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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대륙력 658년 6월 18일.
젠장, 차라리 날 죽이라고! 연무장 백 바퀴를 돌라고 하든지, 아니면 기본 검식 수련 천 번을 하라고 하든지! 그런 걸 시키면 얼마든지 해줄 수 있어! 하지만 이게 뭐야? 공부라니? 그것도 악마랑 오빠 동생 하는 큰누나라니?
오늘로 내가 로레인 누나와 공부를 시작한 지 3일째.
내가 처음 한 말을 들어서 알겠지만 나에게는 지옥 그 자체나 다름없었다.
일단 왕립학교 편입 시험 과목부터 공부를 하기 시작했는데 그 과목이 역사, 신학, 수학이다. 딱 세 과목.
왕립학교 편입 시험 과목이라 하기에는 적지만 대신 그만큼 깊이 있는 문제가 나왔다. 즉, 왕립학교에 입학하는 학생이라면 반드시 저 세 과목은 기본적인 실력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저 세 과목은 내가 가장 싫어하는 과목이기도 했다.
“자, 이니안, 내가 시킨 부분은 다 외웠지?”
내가 지금 나의 상황에 대해 한탄하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때, 잠시 자리를 비웠던 로레인 누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 목소리에 아차 하며 책상 한 켠에 놓인 탁상시계를 쳐다보았다.
아뿔싸! 벌써 누나가 준 시간은 끝났다. 그럼 그동안 난 뭘 했느냐? 현재 내 신세에 대한 한탄과 불평들을 내뱉고 있었지. 설마 시간이 이리 빨리 갈 줄은…….
어느새 옆에 놓인 의자에 앉은 누나는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그리고 살짝 올라가는 입술. 분명 지금 내 상태를 눈치챈 것이다. 그러니 저리도 사악하게 웃는 것이지.
“저런, 다 못 외웠나 보구나?”
안타깝다는 듯 말하는 로레인 누나.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즐거움만이 가득했다.
“그럼 벌칙은 알고 있지?”
“저… 누나, 다시 한 번 기회를…….”
벌칙. 이제는 말만 들어도 끔찍했다. 그래서 나는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누나에게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니안.”
그런 나의 행동에 누나는 두 눈을 지그시 감으며 나직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응?”
“넌 기사 지망생이지?”
“응.”
누나의 나직한 물음에 난 찜찜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분명 저런 누나의 행동에는 무언가 있다. 그리고 난 그 무언가를 몰랐기에 한없이 찜찜했다.
“기사가 목숨을 건 대결에서 패하면 어떻게 되지?”
“명예롭게 죽어야지.”
“그렇지?”
“당연하지.”
어느새 기사의 명예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기에 난 당당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미 누나의 의도가 무엇인지는 내 머리에서 사라졌다. 지금 내 가슴과 머리에 가득한 것은 오로지 기사의 명예뿐이었다.
“그럼 내가 조금 전 너에게 시킨 건 기사라면 하나의 승부로 받아들여야 하고 진지하게 임했어야 해. 그리고 넌 다 못 외웠지. 그렇다면 곧 대결에서 졌다는 거야. 그렇다면 곱게 목을 씻고 죽을 준비를 해야지, 어디서 한 번 더 기회를 달라고 해! 너, 나중에 기사가 되어 대결에서 패했을 때도 그럴래?! 응?!”
뒤로 갈수록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하더니 급기야는 날카롭게 울렸다.
“나… 난… 저기…….”
들어보면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어떻게 생각해 보면 억지로 끼워 맞추는 듯한 어거지 같기도 했지만 난 아무런 대답도 못했다. 그저 빨갛게 변한 얼굴로 고개를 숙일 뿐.
누나의 말이 논리적이든 그렇지 않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다. 누나가 마지막으로 한 말이 가슴을 후벼팠다. ‘기사가 돼서 대결에 패했을 때 상대에게 목숨을 구걸할래?’라는 그 말. 비록 난 아직 기사가 아니지만 당당한 기사 가문의 아들이다.
그 말이 그렇게 내 가슴을, 나의 명예를 아프게 할 수 없었다.
“미안, 잘못했어.”
결국 난 백기를 들었다. 그렇다. 누나의 말대로 어떻든 난 누나가 낸 과제를 다 못했고, 거기에 따른 벌칙을 당당히 받아야 했다. 그렇게 결심한 나의 말에 누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그래야지.”
그렇게 말하는 누나의 얼굴에 떠오른 미소는 점점 더 사악하게 변했다. 마족들이 와서 누님이라 부를 정도로 사악해진 그 얼굴. 그와 동시에 어느새 누나의 오른손에는 반들반들한 목검이 들려 있었다.
“준비해라.”
단 한 마디의 말. 그 말을 끝으로 누나의 오른손이 바쁘게 움직였다. 동시에 나를 향해 수많은 잔영을 만들며 날아오는 목검. 난 최선을 다해서 맞았다, 단 한 대도 피하지 않고. 그것이 나의 벌칙이었다. 날아오는 검을 고스란히 맞을 것.
