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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
“어차피 내게 될 건데. 뭐, 미리 좀 가져왔다고 별일이야 있겠어? 고대어 해석 마법까지 걸려 있으니까 보는 데는 별문제 없을 거야. 어쨌든 고대의 검법은 지금과는 전혀 달랐다고 하니까. 사실 소문만 무성했지, 고대 마도 시대의 검법서가 발견된 건 처음이야. 그동안 무수한 마법서는 발견되었지만. 그만큼 소중한 거니까 강해지라고. 그래서 반드시 제국의 검이 결코 사이몬에 비해 약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줘.”
카르세온을 놀리기는 했지만 사실 카르발 자신도 그 일은 썩 기분이 좋지 않았다. 제국을 대표하는 기사인 카르세온이 사이몬의 여인에게 졌다는 것.
제국은 대륙을 지배하는 국가이기에 제국이다. 그런 제국의 대표적인 기사가 고작 왕국의 여기사에게 패하는 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된다.
하지만 사이몬이라는 가문의 존재 때문에 이미 그런 일은 수백 년간 있어왔다. 제국의 자존심에 큰 상처가 아닐 수 없다. 그랬기에 카르발은 고대의 귀중한 유산을 아낌없이 카르세온에게 내준 것이다.
“고맙게 받지.”
카르세온은 천고의 보물을 받았음에도 그 이상의 감사 인사는 하지 않았다, 그 이상은 그 둘 사이에 필요 없다는 것을 서로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래. 그리고 어차피 나 혼자 빼돌린 것도 아니니까 말야.”
“그건 무슨 말이지?”
“아무리 내가 황자라지만 내가 어떻게 던전 발굴 현장에서 그런 것을 빼내겠어. 칸세르 공작이 빼내 준거야. 그렇담 그도 분명 하나둘쯤 슬쩍했겠지.”
그 말에 카르세온의 눈이 사납게 빛났지만 극히 짧은 순간이라 카르발은 알아차리지 못했다.
“뭐, 그건 내가 황제가 된 다음에 뺏어와야지. 겨우 다섯 권 발견된 검법서야. 폐하께는 세 권으로 보고가 올라갔지만 말이지. 아무리 공작이지만 그런 귀중한 것을 가지고 있도록 할 수는 없지. 안 그래?”
익살스러운 카르발의 얼굴에 카르세온은 같이 웃음 지었다.
‘역시 너라는 녀석은… 가슴에 드래곤을 품은 녀석이었지.’
그 모습에서 카르세온은 잠시 자신이 잊고 있던 친구의 진실한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면 카르발은 자신보다 더 칸세르 공작을 경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가 아무리 사랑하는 연인의 아버지라 할지라도 말이다.
황제가 될 사람에게 그런 인척 관계는 오히려 독이다. 카르발은 누구보다 그런 사실을 잘 알았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그런 독을 능히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쳐낼 인물이다.
“그럼 난 이만 가도록 하지.”
“그래. 나도 일이 많으니까.”
“앞으로 당분간은 찾지 마라. 정말이지 미친 듯 수련에 빠질 생각이니까.”
“후후후. 알았다. 부디 제국의 검을 대륙에 보여줘라.”
카르세온은 손을 들어 보이고는 카르발의 방을 벗어났다. 황궁을 벗어난 카르세온은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아 자신의 집으로 향했다. 한 손은 가슴에 품은 고대의 검법서를 꼬옥 쥔 채로. 그날 이후 누구도 카르세온의 모습을 보지 못했다.
***
드르르릉.
요란한 소리와 함께 거대한 문이 열렸다.
“내가 이 문밖으로 나가는 날이 올 줄이야.”
이니안보다 한 발 앞서 칼이 석문을 통해 나왔다. 석문을 통해 나온 동굴에는 케이로스가 엎드려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오천 년 만이구나, 케이로스.”
[마스터를 뵙습니다.]
케이로스의 모습은 공손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후훗. 이젠 하나의 영혼에 불과한 것을. 너의 마스터는 이제 내가 아니다. 여기 이 이니안이지.”
칼은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이니안을 가리켰다.
[마스터께 인사드립니다.]
칼의 말에 잠시 고개를 든 케이로스는 이니안을 향해 공손하게 인사했다.
‘훗. 이런 일이 있을 줄은.’
케이로스와의 첫 만남을 떠올린 이니안은 현재의 상황에 고소를 지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
석문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이니안은 케이로스에게 경어를 사용했다. 하지만 칼과 함께 나와 마스터로 인정받은 지금 너무도 자연스레 평대를 하고 있었다.
