며 왼팔을 밟았다. 네오마인의 온몸이 고통으로 덜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니안은 밝게 웃는 얼굴로 네오마인의 몸 곳곳을 사뿐히 밟아주었다.

[네 녀석… 무서운 녀석이군.]

칼은 기가 질린다는 듯 중얼거렸다.

“응? 이 정도면 많이 봐준 거지. 감히 나를 모욕했는데 말이야.”

상당히 화가 난 듯한 말이었지만 그래도 이니안은 웃었다.

“그럼 이 정도로 끝낼까?”

거품을 문 채 기절한 네오마인을 지긋이 바라본 이니안은 몸을 돌렸다.

“저, 네오마인 경은…….”

이니안이 멀쩡한 모습으로 저택에 들어오자 에드워드가 걱정스레 물었다.

“결투한 장소에 있습니다. 아마 수도로 보내야 할 겁니다. 공녀님께는 제게 패한 충격으로 수도로 떠났다고 전해 드리는 것이 좋을 겁니다.”

이니안은 그렇게 말하고 저택의 응접실로 향했다. 여전히 공녀가 그곳에 있음을 알고 있었기에.

이니안의 알 수 없는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에드워드는 하인의 인도에 따라 결투 장소에 도착해서야 그 말뜻을 알 수 있었다.

처참했다.

네오마인은 철저히 망가져 있었다.

“이니안이라… 무서운 사람이군…. 과연 그자가 공녀님의 곁을 지키도록 놔두는 것이 옳은 일일지…….”

에드워드는 걱정스레 중얼거렸다.

그 와중에도 그는 숙련된 집사답게 뒷정리를 했다.

***

“호호호. 세이버 경은 무척 재미있는 사람이네요.”

그때 포르시아는 응접실에서 모처럼 기분 좋게 웃고 있었다.

신선했다.

공녀라는 자신의 신분에 그 누구도 자신을 이렇게 허물없이 대하지 못했다.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달랐다. 그는 다른 이를 대하는 것이나 자신을 대하는 것이다 전혀 다름이 없었다. 가식 없는 모습.

그런 모습이 좋았다.

‘이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것뿐인데 이렇게 즐겁다니. 나를 이렇게 웃으며 바라봐 주는 사람이라는 것도 마음에 들고.’

포르시아는 따스한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한창 이야기에 열중하던 이니안은 포르시아의 눈길을 느낀 듯 그녀를 보며 물었다.

“아, 아니에요. 세이버 경처럼 재미있는 사람과 함께 여행을 하게 되다니 어떨지 기대가 되어서요.”

포르시아는 이니안을 마주 보며 생긋 웃었다.

‘쳇. 잘들 노는구나.’

그 모습에 천장에 몸을 숨기고 있는 케라우는 속으로 투덜거렸지만 아래의 두 사람이 그런 그의 사정을 알 리 없었다.

<다음 편은 외전입니다.>

<외전> 이니안의 일기

“아빠 참 바보다. 그치, 오빠?”

네이라의 말에 아이덴이 고개를 끄덕였다.

“후우… 어떻게 그 간단한 걸 못 외워서 로레인 고모한테 혼났을까?”

네이라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어린 꼬마 아가씨가 한숨을 쉬는 모습은 자못 귀여웠다.

“그래도 검은 뛰어났다고 했잖아.”

“그게 싸움만 할 줄 아는 바보잖아. 아빠가 책을 싫어하는 것은 알지만 이 정도인 줄은 몰랐어.”

네이라는 일기를 읽은 뒤 아빠에 대한 실망이 큰 것 같았다. 재미있다며 일기장을 넘길 때와 그 표정이 너무나 달랐다.

“뭐, 신경을 안 써서 그럴 수도 있겠지.”

어른스러웠다. 불과 아홉 살인 아이덴이 일기 속의 열다섯의 이니안보다 훨씬 어른스러웠다.

“너무 그러지 말고 빨리 뒷장을 보자. 넌 안 궁금해?”

아이덴의 말에 네이라의 표정이 즉각 바뀌었다,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궁금해!”

아빠에 대한 실망은 호기심에게 패해 저 멀리 옮겨갔다. 역시 아직은 어린아이였다.

