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76화 (76/175)

=======================================

[76]

“험. 알면 되었다.”

카르세온 백작은 아들의 행동에 만족했다. 잠시 흥분해 무례하게 굴었지만 즉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하는 태도. 자신의 아들이라지만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이번의 청혼 상대는 네가 결혼하고 싶어도 못할 상대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카르세온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이 안 되었다. 자신과 결혼을 하기 위해 청혼을 한 것일 텐데 자신이 결혼을 하고 싶어 해도 결혼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니. 말이 앞뒤가 맞지 않았다.

“허허허. 그건 내일이면 알게 될 것이야. 먼 길을 왔기에 내 오늘은 쉬라고 처소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 알고 내일 오전에 응접실로 오너라.”

자신에게 청혼의 뜻을 전하던 검은 머리의 당돌한 아가씨를 떠올리며 백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유쾌한 사람을 만난 것이 얼마 만이던가.

‘과연 사이몬이라는 이름이야.’

백작은 잠시 테이블 위에 놓아두었던 책을 집어 들었다. 그 모습에 카르세온은 조용히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버지의 행동은 이만 나가보라는 말이었기에.

‘대체 무슨 일인지.’

서재를 나서는 카르세온은 여전히 어안 벙벙했다.

다음날 오전.

간단히 식사를 마친 카르세온은 응접실로 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랬기에 일단 응접실로 향한 것이다.

벌컥.

카르세온은 응접실의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의 시선에 들어온 사람은 모두 세 명의 여인이었다. 똑같이 흑발에 흑안을 가진 묘한 매력을 풍기는 여인들. 그녀들은 소파에 앉아 편안한 자세로 차를 즐기고 있었다.

“응?”

세 명 중 한 명의 시선이 카르세온과 마주쳤다. 카르세온은 그 시선에서 강렬한 기세를 느낄 수 있었다.

‘강하다.’

카르세온은 대번에 그 여인이 자신 못지않은 강자임을 알아보았다. 두 사람은 꼼짝도 않고 서로의 눈을 응시했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선남선녀의 교감이라 착각할지도 모르지만 그렇지 않았다. 지금 두 사람은 눈빛으로 기세 싸움을 벌린 것이다.

“허허, 페르마타, 손님을 앞에 두고 무슨 무례한 태도냐. 네게 청혼키 위해 먼 길을 와주신 귀한 손님인 것을.”

언제 들어온 것일까? 카르세온 백작이 카르세온을 작은 소리로 꾸지람을 했다.

“죄송합니다.”

카르세온은 아버지의 말에 즉각 눈빛을 거두고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호호호. 아니에요. 우리 언니가 먼저 잘못했죠.”

메이린이 웃으며 말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메이린 케이 사이몬이라고 합니다. 카일로니아의 사이몬 공작가의 셋째 딸입니다. 오늘은 저희 큰언니의 청혼 문제로 이렇게 찾아뵈었습니다.”

메이린이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허리를 숙이며 카르세온에게 인사를 했다.

“페르마타 카르세온이라 합니다.”

메이린의 인사에 카르세온은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숙였던 허리를 펴는 순간 한 가지 단어가 그의 귓속에서 맴돌았다.

‘사이몬, 사이몬, 사이몬.’

그 단어가 맴도는 순간 카르세온의 얼굴이 살짝 찌푸려 들었다.

“백작님, 그럼 이제 시작해도 될까요?”

카르세온과 눈이 마주쳤던 여인 로레인은 카르세온에게는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고 카르세온 백작을 보며 물었다.

“허허. 그렇게 하도록 할까? 그럼 날 따라오도록 하게.”

백작은 웃음을 터뜨리며 걸음을 옮겼다. 메이린을 비롯한 나머지 두 여인은 카르세온 백작의 뒤를 따랐다.

“페르마타, 너도 따라오너라.”

아버지의 말에 카르세온도 그 뒤를 따랐다.

‘이곳은?’

카르세온 백작이 이들을 이끌고 간 곳은 연무장이었다. 도무지 청혼을 하러 온 여인과 왜 이곳에 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준비하시죠?”

처음 자신과 눈을 마주쳤던 여인이 가검을 들고 연무장 한가운데로 가며 그에게 말했다.

“대체 무슨?”

자신은 철저히 배제한 채 진행되는 상황에 카르세온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가검을 들고 나가거라.”

