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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대륙력 665년 1월 1일.
그것이 오늘의 날짜다. 한 해가 바뀌어 새로운 일 년이 시작되는 날. 그리고 로레인이 서른 살이 된 날이기도 하다.
카일로니아뿐 아니라 대륙 전체에서 여자가 서른이 되도록 결혼을 하지 못했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였다.
일반적인 결혼 연령은 이십대 초반이다. 좀 늦었다는 사람도 이십대 중반이면 결혼을 한다. 아주 늦어도 이십대 후반에는 다들 결혼을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로레인은 이십대의 끝자락에 있었기에 그나마 할 말은 있었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녀는 빼도 박도 못하는 서른 살인 것이다.
의기소침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로레인을 보며 이리아와 메이린이 은근한 웃음을 지을 때 그들이 주문한 식사가 나왔다. 세 사람이 앉은 테이블에 먹음직스러운 음식들이 자리를 차지했다.
이리아와 메이린은 포크와 나이프를 바쁘게 놀리며 식사에 열중했지만 로레인은 입맛이 없는 듯 포크를 입으로 가져가는 횟수가 현저히 적었다.
로레인의 기분과는 상관없이 새해를 맞이한 세상은 조금씩 하얗게 물들고 있었다.
“내일이면 미오나인으로 가는 국경이지?”
이리아의 물음에 메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로니아의 수도인 사우론과 미오나인 제국과의 국경은 제법 거리가 떨어져 있었다. 이들이 집에서 허락을 얻어 출발한 이후 벌써 열흘이 지난 상태다.
“미오나인에 간다고 그 녀석을 찾을 수 있을까?”
씹고 있던 빵을 삼키며 로레인이 말했다. 이니안을 찾는 일로 화제가 옮겨가자 조금 전 일은 잊었다는 듯 대화에 참여했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찾을 수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지.”
이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그러면 곤란하잖아. 우리는 이니안을 찾으러 나온 거라구.”
이니안은 막내고 로레인은 둘째다. 이니안에게 있어서는 큰누나였기에 그녀는 유독 이니안을 귀여워했다, 물론 그녀만의 방식이었고 이니안은 그것을 질색했지만.
오죽하면 이니안이 기피하는 인물 첫 번째가 이슈데인이고 두 번째가 그녀이겠는가.
“언니, 지금 무언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우리가 여행을 나선 건 이니안을 찾기 위해서가 아니야. 언니 신랑감 찾으러 나온 거라구.”
메이린의 말에 찻잔을 집어가던 로레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건 단지 핑계잖아.”
“글쎄… 그래도 어떤 노력은 보여야 하잖아. 일단 아버님과 어머님은 그렇게 알고 계시니까.”
이리아의 대답에 로레인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변했다. 그녀도 바보가 아니다. 두 사람의 태도에서 무언가 이상함을 느낀 것이다. 왠지 자신이 두 동생에게 당했다는 느낌이 든 것이다.
메이린은 눈치 빠르게 그런 로레인의 변화를 당장 알아차렸다.
“오빠 말로는 이니안의 마지막 흔적이 바운더리 산맥 근처의 차타르라는 마을의 용병 길드라고 해.”
메이린은 출발 전 이슈데인에게 그녀만 들은 정보를 풀어놓았다. 로레인의 관심을 이니안에게로 돌기기 위해서다. 로레인이 무언가 이상함을 눈치채는 것만은 막아야 했다.
“그래? 그럼 진작 말했어야지.”
반응은 단번에 왔다.
‘휴우… 다행이야.’
메이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여행은 절대 이니안을 찾기 위한 여행이 아니다. 이니안의 행적은 이미 이슈데인이 쫓고 있었다.
이니안이 용병으로 등록한 이상 이슈데인이 백방으로 알아보면 대략적인 상황 정도는 알 수 있었다. 물론 그것을 위해서는 엄청난 돈이 들어가지만 말이다.
이번 여행의 진정한 목적은 로레인 시집보내기다, 다만 로레인만이 이니안을 찾기 위한 여행이라 생각할 뿐.
“그럼 국경을 넘는 대로 차타르 마을로 이동하는 거야?”
“그래야지. 마지막 흔적이 그곳이니까. 벌써 보름 전쯤의 일이지만 단서 정도는 남아 있을지도 모르잖아.”
메이린의 설명에 로레인은 흡족한 웃음을 흘렸다. 마치 당장에라도 이니안을 찾은 듯한 얼굴이다.
