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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
“뭐야?”
어디서 그런 기력이 솟았을까? 곧 죽을 사람처럼 바닥에 앉아 힘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호크는 용수철처럼 튕겨 올라 쇠창살을 잡고 으르렁거렸다.
“흐흐흐. 네놈의 방해로 마법이 제대로 발현을 안 했어. 부작용으로 모든 기억을 잃었더군. 칸세르의 기억도 그 이전의 기억도.”
뿌드득.
호크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이를 갈며 사나운 눈으로 클레비클을 노려볼 뿐.
“난 이 말을 해주러 왔을 뿐이야. 이제 폐인이 된 8서클의 흑마법사 호크 말라온이여, 이제 어둠과 절망 속에서 몸부림치게나. 하하하하!”
크게 웃은 클레비클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움직였을까? 클레비클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몸을 돌리지 않고 호크가 들을 만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깜빡했군. 네놈 덕에 준비에 애를 먹었지만 어쨌든 준비는 마쳤어. 마침 내일이 그믐이라 내일 다시 한 번 마법을 실행할 거야. 하하하!”
그 말이 끝나자 클레비클은 다시 걸음을 옮겨 감옥을 벗어났다.
“크아아아악! 네 이놈!! 클레비클! 내 죽어서도 네놈을 절대 용서하지 않을 것이다!!”
홀로 남은 호크의 절규가 복도를 울렸지만 어떤 마법이 걸려 있는 듯 어느 한도 이상은 퍼지지 않았다.
***
“공녀님, 몸은 좀 어떠십니까?”
“늘 그렇죠. 좋아요.”
클레비클의 물음에 포르시아는 별다른 표정 없이 대답했다.
“다행이군요. 이제야 준비를 마쳤습니다.”
클레비클이 고개를 숙이며 말하자 포르시아의 얼굴에 표정이 나타났다. 그것은 기대와 걱정이었다.
“그 말은?”
“네. 내일 밤 마법을 사용해서 공녀님의 기억을 되돌리는 방법을 써볼 생각입니다.”
“그런가요?”
“네.”
포르시아는 고개를 돌려 테라스 밖의 정원을 바라보았다.
“하긴 오래 기다렸으니까요. 확실히 기억이 돌아올까요?”
“제가 생각하는 성공 확률은 9할 이상입니다.”
“그래요? 수고하셨어요.”
“제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
“알겠어요. 혼자 있고 싶군요.”
“네.”
포르시아의 말에 클레비클은 허리를 숙이고 테라스에서 물러났다. 포르시아가 혼자 있고 싶다 했기에 캐서린도 테라스 밖으로 움직였다.
정원을 바라보는 포르시아의 얼굴 표정은 묘했다. 기대와 걱정이 뒤섞인 얼굴이었으나 이내 그것도 사라졌다. 그리고 포르시아의 얼굴을 차지한 감정. 그것은 그리움이었다.
“이니안 오빠, 나 기억을 되찾으면 어떻게 될까요? 보고 싶네요.”
작은 중얼거림이 그녀의 입 안에서 맴돌았다. 그녀가 바라보는 정원에 이니안의 모습이 떠올랐다 사라진다.
잠시 동안 정원에 시선을 던지던 포르시아는 이내 티 테이블에서 일어나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가 일어난 빈 티 테이블 위로 따뜻한 바람이 살짝 머물렀다 지나갔다.
“흐음. 내일이라… 그러고 보니 내일 밤은 그믐이군. 내일 마법을 사용한다라… 분명 드래곤의 눈물을 사용하는 것이겠지?”
나뭇가지 위에서 클레비클의 말을 들은 케라우의 두 눈이 빛났다.
“이제 어떻게 한다. 밤이라면 움직이기 힘든데… 마법을 방해해야 할까? 놔둬야 할까? 일단 저 녀석이 로즈의 기억을 되돌리려 한다는 것만은 사실인데…….”
어느새 자세를 바꿔 나뭇가지 위에서 다리를 꼬고 앉은 케라우는 고민에 빠졌다. 지금까지 머리 쓰기 귀찮아서 무시하던 때와는 다른 모습이었다. 한쪽 다리 위에 얹혀 진 다른 다리가 위아래로 리듬감 있게 움직인다.
“쳇. 이니안 녀석, 이럴 때는 어떻게 대처하라는 정도는 말해줬어야지. 감시만 하라고 했지만 이런 경우는 애매하잖아.”