658년 6월 23일

아. 좋다. 저 푸른 하늘, 이 시원한 바람, 따스한 햇살, 게다가 이 아름드리고목의 아늑한 그늘까지 정말 좋다.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야 할 내가 지금 이 무슨 여유냐고? 지금 시간이 오후 1시. 즉 점심을 막 마친 시간이기 때문이다. 이 시간이면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불치병을 가지고 있지 않아? 흔히들 식곤증이라 부르는 그 병 말이다.

우리 집도 예외는 아니라서 오후 2시까지는 자유시간이다. 공부로만 점철된 내 생활에 있어서 유일한 낙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

훗. 만약 이 휴식시간을 안 줬더라면 난 정말 공부고 뭐고 가출했을지도 모른다고.

“홋. 이니안. 정말 천국에 있는 사람 같은 얼굴인 걸?”

너무나도 평화로운 이 시간을 즐기고 있는데 귓가로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 막내 누나였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토요일. 공부를 시작하고 처음 맞이하는 주말이다. 집에서 배우는 것이다 보니 주말이라고 해도 특별할 것은 없었다.

다만 학교가 일찍 마친 막내 누나가 조금 일찍 귀가하는 것뿐.

“이리아 언니한테 들었어. 고생 많았다며?”

“응.”

미소를 지으며 옆에 앉아 말하는 막내 누나 메이린의 모습에 난 금세 두 눈 가득 눈물이 글썽글썽 해서 대답을 했다. 막내 누나의 따스한 말에 지난 일주일간의 설움이 울컥 솟아올랐다.

사실 3시 이후면 막내 누나도 나를 가르칠 수 있다. 한데 끝까지 큰누나가 가르치겠다고 하는 바람에 지난 일주일은 그야말로 나에게는 지옥이었다.

“쯧쯧. 네 얼굴을 보니 로레인 언니가 널 어찌했는지 눈에 선하다. 대체 얼마나 고생했으면 대번에 얼굴이 그렇게 변해.”

언제 꺼낸 것일까? 막내 누나는 정말 기분 좋은 향기가 나는 손수건으로 내 눈가에 맺힌 눈물을 닦아주었다. 역시, 막내 누나다. 누나들 중에서도 나에게 가장 잘해준다.

메이린 누나 밑으로 동생이라고는 나밖에 없어서 그런 것인지 몰라도 막내 누나는 유독 나에게 신경을 많이 써준다. 그만큼 나도 메이린 누나가 편하고 좋다.

물론 이리아 누나도 좋다. 내가 싫어하는 인간은 이슈데인 형과 로레인 누나뿐. 두 사람은 나랑 무슨 원수를 졌는지 나를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다.

“오후에는 내가 가르치기로 했으니까. 같이 공부 열심히 하는 거다.”

이 무슨 메시아의 강림과도 같은 소리인가! 오늘 오후에는 막내 누나가 가르친다니! 큰누나가 순순히 응했을 리가 없는데 어찌…….

내가 의아한 빛을 띠고 막내 누나를 쳐다보자 누나는 살풋 웃으며 말했다.

“오늘 토요일이잖니. 오늘 저녁에 검투회가 있어서 큰언니는 그거 보러 간다고 지금 준비하느라 바빠.”

그러면 그렇지. 그런 일이 있으니 순순히 막내 누나에게 지도권을 넘긴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꿈도 못 꿀 일. 오늘만큼은 검투회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었다.

“그럼 매주 토요일은 누나가 가르치는 거야?”

기대가 가득 담긴 나의 물음에 막내 누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럴 수가. 그렇다면 오늘뿐인가!

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짓자 막내 누나는 그럴 줄 알았다는 얼굴로 내 볼을 살짝 꼬집었다.

“그렇게 실망할 거 없어, 이니안. 내가 화요일, 목요일, 토요일을 가르치기로 했으니까.”

누나의 말에 내 몸이 딱딱하게 굳어들어 갔고, 눈도 풀려 버렸다. 세상에 기쁜 일이 있을 때 몸이 이렇게 반응할 수도 있었다니 난 정말 몰랐다.

“어머? 이니안, 얘, 왜 그러니? 응?”

급작스러운 나의 변화에 놀란 막내 누나는 내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내 어깨를 흔들기도 하면서 내 정신을 돌려놓으려 했다.

