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57화 (57/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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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7]

<외전> 이니안의 일기.

“고모! 고모!”

멀리 복도에서 들려오는 아이들의 소리에 메이린은 읽고 있던 책을 덮었다. 이번에는 저 개구쟁이들이 또 무슨 일로 자신을 찾는지 기대가 되었다. 그 아이들은 항상 자신에게 즐거움을 주었다.

벌컥!

공작가 저택의 문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게 열렸다. 역시 자신의 귀여운 조카들이었다.

“고모, 이 책 뭐예요?”

메이린의 시선이 큰조카 아이덴이 들고 온 책으로 향했다.

‘어머? 저건…….’

그녀도 까맣게 잊고 있던 책이다. 그녀도 잊고 있었으니 당연히 무신경한 이니안은 생각도 못할 테지.

“이거, 아빠가 예전에 쓰던 방 책상에서 나왔는데 뭔지 아세요? 아빠의 책상 서랍에서 책이라니, 믿을 수 없어요.”

둘째조카인 네이라가 그 예쁜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메이린을 바라보았다. 과연 이니안의 딸답게 예쁜 얼굴이다.

“호호호, 너희 아버지가 공부하곤 거리가 좀 멀긴 하지.”

메이린의 웃음에 두 남매는 서로 마주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아버지 이야기지만 그건 분명 사실이었으니까.

올해 아홉 살인 아이덴과 일곱 살인 네이라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너희들, 아버지 책상 엉망으로 어지럽혔지?”

메이린이 짐짓 사납게 눈을 뜨고 두 조카를 내려다보았다. 그녀는 아이들이 가지고 온 책이 어디에 있는 것인지 알고 있었기에 조카들이 얼마나 방을 어질러 놓았을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헤헤헤, 그게… 저기…….”

아이덴이 멋쩍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인다. 항상 저 웃음에 져왔다.

“후우, 알았다. 대신 너희가 어질러 놓은 것은 너희가 치워야 한다?”

“네, 그건 당연하죠.”

공작의 손자와 손녀지만 자신이 어질러 놓은 것은 스스로 치워야 한다. 아무리 하인과 하녀가 넘쳐 나도 자신의 일은 자신의 손으로. 이 집안의 철칙이다.

“그 책에 채워진 자물쇠 때문에 가지고 온 거지?”

메이린 역시 과거에 그 책을 본 적이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조카들이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네, 헤헤헤.”

아이덴이 웃으며 메이린에게 책을 내밀었다. 메이린은 앉은 자리에서 머리핀을 이용해 어렵지 않게 자물쇠를 열었다. 이건 모두 경험의 산물이었다. 과거에 수없이 열어보았으니까.

메이린은 단언할 수 있었다.

저기 저 책은 세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책이라고.

“우와!”

“고모, 대단하세요!”

두 아이의 얼굴에 감탄이 어렸다.

“너희들, 그 책은 아버지랑 로레인 고모 몰래 숨어서 봐야 한다?”

메이린이 한쪽 눈을 찡긋하며 웃었다.

“네∼!”

두 아이는 동시에 대답하고 금세 방에서 뛰쳐나갔다. 분명 이 저택 어딘가에 있는 저들만의 비밀 장소로 가는 것이리라.

“호호호, 이니안. 나를 원망하지 마. 아이들 손에 일기가 들어가도록 방치한 네 잘못이야. 하긴, 자기도 잊고 있으니 애들이 찾은 거겠지. 그마나 다행이라면 저 귀염둥이들이 로레인 언니한테 가지고 가지 않은 것 정도랄까? 이니안 너, 나한테 감사해야 해. 최소한의 안전장치는 만들어뒀으니까 말야. 호호.”

기분 좋게 웃은 메이린은 덮어두었던 책을 다시 펼쳤다. 그리고 조용히 중단했던 독서를 계속했다.

대륙력 658년 5월 15일.

“이얍!”

챙챙!

“으헛”

“마지막입니다!”

난 힘차게 외치며 검을 뻗었다. 검은 어느새 내 앞에 서 있는 나의 대련 상대 라이오 아저씨의 목 옆에서 차가운 검날을 빛내고 있었다. 이번에도 나의 승리다.

“휴, 도련님. 정말 대단하시네요. 또 제가 졌습니다.”

아저씨의 말에 나는 씨익 웃어주었다.