머리를 긁적이며 이 자리에 없는 이니안을 향해 토해진 케라우의 불만.
“뭐. 일단은 놔둬야 하겠군. 드래곤의 눈물을 사용해서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것은 알겠지만, 일단 그것이 로즈의 기억을 되찾는 것이니. 하지만 클레비클, 저 녀석은 유심히 지켜봐야겠어.”
케라우의 모습이 곧 나뭇가지 위에서 사라졌다.
그냥 관망하기로 결정한 케라우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니안은 알고 케라우는 모르는 사실. 그것은 케라우가 드래곤의 눈물의 기운이라고 말한 것이 포르시아를 두 겹으로 싸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니안 정도로 기감이 뛰어나지 않았기에 케라우는 그저 하나의 기운을 느꼈을 뿐이었고, 그랬기에 그런 결정을 내린 것이다. 지금 포르시아는 세 번째로 드래곤의 눈물을 이용한 마법의 시전 대상이 되었다는 것을 모른 채.
***
거대한 성벽이 보이는 언덕. 그곳에 이니안의 세 누나가 성벽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흐음. 저기가 미오나인이란 말이지?”
“크네.”
크게 대단할 것 없다는 말과 같은 감상이 로레인과 이리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후우. 겨우 미오나인까지 오는데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려서야. 앞으로 어쩌겠다는 거야?”
두 사람의 모습에 메이린이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급할 건 없잖아? 덕분에 이니안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들도 찾았고.”
로레인의 말에 이리아 역시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리아 언니, 우리는 로레인 언니 신랑감을 찾으러 온 거라고. 언니가 더 늙기 전에 얼른 신랑감 찾아야지.”
“아, 잊고 있었네.”
메이린의 말에 이리아가 깜빡했다는 듯 말했다.
“우리 막내가 남긴 흔적이 너무 흥미로워서 말이야.”
이리아가 방긋 웃으며 말했다.
“너희들…….”
로레인의 눈이 심하게 떨렸다. 어느새 잊었는가 싶었더니 자신의 두 동생은 집요하게 자신을 시집보내려 하고 있었다.
“그건 그거고 그곳의 흔적 무척 흥미로웠지?”
“그래.”
이리아의 물음에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 사고뭉치 녀석 설마 무공을 회복했을 줄은 몰랐어.”
로레인이 진중한 얼굴로 두 동생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그렇지. 거기에 있던 흔적은 우리 가문의 무공이 아니면 나타날 수 없는 흔적들이니까.”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사이몬 가의 무공에 가장 정통한 메이린이 말했다.
“설마 그 말썽쟁이 녀석, 마나 스피어를 파괴하지 않고 파괴했다고 한 거 아냐?”
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한다.
“그 녀석 성격 몰라? 절대 그럴 리 없어.”
“그건 로레인 언니의 말이 맞아. 오빠가 조사했을 때도 이니안의 생활은 완전히 평범한 용병의 그것이었다는 걸.”
“그럼 어떻게 된 거야? 그 상태에서 무공이 회복될 리 없잖아. 물론 나도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그 정도는 안다고, 마나 스피어가 파괴되면 우리 가문의 무공은 더 이상 익히지 못한다는 건.”
이리아의 말에 로레인과 메이린이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이 셋 중 가문의 무공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사람은 이리아가 유일했다. 로레인은 실제로 자신이 무공을 익혔고, 메이린의 경우 집안의 모든 무공서를 읽어 이론에 밝았다.
“내 생각도 이리아와 같아. 그런 일이 가능해, 메이린?”
로레인의 시선이 메이린을 향한다.
“흐음… 내 상식 안에서는 불가능해. 우리 집안에 있는 어떠한 책에도 파괴된 마나 스피어를 복구시키는 방법은 없었어. 혹시 드래곤 하트가 있다면 모르지만 말이야.”
“그럼 어떻게 된 거지? 그 녀석이 드래곤 하트를 구했을 리가 없잖아. 하지만 그곳에 남아 있는 흔적은 시시껄렁한 피어스 브레이크 따위의 것이 아니었어. 분명 연계된 초식의 흔적이었지.”
로레인의 말에 메이린은 고민에 빠졌다. 차타르 마을에서 수소문을 하고 메이린의 추적술을 발휘해 이니안이 엄청난 싸움을 벌인 것 같은 장소를 찾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 남아 있는 흔적을 토대로 대강의 추측을 한 사람은 로레인이었다. 그 이후 이곳에 오는 동안 시간만 나면 같은 내용의 대화를 반복하고 있었다.
