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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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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헉. 대단하군요.”
“보통이죠. 자, 이제 피어스 브레이크를 한 번 구경해 볼까요?”
로레인의 말에 카르세온의 이마에 불끈 힘줄이 솟았다. 로레인의 그 한마디는 그에게 크나큰 상처가 되어 남았다.
“원하신다면.”
그 말과 동시에 카르세온의 검에 맺힌 황금빛 오러가 격렬하게 타오르기 시작한다. 검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황금빛 오러는 곧 광휘와 같은 빛을 쏟아낸다. 하늘에 있는 태양과는 또 다른 지상의 태양이 나타난 듯한 빛의 세례.
“아앗. 눈 부셔.”
카르세온을 광원으로 자신에게 강렬하게 쏟아지는 빛에 메이린은 손을 들어 눈을 가렸다.
“흐음. 이 기술만은 언제 봐도 화려하군.”
카르세온 백작은 오랜만에 보는 아들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담담하게 바라보았다.
“흐음. 온몸의 마나를 한 번에 쏟아내서 강렬한 빛과 함께 파괴력을 극대로 올리는 기술인 모양이네.”
어느새 마법으로 얼굴 주변에 검은 막을 쳐 카르세온의 검이 쏟아내는 빛으로부터 눈을 보호한 이리아는 찬찬히 그의 기술을 분석했다.
로레인이 두 눈을 감는다. 너무나 강렬한 빛이었기에 그냥 쳐다보고 있으면 자신의 눈만 상할 뿐이라는 것을 잘 아는 그녀다.
“샤이닝 소드!”
그 순간 카르세온은 로레인을 향해 빠르게 치달리며 검을 휘두른다. 두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에 맞춰 로레인의 검도 움직인다.
“매화춘개(梅花春開).”
담담한 목소리와 함께 로레인의 검이 부드럽게 움직인다. 모든 것을 부수어 버리겠다는 듯 패도적으로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카르세온의 검을 향해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다가가는 검. 검은 유려한 곡선을 그리며 카르세온의 검을 맞이한다.
천천히 로레인의 검이 그리는 궤적. 그것은 봄날 화사하게 몸을 드러내는 한 송이 꽃잎이다. 그 꽃잎은 단 한 송이였지만 강맹한 기운을 봄눈 녹이듯 흩어버린다.
눈을 멀게 하는 황금빛 광휘 속에서 벌어진 일은 누구도 제대로 보지 못했다.
빛이 사라지고 드러난 광경.
로레인의 검끝이 정확히 카르세온의 목울대 앞에 멈춰 있다. 카르세온의 검은 허망하게 로레인 발 앞의 땅에 박혀 있었다. 로레인이 펼친 검의 유도에 의해 완전히 엉뚱한 길로 그 힘이 뻗어가 땅에 박힌 것이다.
이리아와 메이린은 당연하다는 눈으로 결과를 지켜보았다.
“허허허. 역시 대륙을 울리는 명성은 한 점의 거짓도 없단 말인가?”
카르세온 백작은 아들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도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기사다.
두 사람이 검을 나누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누가 더 강한지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아들의 완벽한 패배였다.
‘저 아이에게는 이번의 패배가 약이 되겠지. 지금까지 하늘 위에 하늘이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성장해 왔으니까.’
카르세온 백작은 그것만으로도 만족이었다. 게다가 소문으로만 듣던 사이몬의 검까지 보았으니 오늘은 그의 눈이 호강한 날이었다.
“역시… 이것이 진정한 사이몬의 검이란 말이군…….”
로레인이 검을 거두자 카르세온은 허망하게 중얼거렸다. 허망한 목소리와는 다르게 검을 쥔 그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패배의 치욕이 온몸을 엄습했다. 상대가 아무리 사이몬 가의 사람이고 소드 마스터라지만 여자다. 검을 든 이후 여자에게 패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당신…….”
그때 로레인이 카르세온을 보며 입을 열었다. 어느새 이리아와 메이린도 그녀의 곁에 다가와 있다.
“이니안과 무슨 관계죠?”
로레인의 입에서 나온 물음. 그 말에 카르세온은 숙이고 있던 머리를 번쩍 들었다.
“역시 알고 있군요.”
이니안이라는 말에 카르세온은 즉각 반응했다. 더 볼 것도 없었다. 그는 이니안을 알고 있다.
“언니, 어떻게 알았어?”