“그럼 난, 이만.”
그때 간단한 말과 함께 사라졌다.
“응? 갑자기 왜?”
이니안은 갑작스레 물질화를 풀고 영혼의 상태로 돌아간 칼에게 물었다.
[이게 나의 유희야. 내 마지막 유희. 나에게 영혼의 자리를 마련해 준 이의 삶을 그저 지켜보는 것이지. 애초에 너에게 말하지 않았던가?]
분명 칼은 레어에서 드래곤의 눈물을 흡수하기 전에 자신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이니안은 똑똑히 기억했다. 그런데 레어를 벗어나자마자 영혼의 상태로 돌아간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즉시 행동으로 옮길 줄은 몰랐다.
“아아, 분명 그랬었지. 하지만 아직 잠시 물질화해 줘야겠는데.”
[왜 그러지?]
“레어를 잠궈야지. 내가 너의 힘을 쓸 수 있다지만 마법을 쓸 수는 없으니까.”
[그러니까 마법을 배우래도. 마법을 배우면 어지간한 7서클까지는 무리 없이 쓸 수 있어. 그 이상의 마법은 아직 내 힘을 쓰기에 네 몸이 버티지 못하지만.]
“아니, 지금 나는 검을 수련하는 것만으로도 벅차. 다른 길에 눈을 돌릴 여유 따위 없어.”
“어쩔 수 없군.”
금세 물질화한 칼은 석문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케이로스가 지키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굳이 잠그라고 하는 것을 보면 데리고 갈 생각인가 보지?”
“그래.”
“락(Lock).”
칼의 간단한 시동어에 그의 손바닥과 석문이 빛을 뿌렸다. 그리고 곧 동굴의 벽에서 석문의 흔적은 사라졌다.
“특별히 네가 접촉하면 일시적으로 풀리도록 해놨어. 그러니까 필요하면 언제든지 찾아와.”
“그건 고맙군.”
이니안은 싱긋 웃었다.
“그럼.”
그 말을 끝으로 칼은 다시 영혼의 상태로 돌아갔다.
“이야기를 들었으니 알겠지? 케이로스 너는 나와 함께 간다.”
[알겠습니다.]
“그럼 따라와라.”
이니안은 성큼성큼 동굴을 벗어나 곧 몸을 절벽 위로 날렸다. 케라우와 헤어진 그 장소. 그곳으로 가야 한다. 그곳에 가면 케라우가 자신에게 흔적을 남겨뒀을 것이다.
‘그날로부터 꼭 다섯 달인가.’
드래곤의 눈물을 흡수하고 다시 한 달이 흘렀다. 사실 아직 만족할 만큼 수련을 마치지 못했지만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었기에 레어를 벗어난 것이다. 절벽을 오르며 이니안은 힐끔 뒤를 돌아왔다.
역시 드래곤 레어를 지키는 가디언답게 케이로스는 무리 없이 절벽을 박차며 위로 오르고 있었다. 일반인이 봤으면 분명 입에 거품을 물고 기절할 만한 광경이다.
오래지 않아 이니안은 케라우와 헤어졌던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에는 박쥐 한 마리가 낮인데도 불구하고 나뭇가지에 매달려 있었다.
“훗. 저 녀석인가?”
이니안이 웃으며 박쥐에게 다가갔다.
“왔군.”
여전히 변함없는 일과를 보내고 있는 포르시아를 지켜보던 케라우의 눈이 빛났다. 자신이 남겨둔 박쥐로부터 자신에게 신호가 온 것이다.
케라우는 잠시 몸을 피했다. 흑마법사가 있는 이 저택에서 이니안에게 소식을 전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기에 안전한 곳까지 이동하는 것이다.
박쥐와 눈이 마주친 이니안은 가만히 있었다. 박쥐가 자신을 봤으니 분명 케라우로부터 무슨 반응이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의 생각대로 오래지 않아 반응이 있었다. 박쥐가 날아올라 이니안의 어깨에 앉은 것이다.
[어이, 이니안. 들려?]
[그래.]
박쥐를 매개로 케라우가 이니안에게 의사를 전하고 있었다.
[신기하군, 이런 능력을 가졌을 줄이야.]
[케케케. 내가 보통 뱀파이어가 아니라고 누차 말했잖아. 하지만 너무 늦었어. 무려 다섯 달을 기다리게 하다니.]
[아아. 미안.]
[응? 뭐라고?]
예상치 못한 이니안의 반응에 케라우는 되물었다.
[뭐가?]