아버지의 말에 카르세온은 곁에 있는 검대에서 가검을 하나 집어 들고 흑발의 여인 앞에 섰다.

“잘 부탁해요.”

카르세온에게 살짝 고개를 숙이는 여인의 두 눈은 투지로 불타고 있었다.

“잠깐만요. 그 말은 저와 대련을?”

“몰랐나요?”

돌아온 대답에 카르세온은 황당했다. 청혼을 하러 왔다는 여인이 아침부터 드레스를 입은 채 대련을 신청하다니.

“후… 그 차림으로 대련을 하겠다는 건가요?”

카르세온의 말에 로레인은 자신의 차림을 살폈다.

“드레스를 입은 사람을 상대하기는 그렇다는 말인가요?”

카르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렇다면.”

로레인은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등 뒤 드레스의 매듭을 단 번에 잘라 버렸다. 그리고는 곧 드레스를 벗었다.

“언니!”

그 모습에 이리아와 메이린의 입에서 동시에 비명과 같은 외침이 터져 나왔다.

“대체 이게!”

카르세온은 눈앞의 여인의 행동에 놀라 얼른 고개를 돌렸다.

“순진하군요, 겨우 이 정도에. 걱정 말아요. 안에 다른 옷을 입고 있으니까.”

그 말에 시선을 다시 돌린 카르세온. 눈앞의 여인은 적당히 몸에 붙는 움직이기 편한 형태의 연무복을 입고 있었다. 하지만 카르세온의 얼굴은 이미 붉게 물들어 있었다.

“하아. 언니는 저 드레스가 얼마짜린데…….”

메이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게. 미리 벗어놓고 검을 집던지. 아무튼 성격은 급해서.”

두 사람은 연무장 바닥에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는 드레스를 보며 푸념을 했다. 청혼을 하고 그 상대를 만나는 날이라 일부러 입은 드레스이다. 그런 드레스가 저런 꼴이라니.

“허허허. 재미있군.”

카르세온 백작은 그 모습마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제 진정이 되었나요?”

여인의 말에 카르세온의 얼굴이 다시 붉어졌다. 마치 눈앞의 여인이 작정을 하고 자신에게 시비를 거는 것 같았다.

“제 이름은 로레인 케이 사이몬이라고 해요. 당신에게 청혼을 한 장본인이죠.”

그 말을 꺼내는 로레인의 얼굴이 편치 않아 보였다.

“날 검으로 꺾으면 결혼해 주겠어요.”

마지막 말. 그 말에 카르세온은 어이가 없었다. 이 어이없는 대련은 둘째치고라도 청혼하러 와서 이기면 결혼해 주겠다니 그게 대체 어느 나라의 청혼 방법이란 말인가?

더군다나 자신은 소드 마스터다. 그런 소드 마스터를 상대로 검으로 이기면 결혼해 주겠다니 자신이 너무 우습게 보였다는 생각에 다시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이번은 분노가 그 원인이었다.

하지만 곧 카르세온의 표정이 변했다. 자신은 완벽하게 배제된 채 너무나 정신없이 일이 진행되어 상대의 이름을 흘려들었다. 하나 곧 그 이름이 강렬하게 그의 귀에 울렸다.

로레인 케이 사이몬. 대륙제일의 여기사라 불리는 사이몬 가의 인물이다. 여인의 몸으로서는 유일하게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오른 이다.

결코 자신에 비해 하수가 아니었다. 아니, 카르세온이 전력을 다해 상대를 해도 결과를 알 수 없는 상대다.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예리한 기운이 그의 양미간을 파고들었다. 깜짝 놀란 카르세온은 즉각 검을 들었다. 하지만 기운만이 다가왔을 뿐 로레인은 어떠한 동작도 취하지 않았다.

“이번은 그냥 경고예요. 하지만 다음은 진짜입니다.”

그 말에 카르세온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너무 빠른 전개에 대한 당황에 이은 로레인의 이름에 대한 놀람으로 잠시 얼이 빠져 있었다.

‘나도 아직 멀었군.’

카르세온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사이몬이라…….’

카르세온은 바운더리 산맥의 어딘가에서 대결을 벌였던 이니안이라는 녀석을 떠올리며 준비 자세를 취했다. 그 순간 로레인의 입술에 미소가 떠올랐다.

챙!

