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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그래서 대법은 성공한 건가요? 전 별다른 변화를 모르겠는데.”
“분명 성공했습니다. 이제 포르시아님은 잔병치레 없이 건강히 지내실 수 있을 겁니다. 황태자비 마마가 되신 후에 건강한 황손을 생산하심은 물론이고요.”
창밖을 바라보는 포르시아는 묵묵히 클레비클의 이야기를 들었다.
포르시아는 제1황자의 약혼녀다. 큰 이변이 없는 한 황태자비가 될 것이고 곧 황후가 될 것이다. 그랬기에 제국의 국모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는 건강한 신체를 얻기 위해 대법을 받아야 한다.
이것이 포르시아가 알고 있는 자신이 받은 대법에 대한 내용이다.
물론 그 이야기는 그녀에게 말하기 위해 만들어진 그럴듯한 핑계에 지나지 않았다.
“좀 쉬고 싶네요.”
가만히 창밖을 바라보던 포르시아는 조용히 말했다.
“네. 알겠습니다.”
클레비클은 조용히 포르시아의 곁에서 물러났다. 포르시아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계단을 올라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녀가 깨어난 것을 언제 알았는지 어느새 그녀의 뒤에 캐서린이 따르고 있었다.
포르시아가 계단을 오르는 것을 확인한 클레비클은 자신의 연구실이 있는 지하로 내려갔다. 연구실에 들어서자마자 수정구슬을 꺼내 곧 마법 통신을 시도했다.
“자넨가?”
수정구슬에 시메티딘의 얼굴이 나타났다.
“그래.”
“자네가 연락을 한 것을 보니 대법이 끝난 모양이군.”
“그렇네.”
클레비클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인 시메티딘은 몸을 일으켰다.
“공작 각하를 모셔오겠네.”
그 말과 함께 시메티딘의 몸이 사라지고 오래지 않아 곧 수정구슬에 칸세르 공작의 얼굴이 나타났다.
“오랜만이로군.”
“공작 각하를 뵙습니다.”
클레비클은 수정구슬 앞에서 극상의 예를 취했다.
“아, 인사는 그 정도로 됐네. 그래 어떻게 되었나?”
“성공입니다.”
클레비클의 대답에 공작의 얼굴은 눈에 띄게 밝아졌다.
“그래? 그럼 전에 방해를 받아 실패를 한 부분은?”
“그것까지 완벽하게 성공했습니다. 남아 있는 드래곤의 눈물을 모두 사용하였기에 완벽한 기억 조작과 암시가 가능했습니다.”
클레비클은 대답을 마친 후 공손히 허리를 숙였다.
“수고했네. 그럼 암시의 발동은 언제부터 가능한가?”
“기억 조작과 암시를 동시에 행해서 뇌에 부담이 많이 간 상태입니다. 그래서 암시는 일단 걸어두었으되 발동은 1년 후부터 가능합니다. 지금은 암시해 둔 상황이 오더라도 아무런 반응이 없을 겁니다.”
칸세르 공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잘 알겠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정말 수고했네.”
“아닙니다.”
“그럼 당분간은 그곳에서 쉬고 있게.”
“네.”
마법 통신을 마친 클레비클은 근처에 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후우… 이제야 마음 편히 쉴 수 있겠군.”
대법을 펼치느라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성공 여부 때문에 제대로 쉬지를 못했었다. 지난 이틀을 신경이 곤두선 상태로 1층에서 포르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모든 것이 다 잘 끝난다는 것을 확인하고 보고를 마치자 잊고 있었던 피로가 몰려왔다. 소파에 몸을 기대고 오래지 않아 클레비클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포르시아는 자신의 방에 있는 티 테이블에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듯, 아무 생각 없이 멍하게 있는 듯 도무지 알 수 없는 얼굴이었다.
‘바뀌었다.’
포르시아의 방 창밖의 커다란 나무에 몸을 숨기고 있는 케라우는 대번에 포르시아가 전혀 다른 사람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아봤다.