“뭐, 운이 좋았죠. 그럼 전 이만.”

어디선가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나의 땀을 씻어준다. 대련으로 땀에 흠뻑 젖어 있을 때 불어오는 바람의 상쾌함이란 느껴보지 못한 사람은 절대 알 수 없다. 그리고 이 상쾌함이 내가 수련에 빠져들게 하는 이유 중 하나다.

내 이름은 이니안 케이 사이몬. 카일로니아 왕국의 4대 공작가 중 하나인 사이몬 공작가의 둘째아들이다. 올해로 내 나이는 열다섯. 형은 나보다 꼭 열 살이 많다.

그리고 형과 나 사이에 세 누나가 있다. 그 누나들에 대한 이야기는 차후에 기회가 닿으면 하도록 하고 우선 우리 가문에 대한 이야기부터.

우리 사이몬 가문은 카일로니아 왕국의 건국 공신가이다. 그리고 그 공을 인정받아 공작의 작위를 받았고, 벌써 300년째 유지해 오고 있다. 우리 가문의 초대 가주이신 진 사이몬 공작은 건국왕 폐하와는 둘도 없는 친구 사이였다고 한다.

대륙제일의 검술을 지닌 그분은 전장에서 활약하는 장군은 아니셨다. 건국왕 폐하의 친우였기에 항상 곁을 지키셨다고 한다.

진 사이몬 공작께서 건국왕 폐하의 목숨을 구한 수는 헤아릴 수가 없다고 한다. 그러니까 진 사이몬 공작께서 계시지 않았으면 건국왕 폐하는 카일로니아 왕국을 세우시기 전에 돌아가셨다는 거다.

그랬기에 카일로니아 왕국이 자리를 잡자마자 가장 먼저 공작의 작위를 우리 가문에 내리신 것이다.

현재 공작이신 아버지 라이데온 케이 사이몬 공작은 국왕의 경호를 담당하는 근위기사단의 단장으로 계시다.

왕국제일의 기사로 인정받는 나의 형 이슈데인 케이 사이몬 자작은 왕세자 전하의 경호를 담당하는 근위기사이다.

공작이 국왕의 경호기사라는 사실에 의문을 품을지도 모른다. 사실 이 라칼트 대륙의 어느 나라 공작이 경호기사를 하고 있겠는가? 설혹 그것이 제국의 황제를 경호하는 일일지라도 말이다.

이 일은 우리 가문의 시조이신 진 사이몬 공작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사실 그분의 과거에 대한 기록은 별로 남아 있지 않다. 건국왕 폐하와 함께한 이후부터 기록이 남아 있을 뿐.

하지만 그분은 소중한 사람을 지키는 것을 무척 중요하게 여겼다고 한다. 아니, 자신의 생명보다도 중하게 여기셨다고 한다.

진 사이몬 공작께서 돌아가시며 남기신 유언은 ‘사람을 지키기 위해 검을 사용하라’였다. 그리고 그분의 유언을 따르기 시작하면서 우리 가문의 기사에게 붙은 호칭이 있었으니 ‘가드 나이트’였다.

가드 나이트. 말 그대로 지킴이 기사다.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기사인 것이다. 그리고 모든 공작은 그 유언을 충실히 지켰다. 그래서 카일로니아 왕국 건국 이후 근위기사단의 역대 단장은 모두 우리 가문의 가주였다. 부단장 역시 우리 가문의 사람이었다.

아무리 근위기사단의 단장이라 하더라도 항상 국왕 폐하 옆을 지킬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기사단장 역시 사람이었고, 가족과 사생활이 있었다.

그래서 보통 단장과 부단장이 이교대로 국왕 폐하를 경호했는데, 국왕 폐하 바로 옆에서 폐하를 호위하는 두 사람 모두 우리 가문의 사람이었다.

이것은 아주 중대한 사실이다. 왕세자 경호 담당 책임자 역시 우리 가문 사람이고 보면 항상 왕과 함께하게 되는 셈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가문을 왕국제일의 권력가로 만들어놓았다. 뼛속까지 기사 가문인 우리 가문의 사람은 그런 권력에는 별로 신경을 안 쓰지만 말이다.

아무튼 그랬기에 단순히 경호기사 가문으로만 보일 수도 있는 우리 가문이 300년에 걸친 성세를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흠, 이 정도면 가문에 대한 소개는 대충 끝이 난 것인가?