하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지금 기분대로라면 하늘을 날아갈 것 같으니까. 일주일 중 무려 3일이나 악마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다니. 정말로 인세에 다시없을 축복이었다.

“그럼 큰누나는?”

내가 정신을 차리고 가장 궁금한 걸 묻자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쉰 막내 누나가 대답했다.

“큰언니는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에 널 가르치기로 했어.”

어라? 그럼 하루가 비는데…

“그럼 일요일은?”

“그날 하루는 쉬는 날. 어머니가 요즘 네 모습 보시고는 큰언니에게 그렇게 말씀하셨어. 대체 어떻게 하고 지낸 거니? 응?”

지금 난 다른 말은 들리지 않았다. 일요일 하루를 쉴 수 있다는 그 말 이외에는 다른 어떤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막내 누나가 분명 무슨 말을 더 한 것 같았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일주일에 하루 쉴 수 있는 날이 생겼다는 환희에 온몸을 맡길 뿐.

그래서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날 바라보는 작은 누나의 두 눈에 가득한 안쓰러움을.

“자, 이제 휴식시간도 끝난 것 같으니 들어가자. 공부해야지.”

막내 누나의 말에 나는 힘차게 일어나서 공부방으로 향했다. 큰누나와의 공부라면 죽을 맛이겠지만 막내 누나라면야 공부를 싫어하긴 하지만 그래도 대환영이다.

“큰언니랑 지난 오 일 동안 신학만 했다며?”

“응.”

“들어보니까 제법 많이 한 것 같던데? 생각보다 대단하다. 처음 작은 언니에게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정말 할 수 있을까 했는데.”

막내 누나는 기특한 듯 날 바라보며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큰누나의 그 모진 구박과 억압, 학대 아래 있으면 결국 그만큼은 하게 된다. 그 증거가 나다.

“큰언니랑 계속 신학을 했으니까 신학은 앞으로도 큰언니랑 해. 나는 역사를 가르칠 테니까. 그리고 수학은 일단 신학이랑 역사가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면 하기로 하고. 그래도 괜찮지?”

“응. 당연하지.”

괜찮고말고. 막내 누나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전혀 상관없다. 이렇게 막내 누나가 날 가르친다는 것만 해도 무한한 축복일지니.

“그럼, 일단 우리 카일로니아의 건국부터 알아보도록 할까?”

그렇게 말하며 역사책을 펼친 막내 누나는 설명을 시작했다. 그래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누군가를 가르치고 누군가에게 배운다는 그런 것이다.

이제야 나는 좀 제대로 된 공부를 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큰누나의 그 삭막한 교육 방법은… 정말이지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어때? 알겠어?”

“으음. 대강.”

“대강이라니? 제대로 알아야지. 그럼 다시 한 번 설명해 줄게. 그리고 그 다음에는 외우는 거다. 알았지?”

“응.”

으음. 역시 외우기는 해야 한단 말인가. 막내 누나도 외우라고 하니. 하지만 무작정 그냥 외우는 것보다는 이렇게 막내 누나의 설명을 듣는 편이 한결 외우기 쉬울 것 같았다. 무언가 이해도 되는 것 같고.

그렇게 누나의 두 번째 설명이 끝나자 나는 금세 누나가 설명한 부분을 외울 수 있었다.

“어머. 잘하네. 그런데 왜 큰언니는 널 보고 대륙제일의 바보라고 한 거지?”

“그거야 가르치는 방법이 무식해서 그렇지.”

큰누나의 이야기가 나오자 나도 모르게 말에 가시가 돋았다. 막내 누나가 큰누나에게 들었다는 내용 자체가 나의 기분을 상하게 하기도 했다.

“뭐? 아무리 그래도 누나한테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막내 누나의 얼굴이 살짝 사나워졌다. 아무래도 내가 큰누나에 대해 버릇없이 말한 것 때문이리라.

“그래도… 이런 말하면 안 된다는 건 알지만 그만큼 괴로웠다고.”

내가 울먹거리며 말하자 막내 누나는 얼른 얼굴을 풀고 나를 살짝 안아주었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러면서 살며시 등을 토닥여 주는데 역시 막내 누나가 최고다.

나보다 겨우 두 살 많고 키는 나보다 작지만 누나란 이런 존재다. 이렇게 나를 편안하게 해주니. 이런 행동을 형이랑 큰누나가 배우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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