솔직히 나 정도의 실력이면 날아오는 검은 거의 자연스럽게 피할 수 있다. 이미 완전히 몸에 배어들어 본능 그 이상의 어떤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못 피할 검이라면 모르지만 피할 수 있는 검이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 피하게 되는데 그럴 수 없다니…….
누나가 나에게 날리는 검은 내가 못 피할 정도는 절대 아니다. 검술은 내가 누나보다 훨씬 뛰어나니 그건 당연한데 벌칙이기에 나는 본능 그 이상의 어떤 것을 눌러가며 누나의 검을 맞아줘야 하는 것이다.
물론 누나도 치명적인 부분은 피해서 적당히 맞을 만한 곳을 골라서 때리지만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누나의 검을 맞고 있어야 하다니……. 그래도 어쩌겠는가? 그냥 맞아야지.
어느새 지정된 횟수가 끝나자 누나는 목검을 거뒀다.
“하지만 너도 참 한심하다. 어떻게 똑같은 부분을 가지고 3일째 나한테 맞고 있니? 응? 너, 머리가 나쁜 거야? 아니야. 그렇지는 않을 텐데……. 왜 그렇게 공부를 안 하는 건데? 응?”
무척이나 상쾌한 얼굴로 검을 거둬들였던 누나는 어느새 한심하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누나의 질책. 난 아무 말도 못하고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솔직히 난 머리가 좋다. 머리가 나쁘면 절대로 못 익히는 게 우리 집안 검술이다. 그런 검술을 난 아주 쉽게 익혔다. 즉, 머리가 좋다는 소리다. 한데 공부는 이러니 누나가 저런 말을 할만도 하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무술서라면 저절로 눈이 가고 집중이 되는 반면 이런 신학 책은 제목만 봐도 머리에 쥐가 나니…….
“호호호, 언니도. 적당히 해. 어디, 이니안이 그런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뭘.”
그때 들려오는 구원의 목소리. 노크 소리가 안 들린 걸 보니 그냥 문을 열고 들어온 모양이다. 지옥에 빠진 나에게 메시아 같은 둘째누나 이리아.
“어라? 웬일이야, 이리아? 네가 이 시간에 다 들어오고?”
“응, 오늘은 좀 일찍 끝났어. 그나저나 잘하고 있었니, 우리 막내?”
큰누나의 물음에 대답한 이리아 누나는 어느새 곁에 다가와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런데 공부는 많이 했니? 시작했다는 이야기만 듣고 한 번도 못 봐줘서 오늘 와봤는데.”
다정하게 묻는 이리아 누나. 역시 천사다. 저기 있는 저 악마랑은 차원이 다르다. 누나의 물음에 내 얼굴은 미소로 가득 찼다.
“많이 하고 말 게 뭐가 있어. 창세신화 도입부에서 벌써 3일이나 보내고 있는데.”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옆에서 들려온 큰누나의 목소리. 나의 얼굴은 대번에 일그러졌지만 그와 동시에 일그러지는 큰누나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금세 원상태로 돌아왔다.
다만 큰누나의 말에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작은누나가 날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말이야?”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 작은 누나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큰누나가 같은 말을 하면 묘한 반발감이 생기는데 작은누나가 저리 말하면 나는 아무런 힘을 못 쓴다.
“그게… 책만 보면 자꾸 엉뚱한 생각이 떠오르고… 또… 그게…….”
무언가 말을 하려 했지만 무슨 말을 하겠는가? 나는 그저 횡설수설 이 말 저 말 웅얼거릴 뿐이었다.
“후, 너한테 공부가 안 맞는다고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왕립학교에 입학하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건데 열심히 해야지.”
나의 말을 듣던 작은누나는 따스한 눈길을 주며 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 작은 손길에 나는 갑자기 불끈 솟아오르는 의욕에 두 눈에서 불이 번쩍였다.
“이리아, 어떻게 할래? 오늘은 네가 가르쳐 볼래? 보아하니 나하고 할 때보다 더 의욕에 불타는 거 같은데 말야. 적어도 내가 시킬 때는 저런 얼굴은 아니었거든.”
나의 변화를 눈치챈 큰누나가 작은누나에게 말을 꺼냈다. 그거야말로 내가 바라는 것이기에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눈으로 작은누나를 쳐다보았다.
“미안해서 어떻게 하지, 언니에게도 이니안에게도? 오늘 빨리 마쳐서 일찍 오긴 했는데 내일까지 해야 할 과제가 많아서. 이제부터 난 과제를 하러 가야 해.”
아, 무슨 청천벽력 같은 소리인가. 결국 결론은 나는 계속 큰누나랑 공부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작은누나는 한껏 미안한 얼굴로 나를 보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니 내가 뭐라 하겠는가.