그녀는 자신의 동생들의 능력을 잘 알고 있었다. 특히 메이린의 통찰력과 지혜라면 이니안을 찾는 것이 그다지 어렵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럼 오늘은 이곳에서 쉬고 내일부터 움직이기로 해. 마침 눈도 점점 더 많이 내리고 있으니까.”
이리아의 말대로 창밖의 눈은 어느새 함박눈으로 변해 있었다. 그리고 하얗게 물든 세상은 점점 더 눈에 가려지고 있었다.
***
“도착했군.”
이니안은 담담한 얼굴로 자신의 눈앞에 있는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급한 일이 없었기에 몸을 추스르며 천천히 걸어왔다. 덕분에 이곳까지 이르는데 거의 보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사이 해가 바뀌어 이니안도 이제 스물두 살이 되었다.
“훗. 저 높은 곳을 그렇게 무식하게 내려왔단 말이지?”
절벽을 뛰어내린 날을 떠올린 이니안의 입가에 어이없는 웃음이 떠올랐다. 상황이 급박하긴 했지만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방법을 썼을까? 자신이 지금 생각해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똑같이 행동할 것이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이었기에.
케이로스의 동굴로는 몸을 숨길 수가 없었다, 소란스럽게 했다가는 당장 케이로스를 상대해야 했기에. 결국은 절벽 아래로 내려오는 방법뿐인 것이다.
“저 녀석은 여전히 저렇게 있군.”
추운 날씨 탓인지 이니안이 잡아서 가죽을 벗긴 트롤의 시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럼 올라가야겠지?”
이니안은 절벽을 잠시 올려다보다가 몸을 날렸다. 그냥 기어 올라가려면 올라갈 수도 있었지만 굳이 그렇게까지 해야 할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에 마령보의 수법으로 몸을 날렸다.
이니안은 가볍게 절벽 곳곳의 튀어나온 부분을 차며 가볍게 껑충껑충 위로 날아올랐다. 이니안이 절벽의 윗부분에 있는 케이로스의 동굴에 도착하는 데는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무척이나 높은 절벽이지만 내상을 완전히 치유한 이니안의 마령보는 무척이나 빨랐던 것이다.
“다시 왔군.”
이니안은 동굴 내부를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당장에라도 이곳에 있었던 때를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 로즈와 있었던 때를 다시 떠올리고 생각에 잠기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저 이런 장소를 볼 때면 떠오를 뿐이었다.
“대체 왜 이곳을 다시 가보라고 했을까?”
이니안은 걸음을 옮기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 크지 않은 동굴이었기에 이니안은 곧 모퉁이를 돌아 케이로스와 대면할 수 있었다.
[왔는가? 인간이여.]
“오랜만입니다.”
[급하게 가는 것 같더니 이번에는 혼자로군.]
케이로스의 말에 이니안은 쓴웃음을 머금었다.
“그렇게 되었습니다.”
케이로스는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대신 몸을 일으켰다.
처음 케이로스를 보았을 때도 생각했지만 그의 몸은 정말 거대하다. 지금까지 그가 본 케이로스는 바닥에 엎드려 있는 모습뿐이었다. 그 모습만으로도 이니안은 압도당했었다.
그런 케이로스가 몸을 일으키자 그 존재감이 어마어마하게 증가했다. 당장에 온몸을 죄어오는 압박감에 이니안의 몸이 살짝 떨렸다.
몸을 일으킨 케이로스는 천천히 옆으로 움직였다.
[이렇게 움직여 본 것이 몇십 년 만인지 모르겠군.]
케이로스의 말에 이니안은 침을 꿀꺽 삼켰다. 수십 년을 그렇게 엎드린 자세로 그 문 앞에 앉아 있었다는 말에 절로 놀라움이 배어 나왔다.
[들어가라.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겠다.]
“예?”
그때 머리에 울린 케이로스의 음성에 이니안은 자신도 모르게 되물었다.
[저 문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한다고 했다.]
케이로스는 다시 한 번 말했다. 이니안은 어안벙벙한 얼굴로 케이로스를 쳐다보았다.
“들어가도 됩니까? 제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이니안은 다시 물었다.
[안 된다.]
케이로스는 단호하게 말했다.
[하지만 인정받은 자가 네가 들어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다.]
“로즈가 말입니까?”
이니안의 물음에 케이로스가 머리를 끄덕였다.