그 순간 요란한 소리를 내며 부딪치는 검. 그 소리를 신호로 두 사람은 어지러이 얽혀 검을 교환하기 시작했다.

***

“으음… 역시 강하구나.”

이리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오빠가 추천한 사람인걸.”

이리아의 말에 메이린이 조용히 대꾸했다. 귀에 들려오는 두 사람의 대화에 카르세온 백작은 그저 웃었다. 절로 웃음이 나오게 하는 대화였기에.

‘허허. 이거 아주 얕보이고 있구나. 역시 사이몬 가라는 것인가? 페르마타도 이제 중급의 경지를 바라보는 소드 마스터이거늘. 아무리 대륙제일의 여기사이자 소드 마스터라지만 대체 로레인 양의 실력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카르세온의 백작이 시선이 미치는 곳 그곳에서는 두 사람이 격렬히 싸우고 있었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팽팽한 접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겉보기일 뿐이었다.

‘크윽. 젠장. 무슨 여자가 이렇게 강하단 말이야. 사이몬 가에는 괴물밖에 없단 말인가?’

일검, 일검을 부딪칠 때마다 카르세온은 자신의 열세를 느꼈다.

‘흐음. 제법이긴 한데 아직 부족해. 조금 더 경험을 쌓으면 더 강해질 것 같기는 하지만.’

로레인의 검이 카르세온의 옆구리를 찔러갔다. 카르세온은 황급히 몸을 틀며 회피 동작을 취했다. 그와 동시에 반격을 위해 곧장 로레인의 허리를 쓸어갔다.

하지만 분명 완전히 피할 수 있는 공간으로 몸을 틀었음에도 불구하고 로레인의 검은 여전히 그의 옆구리를 찌르고 있었다.

카르세온은 황급히 로레인을 쓸어가던 검을 회수해 옆구리를 찔러오는 검을 쳐냈다. 그 순간 검이 허깨비처럼 사라졌다. 아니, 검만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로레인도 사라졌다.

‘젠장.’

카르세온은 즉시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곧 기척을 느낄 수 있었다. 느끼자마자 카르세온은 검을 뻗었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늦는다. 그건 이미 한 번 경험했었다.

챙!

카르세온을 곧장 베어가던 검이 카르세온의 검에 막혔다.

“제법이군요.”

로레인은 의외라는 눈으로 카르세온을 바라보았다. 그 눈이 카르세온의 자존심에 상처를 만들었다.

“훗. 처음이 아니라서요.”

로레인의 검을 튕겨내는 카르세온의 검에는 어느새 황금빛 오러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저 사람!’

카르세온이 로레인에게 하는 말을 메이린은 분명히 들었다. 대륙에서 사이몬의 검을 꺾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좀처럼 타국으로 떠나지 않고 자국 내에서도 타인과의 대련을 잘 하지 않았기에. 그런데 처음 겪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조금 전 로레인의 공격은 아무나 펼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사이몬의 검법과 보법을 익혀야만 가능한 연환 공격이었다.

그 검법과 보법의 종류에 상관없이 조금 전 로레인이 보여준 한 수는 검법과 보법의 가장 기본적인 조합이었다.

메이린의 생각과는 상관없이 대련은 계속됐다. 어느새 로레인도 활활 타오르는 붉은 오러 블레이드를 생성시켜 카르세온의 오러 블레이드와 부딪치고 있었다.

“황금빛의 오러라… 처음 보는데?”

이리아는 신기하다는 듯 카르세온의 오러를 바라보았다. 오러는 개인마다 특징적인 빛을 띤다.

이니안의 오러는 푸른빛의 청색이었고 이슈데인은 순은빛, 그리고 사이몬 공작의 오러는 백색이었다. 덕분에 사이몬 공작은 백광의 기사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었다.

그사이 오러의 불꽃을 피어 올리며 격렬하게 싸우던 두 사람은 어느 정도 물러서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흐음… 로레인 언니가 기회를 주려고 하는구나.”

그 모습에 메이린은 중얼거렸다.

“벌써? 생각보다 빨리 끝났네.”

메이린의 말에 이리아의 시선이 두 사람 사이로 향했다. 두 사람의 승부가 이미 갈렸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분명했다.

카르세온은 땀에 흠뻑 젖어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고 로레인은 여전히 처음의 모습 그대로였다. 단지 뺨 한가운데로 흐르는 땀 한 방울이 그녀가 격렬하게 움직였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