이니안이 오히려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아니, 그러니까 조금 전 뭐라고 했냐고?]
[늦어서 미안하다고.]
자신의 머리에 울리는 이니안의 말에 케라우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다섯 달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 직접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머리에 전해져 오는 이니안의 의사만으로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푸하하하. 얼음탱이의 얼음이 녹았군. 푸하하하. 축하한다, 사람이 된 걸.]
[뭐라는 거야?]
이니안이 언짢게 말했다.
[뭐, 사실이니까 그런 반응 보이지 말라고. 여튼 너도 변했군.]
이니안은 케라우의 말에 눈을 빛냈다. ‘너도’라는 단어를 썼다는 것은 다른 누군가도 변화가 있었다는 말이다. 케라우가 변화를 감지할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자신이 감시를 부탁한 로즈, 그녀인 것이다.
[그간 무슨 일이 있었지?]
이니안의 물음에 케라우는 자신이 지난 다섯 달 동안 지켜본 것들을 차근차근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기억을 찾고 기억을 잃었다는 것이군.]
[그렇지.]
이니안의 말에 맞장구치는 케라우의 어조가 조금 무거웠다. 혹시라도 이니안의 마음이 상하지나 않았을까 하는 염려가 들어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케라우의 걱정과는 달리 이니안은 별다른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상관없어. 그런 것. 그리고 앞으로 1년 정도 여행을 할 것이고 그때를 위해 실력 좋은 기사를 모으고 있다는 말이지? 출발은 한 달 후.]
[그래.]
[알았어. 곧 그곳으로 가지]
[아아, 그럼 그때 보자고. 너무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어.]
그 말을 끝으로 박쥐가 이니안의 어깨에서 날아갔다. 야행성 동물인 박쥐로서는 이런 낮에 비록 그늘이나마 나와 있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것을 케라우가 심령을 제압해 이렇게 만들어둔 것. 케라우의 제어가 풀리자 곧 본능에 따라 어두운 장소를 찾아간 것이다.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렇지, 칼? 실제로 만나보면 더 재미있는 녀석이야. 후훗. 뱀파이어 주제에 낮에만 움직일 수 있다니.”
[저주에 걸렸나 보군.]
칼은 이니안의 말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잘 아네?”
[뱀파이어의 종족의 속성을 바꾸려면 그 수밖에 없지. 리버스 스테이트라… 상당히 괴롭겠군. 본능에 반하는 생활을 해야 하니.]
“혹시 푸는 방법 알고 있어?”
[물론이지. 그다지 어려운 방법도 아니야.]
칼은 이니안의 물음에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래? 어떻게 하면 되는데?”
[한 번 뒤집은 물 컵은 다시 뒤집으면 바로 서는 법이야.]
이니안은 즉각 칼이 말하는 바를 이해했다. 그랬기에 딱딱하게 굳었다.
허무해도 너무도 허무했다. 뱀파이어의 종족의 속성을 바꿔놓는 엄청난 저주가 그렇게 간단한 방법으로 풀 수 있을 줄을 그 누가 상상이나 했겠는가?
그것은 케라우도 모르는 일일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끈덕지게 자신을 쫓아다녔으리라.
“너무 허무한걸.”
[뭐, 저주라는 이름과 그 엄청난 위력에 다들 너무 어렵게 생각하니까. 게다가 저주를 풀려면 신성마법을 사용해야만 한다는 것이 거의 상식처럼 굳어져 버린 탓도 있고. 하지만 저주로도 저주를 풀 수 있지.]
“왜 사람들은 그걸 모르지?”
[같은 저주를 한 사람에게 두 번 걸 일은 없는 법이지.]
칼의 대답에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주란 원한으로부터 나온 상대를 괴롭히기 위한 수단. 그것을 한 상대에게 반복해서 쓸 일은 없는 것이다. 실패했다면 모를까.
이니안은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자신이 처박혀 있던 나무가 푸른 잎을 잔뜩 달고 꼿꼿이 서 있었다.
“기억을 찾고 기억을 잃었단 말이지?”
가만히 중얼거리는 이니안.
가슴 한곳이 아려왔다. 대체 왜 그런 통증이 느껴지는지 알 수 없었지만 분명한 것은 찌르는 듯한 아픔이 가슴에서 느껴진다는 것이다.
“오빠는 웃고 있는 모습이 제일 잘 어울려요.”
마지막으로 그 아이에게서 들은 말이 떠올랐다. 이미 예전의 차가운 모습은 버린 터다. 이니안은 자신의 얼굴을 손으로 몇 차례 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