이리아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똑같았어. 이니안을 꺾은 기술과 이 사람의 피어스 브레이크. 피어스 브레이크는 절대 같은 것이 둘 존재할 수 없어. 사람마다 마나의 폭주로 인해 생기는 마나의 길이 선천적으로 다르니까. 더 생각할 것도 없잖아.”
“허허. 이제 다 끝난 줄 알았는데 또 다른 일이 있나 보군. 그럼 여기서 이럴 것이 아니라 들어가서 이야기하도록 하는 것이 어떤가? 사이몬 공작가의 아가씨들.”
어느새 다가온 카르세온 백작의 권유대로 그들은 저택의 응접실로 자리를 옮겼다.
응접실에서 세 자매는 카르세온에게 대강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물론 자세한 이야기는 빠져 있었다. 그것은 제국의 일이었기에 이들에게 말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카르세온이 빠뜨린 것이다.
“흐음. 그렇군요. 고마워요. 뜻밖의 수확을 얻었네요.”
로레인은 동생의 소식을 전해준 카르세온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했다. 그가 비록 자신의 동생을 꺾은 동생의 적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그녀와 상관없었다.
카르세온은 본인의 역할에 충실했을 뿐이다. 로레인 역시 기사였기에 그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이몬 공작 영애, 당신은 당신의 남편이 되려면 자신의 검을 꺾어야 된다고 했지요?”
“물론이죠.”
카르세온의 물음에 로레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그렇다면 제가 당신을 꺾어드리지요. 당신에게 청혼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 말을 하는 카르세온의 두 눈은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오늘의 치욕을 반드시 갚고 말겠다는 투지.
그 모습에 로레인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지금까지 그에게 패한 남자들과는 다른 반응이었다. 자신에게 패한 남자들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돌아갔다. 망신만 당했다고 투덜거리며.
카르세온처럼 다시 도전하겠다는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호호호. 당신 조금은 마음에 드는군요. 기대하겠어요. 언제든 사우론의 사이몬 공작가로 찾아와요.”
로레인의 말에 이리아와 메이린이 두 눈이 마주쳤다. 두 사람의 얼굴에 희망의 미소가 감돌았다. 둘은 알 수 있었다. 로레인이 카르세온이라는 남자를 제법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그럼 저희는 이만 가보도록 하겠습니다.”
로레인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와 함께 이리아와 메이린도 자리에서 일어나 언니의 뒤를 따랐다.
“대접이 변변치 않아 이틀간 불편한 건 없었나 모르겠군. 레이디들 덕에 페르마타 이 부족한 녀석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 듯하니 정말 고맙네.”
저택의 현관까지 배웅을 나온 카르세온 백작이 진정을 담아 말했다. 그 말에 로레인은 겸양의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폐만 끼쳤습니다.”
“다음에 이기는 것은 나일 겁니다.”
그런 로레인을 향해 카르세온은 투지가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모습에 로레인은 피식 웃으며 몸을 돌렸다. 천천히 정원을 가로질러 세 자매는 걸음을 옮겼다.
[마나를 움직이는 길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에요. 메이린이 전해 달라고 하네요.]
카르세온은 몸을 돌려 저택으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들려온 메시지 마법에 고개를 돌렸다. 그의 시선에 살짝 뒤를 보며 작게 손을 흔드는 로레인의 두 동생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들의 행동에 카르세온은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도 우리 형부가 될 가능성이 제일 높은 분이라 살짝 힌트를 드리는 거예요. 저는 이리아. 이 힌트를 주라고 부탁한 동생은 메이린이에요. 잊지 말아요.]
그 메시지 마법을 끝으로 세 자매의 모습은 저택의 정문을 벗어나 사라졌다.
‘이리아와 메이린이라…….’
두 사람의 이름을 잠시 되뇌어보던 카르세온은 저택으로 들어갔다. 그녀들이 남겨준 힌트, 마나가 흐르는 길은 하나가 아니다란 말을 계속해서 생각하면서.
메이린은 살짝 뒤를 돌아보았다. 자신들이 나온 카르세온 백작가의 저택. 그 저택을 바라보는 메이린의 눈에 아련한 그리움이 물들었다.
‘이니안… 대체 어디로 간 것이니?’
로레인의 앞에서는 그녀를 시집보내기 위한 여행이라 하고 있지만 실상 메이린이 이 여행을 나선 것은 자신의 막내 동생을 찾기 위해서다.
이니안의 흔적이 끊어진 차에 그 흔적에 관한 최근 소식을 카르세온에게서 들은 것은 분명 큰 소득이다. 하지만 여전히 이니안의 행방은 알 수 없었다. 그 사실이 메이린의 눈동자에 슬픔이라는 감정을 만들고 있었다.
