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59화 (59/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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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17장. 분명 그곳이었을 거야

로즈는 힘껏 달렸다. 자신을 막으려는 기사를 떨쳐 내고 이니안을 향해 달렸다. 그녀의 눈에 이니안의 모습이 들어왔다. 거대한 나무 둥치에 등을 기대고 축 늘어져 있는 이니안의 모습.

처참했다. 언제나 자신에게 강인한 등만을 보여주던 이니안이 저런 꼴을 하고 있을 것이라 상상도 못했다.

입 주변과 목 언저리에 묻어 있는 검붉은 피, 힘이 없는 듯한 눈동자, 산산조각이 난 검.

모두 상상할 수 없는 모습이다.

그때다.

카르세온이 천천히 이니안을 향해 다가간다. 그의 손에 들린 검이 움직인다. 서서히 느릿느릿 움직이는 검. 그러나 절대 멈추지 않고 한 곳을 향해 움직였다.

이윽고 검이 멈춰 섰다. 검이 멈춰선 곳은 바로 이니안의 목 앞. 아니, 검끝이 목을 조금 파고들었다.

붉은 피가 방울지며 또르르 흘러내린다.

로즈의 두 눈에 똑똑히 보였다. 그 선명한 붉은빛을 띤 핏방울.

온몸이 떨린다.

“멈춰요!!”

자신도 모르게 커다란 소리가 입에서 터져 나왔다.

로즈의 외침에 이니안과 카르세온의 눈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이니안의 눈이 살짝 떨렸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녀님?”

카르세온은 담담한 목소리로 로즈에게 물었다.

“당장 그 검을 치우세요.”

로즈는 두 눈을 차갑게 빛내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카르세온은 로즈의 눈을 마주 보며 단호히 말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이것은 정당한 대결이었고, 저는 승리했습니다. 저는 제 부하의 무덤 앞에서 한 맹세를 지켜야 합니다.”

로즈는 카르세온의 말에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대결은 정당하지 않았어요. 당신의 부하들이 끼어들었으니까요.”

자신을 막던 기사에게 한 말을 로즈는 다시 한 번 카르세온에게 했다.

“인정할 수 없습니다. 물론 제 부하가 끼어들기는 했지만 저는 정당한 대결을 위해 오히려 그를 꾸짖었습니다.”

“물론 그랬지요. 하지만 정말 그의 말을 전혀 참고하지 않은 거였나요? 만약 그가 아무 말 없이 가만히 있었다면 그때의 공격을 막을 수 있었나요?”

로즈의 말에 카르세온은 입을 다물었다. 로즈의 물음을 스스로에게 반문하는 듯한 행동. 잠시 고개를 아래로 향한 채 생각에 잠겼던 카르세온의 입이 서서히 움직였다.

“대결에 만약이란 말은 없습니다.”

카르세온은 그 대답으로 자신의 의지를 명확히 했다.

“하아… 당신은 결국…….”

카르세온의 대답에 로즈는 낮게 한숨을 쉬었다. 그런 로즈의 행동에 아랑곳 않고 카르세온은 자신의 시선을 이니안에게로 돌렸다. 그의 검은 여전히 이니안의 목에 닿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로즈의 눈에 단호한 결심이 어렸다.

“그럼, 이만 끝내지.”

카르세온이 다시금 검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당장 멈춰요!”

다시 한 번 터져 나온 로즈의 호통. 그 소리에 카르세온은 그 자세를 유지한 채 조용히 고개만 돌려 로즈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는 곧 그의 검을 이니안의 목에서 거두어야만 했다.

어느새 로즈의 손에 들려 차가운 빛을 발하고 있는 잘 벼려진 단검. 그 단검의 끝은 정확히 로즈의 목에 닿아 있었다.

“고… 공녀님, 어찌…….”

“그 검이 이니안 오빠의 목을 파고드는 만큼 이 검이 나의 목을 파고들 거예요.”

단호했다.

로즈의 눈은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반드시 그러하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런 로즈를 지켜보는 이니안의 눈이 다시 한 번 떨렸다. 힘없이 검병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얼마나 세게 쥐었을까? 손가락이 검병을 조금씩 파고들어 갔다. 검병을 쥐고 있는 손이 부르르 떨렸다.

비참했다.

패한 것까지는 좋았다, 자신이 약해서 진 것이니까. 하지만 저런 로즈의 행동이라니. 물론 로즈가 이니안 자신을 위해서 저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은 안다. 순전히 자신을 살리기 위한 노력이라는 것을 안다. 알지만 참기 힘들었다. 이 비참함이라니.