[그렇다. 그것 역시 인정받은 자가 가진 권리 중 하나. 그녀의 부탁으로 너는 저 안으로 들어갈 자격을 얻은 것이다.]
케이로스의 대답에 이니안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기묘한 웃음이다. 기쁜 것인지 씁쓸한 것인지 도무지 그 감정을 읽을 수 없는 웃음이다.
‘이것이었냐, 네가 다시 이곳을 찾으라고 한 이유가?’
이니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몇 걸음 움직이지 않아서 이니안은 케이로스가 지키고 있던 석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케이로스가 그 앞에 엎드려 있을 때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을 것만 같던 곳에 너무나 간단히 도착해 버렸다.
석문은 과연 거대했다. 케이로스의 몸에 가려져 있던 부분까지 드러나자 그 거대한 크기로 이니안을 압도했다.
“어떻게 들어가면 됩니까?”
이니안은 케이로스를 보며 물었다.
[손으로 문을 짚어라. 그러면 된다.]
이니안은 케이로스의 말대로 손을 문에 가져갔다. 손이 문에 닿자 손은 문 안쪽으로 빨려 들어갔다. 거대한 석문으로 보였는데 이니안의 손은 아무런 장애도 없이 그 속으로 들어간 것이다. 그것을 확인한 이니안은 천천히 앞으로 걸음을 옮겼다.
이니안의 몸이 문을 통과했다.
[안에 든 이가 있으니 입구를 닫아야겠군.]
케이로스가 엎드려 있던 몸을 일으켰다. 느릿느릿한 걸음으로 절벽을 향해 몸을 옮기는 케이로스. 동굴의 입구에 도착한 케이로스의 두 눈이 붉게 물들었다.
그 순간 절벽을 향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던 동굴의 입구가 사라졌다. 입구 주변에서 서서히 자라나온 바위가 앙다문 입술처럼 동굴의 입구를 막았다.
문을 통과한 이니안의 눈에 비친 것은 아무것도 없는 동굴이었다. 엄청난 규모의 거대한 공동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런 곳을 케이로스같이 대단한 존재가 지키고 있었단 말인가?”
사실 무언가를 기대하기는 했었다. 케이로스라는 존재가 너무나 엄청났기에 무언가 대단한 것이 석문 너머에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데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크고 황량한 동굴일 뿐이다.
아무것도 없는 동굴의 모습에 실망한 이니안의 눈에 무언가 반짝이는 것이 보였다. 동굴의 한가운데였다. 이니안은 그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동굴의 크기가 엄청났기에 상당한 시간을 보내고서야 이니안은 빛나는 물체가 있는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빛을 뿌리고 있던 물체. 그것은 수정이었다. 어른의 손가락 두 개를 합쳐 놓은 정도의 크기의 수정. 그 모양은 마치 사람의 눈물이 눈에서 떨어지는 것과 같았다.
그 투명한 수정은 기기묘묘한 빛을 사방으로 뿌리고 있었다. 보는 각도에 따라 거리에 따라 갖가지 찬란한 빛을 뿌리는 모습이 아름답기 그지없었다.
“아름답군.”
이니안은 자신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멍하니 눈앞의 보석을 바라보던 이니안은 케라우에게 들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사람의 눈물 모양의 수정이라…….’
드래곤의 눈물의 모양을 설명하던 케라우는 분명 그렇게 말했었다.
“그렇군. 그럼 이게 드래곤의 눈물이란 말인가?”
드래곤이 죽음을 맞이하며 자신의 의지로 남기는 것이기에 무척이나 희귀하다는 드래곤의 눈물이다. 그것이 지금 이니안의 눈앞에 있는 것이다.
“이곳이 드래곤의 레어라고 했으니 맞겠지, 드래곤의 눈물이.”
이니안은 유심히 눈앞의 수정을 살폈다. 보면 볼수록 황홀함과 신비로움이 묻어 나오는 보석 같았다.
“역시… 그런 것인가…….”
혹시나 하는 기대가 무너진 진득한 안타까움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이니안은 눈앞의 드래곤의 눈물을 살피는 한편 그것이 품고 있는 마나의 기운을 느꼈다.
결과는 같았다. 자신이 어새신을 물리친 어느 날 밤 로즈의 몸에서 느꼈던 것과 같은 류의 기운이었다. 세밀히 따지면 어딘가 느낌이 달랐지만 그 기운의 색깔이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