‘저 사람은 로즈가 아니라 그야말로 칸세르 공녀야. 과거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로즈의 기억은 모두 잊은 듯하군.’
사람은 각기 가지고 있는 기질과 분위기라는 것이 있다. 기억을 찾은 포르시아는 로즈의 그것과는 완전히 다른 그것을 풍기고 있었다.
‘으음… 점점 뭐가 뭔지 알 수 없게 되어가는군. 그나저나 이니안 녀석은 무얼 한다고 아직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야. 나랑 헤어지고 벌써 세 달이 넘게 지났는데.’
케라우는 포르시아를 지켜보며 자신에게 이렇게 귀찮은 일을 떠맡긴 이니안을 향해 투덜거렸다. 드래곤의 레어에서 열심히 수련 중인 이니안이 그 사실을 알 리 없지만 말이다.
***
“하하하하!”
유쾌하게 웃는 커다란 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어서 오게. 여인에게 패한 미오나인 제국 최고의 기사 카르세온이여∼”
카르세온은 자신을 향한 카르발의 말에 인상을 찡그렸다.
“오오. 아주 좋은 표정이군. 내가 너의 이런 표정을 보는 날이 올 줄이야. 후후훗.”
“이제 그쯤 하지. 비록 여인이었다고는 하지만 상대는 사이몬 가의 소드 마스터였어.”
심기가 불편한 듯 카르세온의 말은 퉁명스러웠다.
“아아, 하지만 너무 놀라운 소식이라서 말이야. 후훗.”
카르발의 얼굴에는 여전히 웃음이 가득했다.
“하하하. 이제 그만 할 테니까 그만 인상 풀어, 페르마타. 이젠 충분히 즐겼으니까.”
자신의 웃음에 카르세온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가자 카르발은 손을 내저으며 너스레를 떨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카르세온의 얼굴을 험상궂게 만들었다.
“부른 용건이 뭐야?”
카르세온은 짧고 간결한 물음으로 자신의 기분을 나타냈다.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카르발은 머쓱한 표정으로 카르세온을 달랬다.
“용건이나 말해.”
하지만 카르세온의 화는 좀처럼 풀어지지가 않았다.
“후우. 알았다, 알았어.”
카르세온을 달래기는 포기한 카르발은 자신의 용건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포르시아가 기억을 되찾았다고 한다.”
그 말에 카르세온의 표정이 변했다.
“어제 칸세르 공작에게서 연락이 있었어.”
“다행이군.”
그 말은 카르세온의 진심이었다. 그것은 카르발 역시 마찬가지인지라 그의 입에는 어느새 미소가 맺혀 있었다.
“한데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은 사라진 모양이야. 자신의 기억을 되찾으면서 말이야.”
“그것 또한 다행이군. 그런 기억 따위 없는 것이 나아.”
카르세온은 단호히 말했다. 도저히 카르발에게는 이야기할 수 없었던 일들이 포르시아의 기억에서도 사라진 것이다. 그것만큼 다행한 일은 없었다. 서로를 위해서는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비록 처음 예정된 시간보다 시일이 좀 많이 걸렸지만 말이지.
“그런데 뭐가 문제야?”
“조금 혼란스러운가 봐.”
“으음…….”
카르발에 대답에 카르세온은 침음을 삼켰다.
“사실 그녀가 사라진 것도 나와의 결혼 이야기가 나올 때쯤이었지. 그리고 몇 달의 기억을 잃었어. 그리고 지금 기억을 되찾았으니 혼란스러울 만도 하지.”
카르발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서 당분간 여행을 하면서 혼란을 좀 추스르고 싶다나 봐. 나야 당장에라도 그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와서 결혼식을 치르고 싶지만 그녀의 입장을 생각하자니 그럴 수도 없을 것 같아.”
“그러니까 네가 하고 싶은 말은 나보고 그녀를 따라다니며 지켜달라 이건가?”
“그렇지. 뭐, 내 부탁이 아니더라도 너는 그녀의 호위 기사잖아.”