***
하늘에 총총히 걸린 별들이 밤을 밝히고 있다. 하지만 하늘 가운데에서 은은한 빛을 세상에 뿌려주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지 않아 역부족인 듯 하늘 아래 땅은 짙은 어둠에 잠겨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 달이 숨은 그믐날에나 가능한 일이다.
칸세르 영지의 영주성도 짙은 어둠에 감싸여 침묵을 지키고 있다. 인간들이 어둠을 쫓기 위해 켜놓은 촛불 덕에 영주성 안까지는 어둠이 침습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영주성 안에서도 점점 어둠이 스며든 곳이 있었으니. 지하로 내려가는 복도였다. 그 복도를 클레비클과 포르시아가 걷고 있었다.
두 사람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만이 복도의 벽에 반사되어 길게 울리고 있었다.
“이 방입니다.”
클레비클은 말없이 걷다가 음습한 기운을 풍기는 낡은 문 앞에 섰다. 클레비클이 문을 열자 존재해 온 세월을 반증하듯 문은 요란한 비명 소리를 지르며 두 사람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뭔가 으스스하네요.”
안으로 들어선 포르시아는 양팔로 어깨를 감싸 안으며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마법사라는 인종들의 성격이 음침하다 보니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그런 모양입니다.”
포르시아의 말에 클레비클은 자신은 마법사가 아닌 양 남의 일 이야기하듯 무심하게 말했다.
포르시아는 불안한 듯 방 안을 두리번거렸다. 클레비클이 미리 켜놓은 듯 네 군데의 벽과 천장에서 초가 자신의 몸을 희생하며 어둠을 쫓고 있었다. 덕분에 방은 제법 밝아 내부를 둘러보는 데는 어려움이 없었다.
하지만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한가운데 허리 높이로 올라온 사람이 누울 수 있는 돌로 된 제단과 같은 것이 있었고 그 외에는 그저 빈방이었다.
‘어떻게 이런 곳에서 음침한 기운이 느껴지는 것일까?’
포르시아는 의아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음침하다든가 으스스하다든가 하는 느낌은 방 안의 물건들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다.
가령 이를테면 마법사들의 방이라면 누구나 상상하는 사람의 해골이라든가 갖가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시약들, 여기저기 모습을 드러내는 벌레들 같은 것들 말이다.
하지만 이 방은 제단으로 보이는 것이 방 한가운데 있을 뿐, 나머지는 그저 단출한 빈 공간이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포르시아는 음침하면서도 불길한 기운을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데 이 방에서 무얼 하는 거죠?”
“이미 준비는 마쳐 두었습니다. 공녀님께서는 저 위에 올라가셔서 편안하게 누우시면 됩니다.”
클레비클은 방 안에 있는 유일한 구조물인 제단인 듯 보이는 낮은 바위를 가리키며 말했다.
“으음.”
클레비클의 말에 포르시아는 가만히 그 바위를 바라보았다. 정사각형으로 반듯한 모양에 기이한 문양들이 위에 그려진 바위. 무언가 제물을 바치는 제단을 연상케 하는 바위다.
‘저 위에 누워야 한다니. 기분 나빠. 마치 내가 제물이 된 것처럼. 그래서였나? 내가 으스스하고 음침한 기운을 느낀 것은?’
포르시아는 기분 나쁜 듯 제단을 쳐다보았다.
“공녀님, 곧 자정입니다. 오르시지요. 그믐 날 밤 자정이 세상의 마력이 가장 강성한 때. 공녀님의 기억을 되찾기 가장 좋은 때입니다.”
클레비클의 재촉에 포르시아는 께름칙한 얼굴로 천천히 재단을 향해 다가갔다. 그리고 내키지 않은 표정으로 천천히 재단에 올랐다. 재단 한쪽에 발판으로 보이는 작은 돌이 있어 오르는데 불편함은 없었다.
포르시아는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두근.
두근.
두근.
계속해서 두 방망이질 치는 심장. 그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전신 곳곳으로 세차게 피를 보내고 있다.
꼬옥 모아진 두 손은 포르시아의 가슴 앞에 자리했다. 살며시 감기는 눈꺼풀. 속눈썹이 가늘게 떨리고 있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혼돈.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클레비클의 목소리가 포르시아의 고막을 울리며 들린다. 포르시아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클레비클은 그것은 못 본 듯 곧 주문을 외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