“왜 이깟 용병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시는 겁니까?”

로즈를 바라보는 카르세온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당신은 그 검을 치우고 물러나면 돼요.”

카르세온을 마주 보던 로즈가 잠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카르세온은 그녀의 그 눈빛에서 무언가를 보았다. 지금 로즈가 이니안에게 보내고 있는 눈빛, 그것은 단순히 자신을 지켜준 용병에게 보낼 수 있는 눈빛이 아니었다.

카르세온은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공녀 포르시아를 바라보던 눈빛이 지금 로즈의 눈빛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카르세온의 몸이 떨려 왔다.

포르시아는 기억을 잃은 것이 분명했다. 주인의 이름으로 명을 내리면 자신은 물러설 수밖에 없는데도 굳이 검을 들고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자신을 막아섰다.

그것은 어떠해도 상관없었다.

지금 카르세온에게 중요한 것은 포르시아가 그런 행동을 하게 된 마음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추측할 수 있기에 분노가 밀려왔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 하지만 어찌 그럴 수가 있는가.

“정녕 그렇게까지 하셔야 합니까?”

물음을 던지는 카르세온의 눈빛이 심하게 떨려왔다.

“그래요.”

로즈의 목소리는 시종일관 담담했다.

“…알겠습니다.”

카르세온은 씹어뱉듯 대답하고 몸을 획 돌렸다. 그리고 자신의 검을 거칠게 검집에 쑤셔 넣었다. 검을 수련하는 기사로 절대 보일 수 없는 행동이었다. 그만큼 카르세온이 분노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네놈, 운 좋은 줄 알아라. 우스운 꼴이다만. 크크크.”

몸을 돌리는 카르세온은 이니안에게 낮게 중얼거렸다. 명백한 조롱이다. 자신의 목에 스스로 들이댄 여인의 애처로운 몸부림 덕에 목숨을 건진 이니안을 향한. 하지만 조롱 뒤에 이어진 웃음은 절대 비웃음이 아니었다. 그랬다. 무언가 한이 담긴 웃음이었다.

카르세온의 말과 웃음은 비수가 되어 이니안의 가슴에 쑤셔 박혔다.

카르세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부하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갔다. 부하들의 곁에 당도한 카르세온은 차가운 눈으로 부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질책이 담겨 있었다, 어이해 로즈가 그곳까지 갈 수 있게 놔두었냐는.

“죄송합니다.”

하론이 짧게 말했다. 그의 눈은 땅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어떠한 변명도 필요 없었다. 분명 자신의 잘못이었기에.

“죄송합니다.”

하론의 말에 이어 나머지 여덟 기사의 입도 동시에 열렸다. 그들 모두 땅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카르세온은 시선을 돌렸다.

“그만 그 검을 치우십시오. 보고 있기만 해도 위태롭습니다. 저는 이미 이곳까지 물러났습니다. 이후로 그자의 손끝 하나 건드리지 않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카르세온의 말에 로즈는 고개를 끄덕이며 단검을 내렸다.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이니안이 사주었던 단검. 그 단검이 이렇게 쓰일 줄은 그도, 그녀도 몰랐을 것이다.

“아!”

아래로 늘어뜨린 단검을 바라보던 로즈는 작은 탄성을 뱉었다. 그리고 왼손을 들어 목을 스윽 문질렀다. 축축한 무언가가 손에 묻어났다. 그리고 따끔한 아픔도 느껴졌다. 단검을 너무 가까이 댄 것일까? 목의 살갗이 살짝 베었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었으면 목이 베인 통증도 느끼지 못했을까? 단검에 묻은 핏방울을 보고야 그녀는 자신의 살을 베인 것을 알아차렸다. 왼손 손가락에 붉은 피가 묻어 나왔다.

“뭐야? 이게…….”

자신의 손에 묻은 피를 보며 로즈는 살짝 웃었다. 그 웃음과 함께 몸이 떨려 왔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이 어떤 행동을 했는지 인지한 것이다.

천하의 소드 마스터 앞에서 자신의 목숨을 걸고 막아서다니. 아무리 그가 자신을 공녀라 하며 공경하고 있다지만 분명 엄청난 일이었다. 그것을 이제야 인지한 것이다. 목에서 묻어 나온 자신의 피를 보면서.

그녀는 알 수 없었다. 자신이 왜 이렇게 무모한 짓을 했는지. 다만 반드시 그래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뿐. 카르세온도 눈치채고 있는 것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있었다.