흠흠, 그럼 본격적으로 내 소개를 해볼까?

나이와 이름은 앞에서 말했고, 앞서 말했지만 우리 가문은 기사 가문이다. 당연히 남아는 어릴 때부터 검을 배우고 모두들 실력이 대단하다.

공작 직계인 나도 어릴 때부터 검을 배웠고, 그 실력 또한 대단하다. 난 올해 초, 그러니까 열다섯이 되는 해에 드디어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접어들었다. 믿어지는가? 한 나라에 그 수가 다섯이면 많다고 하는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열다섯에 이루다니.

그렇다! 나는 천재인 것이다∼! 우하하하하!

우리 가문의 검술은 카일로니아 왕국뿐 아니라 대륙제일이다. 초대 가주이신 진 사이몬 공작께서 남기신 여러 가지 가전 검법 덕이다. 그랬기에 대륙에서 가장 많은 소드 마스터를 보유한 가문이기도 하다.

현재 나까지 모두 여섯의 소드 마스터가 우리 가문에 있다. 놀랍지 않은가? 게다가 아버지께서는 대륙에 단 셋밖에 없다는 그랜드 마스터이시다. 그리고 가까운 시일 안에 우리 가문에 또 다른 그랜드 마스터가 탄생할 예정이다.

“이니안∼!”

누군가가 나를 불렀다. 난 땀에 전 몸을 깔끔하게 씻고 개운함을 맛보기 위해 내 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나를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피곤한 기색의 형이 서 있었다. 우리 집안의 다음 대 가주이자 현재 카일로니아 왕국 최고의 기사 이슈데인 케이 사이몬.

“라이오 아저씨랑 대련했다며? 오랜만에 이 형과도 대련 좀 해보는 게 어때?”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던 형의 얼굴은 대련 이야기를 하면서 점점 밝아지더니 말이 끝났을 때쯤에는 활력이 넘쳐흘렀다.

“됐네. 일없어. 벌써 방에도 다 와가는데 다시 나가기 싫다고. 그리고 형도 이제 일 끝나고 돌아온 모양인데 그만 씻고 잠이라도 푹 자는 게 어때? 하루종일 왕세자 저하 경호한다고 피곤했을 텐데 말이야.”

나의 말에 형은 오른손 검지를 까닥거리면서 혀를 찼다.

“쯧쯧쯧, 기사의 길을 가는 녀석이 다시 연무장으로 나가는 걸 귀찮아하다니 자세가 안 됐어. 게다가 진정한 소드 마스터는 하루 정도 잠을 못 잤다고 해서 피곤해하거나 하지는 않지. 너, 나한테 질까봐 그러는 거지?”

눈을 가늘게 뜨며 나의 기분을 살포시 긁어주는 형의 말에 나의 표정이 험상궂게 변했다. 내 표정을 내가 볼 수는 없지만 지금 내 감정의 상태가 얼굴에 드러났다면 험상궂을 수밖에 없다.

“누.가. 형.한.테. 질.까.봐. 대.련.을. 피.한.다.는. 거.지?”

분노에 떨며 한 자 한 자 힘주어 끊어 형에게 물었다.

“그거야 당연히 너지. 뭐, 네가 나한테 이겨본 적이 있으려나∼”

능글맞은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내 속을 확실하게 긁으며 대답하는 형이다. 특히 마지막 말을 길게 빼며 확실히 내 자존심을 찢어놓았다.

내 손은 부들부들 떨렸고 피가 머리로 몰렸다. 얼굴이 점점 벌게지는 것 같았다. 분노가 발끝부터 머리 위로 서서히 차올랐고 머리꼭지까지 완벽하게 찼을 때 나는 나도 의식하지 못한 채 오른손을 검병으로 가져가고 있었다.

나도 알아차리지 못할 정도의 빠른 발검! 빛살이 되어 쏘아진 검은 어느새 형을 향해 날아가고 있었다.

챙!

어느새 빼든 검으로 형은 나의 검을 막았다. 맑게 울린 검명에 나의 머리는 빠른 속도로 싸늘히 식었다. 그리고 떠오른 생각.

‘당했다, 또!’

“훗, 느려. 이런 속도로 날아다니는 모기나 한 마리 잡을 수 있겠어?”

여유 있게 나의 검을 막은 형은 씨익 웃으며 한마디 던진 후 유유히 자기 방 쪽으로 사라져갔다.