“그럼 열심히 해, 이니안.”
그 말을 끝으로 작은누나는 내 공부방에서 나갔다.
“그럼 계속해 볼까?”
큰누나의 그 말은 나에게는 사형선고와 다름없었다. 내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의 주먹이 머리로 날아왔다.
“아야!”
“야, 이리아가 있을 때랑 없을 때랑 대번에 얼굴이 그렇게 바뀌면 내 기분이 퍽도 좋겠다. 응?”
“아, 아니… 그게…….”
가시가 있는 큰누나의 말에 황급히 변명하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됐다, 됐어. 30분 준다. 아까 그 부분 다 외워라.”
그 말을 끝으로 큰누나도 방에서 사라졌다. 그렇다. 이게 지난 3일간의 일이었다. 어디서 어디까지 외워라. 그 말만 하고 큰누나는 사라졌다. 그리고 정해진 시간이 지나고 나서 나타나서는 외웠는지 확인한다. 다 못 외웠으면 아까의 그 벌칙.
그리고 지금까지 난 단 한 번도 그 벌칙에서 벗어난 적이 없었다. 지금 큰누나가 정해주고 나간 부분은 첫날 처음 공부를 시작할 때의 그 부분이었다.
이게 무슨 공부란 말인가. 어디서 어디까지 외워라. 단 한 마디. 하다못해 한 번 읽어주지도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그냥 외워라. 이 말만 하고 사라지는 큰누나. 그러니 내가 어찌 불만을 안 가질 수 있겠느냐 말이다.
다시 30분이 흐르고 어김없이 큰누나가 들어왔다. 정말 시간 하나는 칼같이 지킨다.
“다 외웠어?”
들어오자마자 다른 말없이 일단 확인부터 하는 큰누나. 벌써 3일째다. 내가 아무리 공부를 하기 싫다지만 이번만큼은 외웠다. 보낸 시간이 3일인데다 조금 전 이리아 누나의 격려도 있었다. 그 덕에 이번에는 그야말로 죽어라 외웠다.
무슨 말인지도 모를 잠만 오는 말을 그저 외웠다. 뜻은 알려 하지도 않았고, 이해하려 하지도 않았다. 그냥 외웠다. 내가 자신만만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누나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정말?”
큰누나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물었다. 나는 다시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만큼은 외웠으니까.
“읊어봐.”
세상에 어찌 저런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3일 만에 겨우 외운 동생한테 기특하다는 말은 못할망정 읊으라니? 정말 친누나가 맞을까?
작은누나와 막내누나를 봤을 때 분명 큰누나는 친누나가 아닐 거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일 뿐,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다. 말했다가는 그 결과가 뻔했기에.
그런 생각을 뒤로하고 나는 누나가 정해준 부분을 소리 내어 외우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거둔 성과인데 누나의 저런 태도에 오기가 치밀어 외운 내용을 읊는 나의 목소리는 과히 좋지만은 않았다.
“호오, 정말 다 외웠네?”
내가 다 외우자 큰누나는 신기하다는 듯 나를 바라봤다. 그런 큰누나의 눈빛을 나는 의기양양하게 받았다. 코는 한껏 하늘을 향해 솟아 있었다.
“그럼 여기서 여기까지. 시간은 한 시간. 그럼 이따가 보자.”
그 말을 남기고 큰누나는 유유히 사라졌다. 그런 큰누나의 뒷모습을 바라본 나는 허탈한 심정에 책상에 엎어졌다.
대체 뭐란 말인가, 저 반응은? 그리고 이 공부 방법은? 기껏 외웠더니 다음 분량을 정해주며 사라지는 저 무성의한 태도. 정말 공부할 맛 안 난다.
이렇게 큰누나와 나와의 공부는 나의 의사와는 하등 상관없이 순조롭게 이어져 나갔다.
“우와∼!”
어둠침침한 곳에서 마법등에 의존해 책장을 넘기던 아이덴의 입에서 감탄성이 터져 나왔다.
“로레인 고모, 엄청 무섭구나. 그지, 오빠?”
“그래, 앞으로 조심해야 할 것 같아.”
동생 네이라의 말에 아이덴은 심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빠, 너무 바보 같아. 그깟 신학 경전을 못 외워서 로레인 고모한테 그렇게 구박받고.”
무어가 억울한 것인지 네이라가 입술을 삐죽이며 말했다.
“그러게. 나도 다 외우는 건데 왜 아빠는 열다섯 살이 되도록 그걸 못 외웠을까?”
아이덴이 고개를 저었다.
이니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신의 아이들에게 우습게 보이고 있었다. 모두 자신의 물건을 제대로 간수 못한 탓이리라.
“그런데 이 다음에 어떻게 됐을까?”
네이라가 눈을 빛내며 말한다.
“어서 넘겨보자.”
아이덴의 손이 급하게 일기장을 넘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