“더군다나 더 열 받는 것은 가문의 무공의 흔적이 피어스 브레이크에게 깨졌다는 걸 나타내고 있었다고. 멍청한 녀석. 나보고 약하다고 놀리던 녀석이 겨우 피어스 브레이크 따위에 깨질 것은 뭐야?”
로레인은 그 흔적에서 이니안의 패배를 읽을 수 있었다.
“흐음. 결국 또 결론이 나지 않네. 그만 하자고. 어차피 아무것도 못 찾았잖아. 이니안의 흔적으로 보이는 것을 찾아서 뒤쫓아가 봤지만 절벽만 나타나고 절벽에는 아무것도 없었어.”
“그것도 신기해. 어떻게 그렇게 사라질 수가 있지?”
이리아가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는 그 장소에서 분명 어떠한 마법의 흔적을 느꼈었다. 하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그건 이제 그만 이야기하자. 결국 결론은 난 거잖아. ‘알 수 없다’. 이렇게 말이야. 이니안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다면 용병 길드에 들를 테니 오빠가 알 수 있을 거야. 이니안 찾기는 거기까지 진행이 됐으니까 이제 진정한 목표를 달성해야지.”
메이린의 말에 로레인이 주춤거렸고 이리아는 메이린을 바라보았다. 눈동자가 마주친 두 자매의 얼굴에는 굳은 결의가 떠올랐다.
***
서재의 문이 열리고 열린 문 사이로 나타난 인물. 카르세온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카르세온은 소파에 앉아 책을 펼쳐 들고 있는 아버지의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 페르마타, 어서 오너라. 너에게 손님이 찾아와 이렇게 불렀다. 일단 앉거라.”
“손님이라니요?”
카르세온은 아버지의 맞은편 소파에 앉으며 물었다. 아들의 물음에 카데오드 카르세온 백작의 입에 미소가 걸렸다. 아버지의 미소가 불길하게 느껴진 것이 기우이기를 카르세온은 진심으로 바랐다.
“올 해 네 나이가 몇이지?”
“스물여덟입니다.”
뭔가 심상치가 앉았다. 갑자기 뻔한 자신의 나이를 묻다니.
“크흠.”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키는 카르세온 백작.
“무슨 일입니까?”
카르세온이 다시 묻는다.
“사실 네게 청혼이 들어왔다.”
“네?!”
순간 카르세온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은 소리였기 때문이다. 아니, 믿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할까?
사실 카르세온에게는 예전부터 많은 청혼이 들어왔었다. 솔직히 카르세온 정도라면 제국 제일의 신랑감이라 할 만했다. 외모, 능력, 가문. 무엇 하나 빠지는 것이 없지 않은가.
하지만 카르세온은 모든 청혼을 거부했다. 그리고 부모를 설득하여 애초에 청혼의 이야기가 자신에게까지 오지 않도록 차단했다. 덕분에 요 몇 년간 청혼 이야기는 들리지 않았다.
친구를 위해 포르시아를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그의 감정이 완전히 정리된 것은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청혼이라니 가당치도 않은 말이었다.
그가 청혼을 거부하는 이유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오직 그 혼자만의 비밀이었기에. 아버지와 어머니는 카르세온이 가진 특유의 밀어붙이기로 설득을 했었다. 그런데 지금 청혼 이야기라니…….
“크흠. 물론 네가 먼저 말하기 전에는 결혼 이야기는 꺼내지 않기로 했다만 이번에 청혼이 들어온 상대가 너무 아까워서 말이다.”
“아버지!”
아들의 외침에 카르세온 백작은 움찔했다. 자랑스러운 아들이기에 항시 부드럽게 대했다. 아니, 굳이 엄하게 하지 않아도 알아서 반듯하게 자라준 아들이었기에 항시 부드럽게 대했던 건지도 몰랐다. 그런데 카르세온이 아버지에게 소리를 질렀다.
움찔한 기색도 잠시 카르세온 백작의 얼굴에 노기가 서렸다.
“이놈, 페르마타. 지금 네 행동이 감히 이 아비 앞에서 할 짓이란 말이냐?”
카르세온 백작의 호통에 카르세온이 움찔했다. 너무 흥분했다. 분명 백작가의 자제로서 자신의 행동은 상식을 벗어나도 크게 벗어나 있었다.
“죄송합니다.”
카르세온은 즉각 고개를 숙여 잘못을 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