“킥킥, 킥킥킥.”

그때 이니안이 정신 나간 사람처럼 웃었다.

카르세온이 검을 거두어 물러나고 로즈가 목에 댄 단검을 내릴 때 그는 보았다, 로즈의 목에 그어진 붉은 줄을. 그 순간 이니안의 비참함은 절정에 달했다. 그래서 그런 웃음으로 터져 나온 것이다.

“이니안 오빠…….”

급작스러운 이니안의 웃음에 로즈가 걱정스러운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그런 로즈의 행동에 아랑곳 않은 이니안은 계속해서 웃을 뿐이었다.

“우스워.”

웃음을 멈춘 이니안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로즈는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내 꼴이 너무 우스워.”

로즈의 눈에 안타까움이 스며들었다.

“지켜주겠다고 하고선 오히려 지켜지다니…….”

“아니에요, 오빠. 오빠가 아니었으면 전…….”

이니안의 말에 로즈는 황급히 고개를 저으며 그것을 부정했다. 자신이 이니안을 발견하지 못했더라면, 자신이 이니안을 동굴로 데려가 살리지 않았더라면 오히려 자신이 죽었을 것이다.

그녀의 능력으로서는 처음 이니안을 만난 그날, 이니안이 막아준 어새신들의 손에서도 살아날 수 없었다. 이니안을 만나지 못했더라면 그날이 그녀가 죽는 날이었다. 하지만 이니안을 만났기에 아직도 살아 있는 것이다.

정말로 이니안은 그의 말대로 훌륭히 자신을 지켜주었다.

이니안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차타르 마을의 식당에서 만난 그 귀여운 소녀, 아이라가 사실은 자신을 죽이려던 어새신임을 알 수 있었을까?

그때는 너무 충격적인 일이었기에 이니안을 원망하기도 했었지만 이제는 그런 마음은 없었다. 그 이후 혈로를 뚫는 이니안의 등을 보면서 그때 자신의 생각이 안일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렇다.

이니안은 자신을 소중히 지켜주었다.

“후후후. 그런 것치고는 지금 내 꼴이 말이 아니야.”

이니안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로즈는 그런 이니안을 여전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건 절대 아니에요. 오빠가 아닌 그 누구도 저를 그렇게 지켜주지는 못했을 거예요. 오늘의 대결은 그 자체가 불공정했어요. 오빠는 이미 엄청난 적들을 상대로 싸우느라 지쳐 있었는걸요.”

“변명일 뿐이지.”

이니안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후우…….”

이니안의 완고한 태도에 로즈는 한숨을 쉬었다. 지금 자신의 행동으로 인해 이니안은 그 어떤 말을 들어도 그것을 모두 자학의 의미로 바꾸고 있었다.

“이니안 오빠.”

로즈는 작게 이니안을 불렀다. 지금까지 부르던 그녀의 말과는 무언가가 달랐다. 어느새 눈가에 습기가 어려 있다.

“고마워요.”

진정이 담긴 짧은 말. 그 말을 했을 때 로즈의 눈가에 습기가 뭉쳐 아롱진 물방울이 흘러내렸다.

이니안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눈으로 로즈를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말에 이니안은 잠시 지금의 상황을 잊었다.

“저는 저들을 따라갈 거예요.”

이니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의 과거를 알고 있는 이들이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로즈의 신분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이상 저들을 따라가는 것이 이치에 맞는 일이다.

자신은 단지 로즈를 수도에 안전히 데려다 주기로 한 용병일 뿐이다. 그녀가 결정한 일이라면 그녀의 뜻에 따라주면 된다.

‘그런데 뭐지? 이 느낌은?’

이니안은 부정했다. 가슴 한쪽이 쓰려오는 듯한 감정을 애써 느낌이라 치부하며 외면했다.

“사실은 저… 저들을 따라가고 싶지 않아요. 저들의 말이 너무 엄청난 거라 쉽사리 믿어지지도 않고요. 그냥 오빠와 수도로 가서 정말 내가 누구인지 확인하고 싶어요.”

잠시 말을 멈춘 로즈가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한 로즈의 애잔한 눈빛을 보는 순간 이니안은 하마터면 입을 열어 외칠 뻔했다.

‘그럼 나와 수도로 가면 되잖아!’

그 말을 이니안은 가까스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단지 생각만 했을 뿐. 이니안은 알 수 없었다. 왜 자신에게 그런 생각이 떠올랐는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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