카르발이 싱긋 웃으며 자신의 친구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카르세온은 고개를 저었다.
“아쉽지만 거절해야겠군.”
그 말에 카르발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조금 전 카르발이 카르세온을 놀릴 때와는 정반대의 상황이었다.
“왜 그러지, 페르마타?”
이유를 묻는 카르발의 어조에는 잔잔한 살기마저 감돌았다.
“휘유… 연인에 대한 사랑이 지극하시군요, 황자 저하. 비가 되실 분을 모시지 못한다 하여 오랜 친구에게 살기를 내뿜으시다니요.”
카르세온은 카르발의 살기에는 아랑곳 않고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 말에 카르발의 얼굴이 더욱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잘렸어.”
카르발의 얼굴을 지켜보던 카르세온이 담담히 말했다. 하지만 그 말에 카르발의 표정이 변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말 그대로야. 잘렸어, 포르시아 공녀님의 경호 기사에서.”
“뭐?”
카르세온은 그런 카르발의 거친 반응에 어깨를 으쓱하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칸세르 기사단의 부단장 자리에서도 잘렸지, 사이몬 가의 여인에게 패했다는 이유로.”
“칸세르 공작이 고작 그런 이유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알아.”
“아아. 물론 그렇지. 공작이 나를 잘랐다기보다는 배려를 해주었다 해야 하나? 여기 오기 전 오늘 아침에 나를 불러서 그러더군. 사이몬에 지지 않을 검을 갈고 닦으라고. 그때까지 모든 직책에서 쉬라고 말이야. 그러니까 수련할 시간을 준다는 거지.”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카르세온의 얼굴에는 공작을 향한 고마움은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그런…….”
카르발은 알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공녀가 여행을 떠나는 이 시점에서 가장 든든하다 할 수 있는 카르세온을 경호 기사의 자리에서 빼다니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처사였다.
‘도무지 이게 어찌 된 것인지. 난 점점 더 공작이 수상해진다. 조심해라, 카르발.’
카르세온은 입 밖에 그 말을 내지는 않았다. 칸세르 공작은 장차 카르발의 장인이 될 사람이기에.
“그리고 내가 빠진다고 해도 감히 누가 칸세르 공작가의 공녀에게 위해를 가하겠어? 설사 타국으로 여행을 한다고 해도 말이지.”
카르세온의 말이 맞았다. 미오나인 제국의 칸세르 공작의 딸이라는 지위. 그것만으로도 대륙에서 거의 완전한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었다.
“나도 물론 그건 안다. 하지만 그래도 불안해. 네가 곁에 있어준다면 든든할 텐데.”
“뭐,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 게다가 나도 마침 수련을 하고 싶던 차야.”
“네가? 수련이야 항상 하는 것 아니었나?”
“아, 그거랑은 좀 다른 수련. 마침 사이몬 가의 아가씨 중 하나가 나에게 좋은 말을 해주고 갔거든. 아마도 사이몬의 검의 비밀 중 하나겠지?”
카르세온은 그날 메시지 마법으로 자신에게 한 말을 떠올렸다.
“그래. 그건 엄청난 행운이군. 그렇다면 나도 모처럼 모든 것을 잊고 수련에 매진하겠다는 친구에게 선물을 줄까?”
카르발은 몸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가 서랍을 열었다. 그곳에서 낡은 책을 한 권 꺼내 카르세온에게 건넸다.
“뭐야?”
“던전에서 나온 고대 마도시대의 검법서.”
카르발의 대답에 카르세온의 얼굴에 의외라는 표정이 떠올랐다.
“황자가 이런 제국의 물건을 중간에 가로채도 되는 거야?”
카르세온은 카르발의 말에서 최근에 발견된 고대 마도시대의 거대 던전을 떠올렸다. 그 규모가 엄청나 현재 황궁에서 발굴을 하고 있는 중이었다.
황실에서 주도하는 발굴이었기에 발견물의 대부분이 황제의 것이다. 그중 하나가 지금 카르발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