“아∼! 이제 목욕하고 한숨 푹 자볼까?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지만 역시 밤을 샌다는 건 피곤해. 사람에게는 적절한 수면이 필요한 법이지. 암.”

사라지면서 한마디 남기는 것 또한 잊지 않는 형이었다.

항상 다음엔 절대 안 넘어간다고 생각하면서도 오늘도 당하고 말았다. 사실 경호라는 일은 무척이나 힘든 일이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위협에 대비해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어야 한다.

아무리 소드 마스터라도 24시간 내내 정신을 집중해 주위를 살피는 일은 분명 피로한 일이다. 스트레스 또한 장난이 아니다.

형은 그렇게 쌓인 스트레스를 항상 이런 식으로 푼다, 바로 나를 도발한 후 살짝 놀려주고는 사라지는 것으로. 그렇게 푼 형의 스트레스는 나에게 아주 성실히 차곡차곡 쌓였다.

사실 알고 보면 형이 나를 도발하는 말은 항상 정해져 있다. 하지만 나는 항상 그 말에 넘어간다, 다음엔 절대 안 당하겠다고 다짐하면서도.

내가 천재라는 말은 했던가? 뭐, 나를 고깝게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가 천재인 건 분명한 사실이고, 사실을 말하기에 나는 당당할 수 있다. 열다섯에 소드 마스터에 이른 검사가 천재가 아니라면 세상에 천재라는 것이 존재할까?

하.지.만. 이런 내가 천재라면 형이란 존재는 과연 뭘까? 열세 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형은. 그리고 현재 형은 소드 마스터 최상급이다.

내가 아까 말한 우리 가문에 나타날 또 한 명의 그랜드 마스터가 바로 형이다. 스물다섯에 최상급의 소드 마스터라니…….

대륙 어디에도 이런 빠른 성취를 보인 사람은 없었다. 우리나라에서만 하더라도 이미 아버지를 제외하고는 형을 상대할 수 있는 기사가 없었다.

그.런.데. 저 빌어먹을 형이라는 인간은 항상 투덜거린다. 12년이나 소드 마스터에 머물러 있다면서.

세상에는 죽을 때까지 검을 휘둘러도 소드 마스터는커녕 중급의 소드 익스퍼트도 되지 못하는 이가 부지기수다. 정말 형의 저런 태도는 그런 사람들을 두 번, 아니, 세 번 죽이는 짓이다.

내가 형의 도발에 쉽게 넘어가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바로 열등감. 항상 나를 형과 비교하기에 나 스스로 열등감에 빠지는 것이다.

주위에서 나를 형과 비교하는 이는 아무도 없다. 형이라는 존재 자체가 워낙 괴물 같은 천재이다 보니 세상 사람들은 아예 형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형은 아예 열외시켜 놓고 생각을 한다. 그게 정신 건강에 이롭다나?

그래서 내 주위의 사람들은 항상 나를 천재라 칭송한다. 부모님도, 가신들도, 우리 가문의 사이몬 기사단 사람들도. 하지만 난 항상 홀로 형과 나를 비교한다. 그리곤 열 받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욕실로 들어가서 욕조에 몸을 뉘였다. 땀이 범벅이 되도록 검을 휘두르고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근 채 즐기는 이 휴식. 어쩌면 나는 검을 수련하는 것보다 수련 후의 이 시간을 더 즐기는 것인지도 몰랐다. 아무튼 천국이라니까.

그렇게 즐거운 목욕을 마치고 깔끔한 옷으로 갈아입었다. 저기 벗어 놓은 땀에 전 옷들은 하인들이 알아서 세탁을 해 다시 가져다 놓을 거다. 창밖을 보니 어느새 하늘에 어둠이 깔리고 별들이 하나둘 빛나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도 이렇게 끝이 난 것이다.

이때쯤이면 나는 하늘을 그저 가만히 바라보곤 한다. 오늘 하루의 일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보는 것이다. 스스로에게 떳떳한 하루를 보냈는지, 오늘 하루 내가 정말 열심히 살았는지를.

이런 습관은 저절로 생긴 것은 아니다. 아버지의 엄격한 교육 아래 자라난 것이다. 아마 형도 방에서 나와 같이 이렇게 어두워오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오늘 하루 일을 다시 한 번 꼼꼼히 되돌아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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