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54화 (54/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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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이니안 오빠.’

로즈는 이니안의 웃음에서 깊고도 깊은 한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하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간혹 그가 보여주었던 한이 서린 얼굴.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웃음에 담겨 있었다.

“훗, 그렇다면 너는 사이몬 가의 검을 익히지 않았다는 거냐? 그 엄청난 위력의 검이 사이몬 가의 검이 아니라는 말이냐?”

로즈를 제외한 나머지의 시선이 이니안을 향했다. 그들은 카르세온의 물음에 대한 이니안의 대답에 주목했다. 사이몬 가의 검을 제외하고도 그런 위력의 검이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로즈는 달랐다.

로즈의 귀에 그런 말은 들리지 않았다. 로즈의 귀에는 조금 전 허공을 떠돌다 사라진 한 맺힌 웃음만이 메아리칠 뿐이었다. 로즈의 눈에는 쓸쓸한 이니안의 등만이 보일 뿐이었다.

“나는 나의 검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이니안은 여전히 분노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의 대답은 주위의 기사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자신의 검이라니?

그들이 아는 한 하나 이상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할 수 있는 검은 사이몬의 검밖에 없다. 그런데 이니안은 그런 검을 사용하고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 했다.

“믿을 수 없군. 더욱이 사이몬이라는 성을 가진 사람이 사이몬의 검이 아닌 자신의 검이라 하다니…….”

“믿든 말든 나와는 상관없는 일. 더 이상 나와 그 빌어먹을 가문을 연관 짓지 마라.”

이니안의 눈동자가 분노의 겁화로 타올랐다.

“그렇게까지 말한다면 어쩔 수 없군. 기사는 검으로 말하는 법이니.”

그 말을 하는 순간 카르세온의 눈에는 투지라는 이름의 불이 일렁이기 시작했다. 이니안은 카르세온의 눈에 맺힌 불꽃을 알아보았다. 그 역시 한때는 기사를 지망했기에.

“킥, 웃기는군. 그딴 기사 나부랭이가 무에 그리 대단하다고.”

기사를 지망했고, 기사의 한계에 절망했기에 이니안의 얼굴에는 냉소가 어렸다. 기사라는 허울에 목을 매는 그들을 보니 같잖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세상에는 기사라는 신분보다, 그 기사의 명예보다 소중한 것은 얼마든지 존재했다. 그리고 이니안은 가드 나이트라는 기사의 허울에 얽매여, 사이몬 가라는 멍에에 억눌려 소중한 것을 잃고 말았다.

“닥쳐라!”

“놈!!”

이니안의 말에 대한 반응은 즉각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그것은 정면의 카르세온 역시 마찬가지였다.

기사라는 것.

그것은 이 자리에 있는 하이 나이트들의 긍지요, 삶의 의미였다. 그런데 이니안은 그 모든 것을 싸잡아 비난했다. 삶의 의미에 상처를 입은 것이다.

아홉의 기사의 눈이 분노로 타올랐다.

“네놈은 그 말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카르세온은 분노에 찬 음성으로 천천히 말했다.

“결국은 싸우자는 것이겠지?”

이니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는다.

“잘 알고 있군. 검의 길을 걷는 자는 자신의 말을 검으로 증명해야 하는 법.”

“뭐, 그건 나도 동의해 주지.”

기사를 비난하지만, 가문을 증오하지만 이니안은 그래도 한 명의 검사였다. 그 역시 검의 길을 걷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데 여긴 좀 좁지 않을까?”

이니안이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분명 그랬다. 나무가 우거진 산속의 작은 길, 아니, 길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그저 나무 사이에 조금 공간이 넓은 곳이다.

그곳에 이니안과 로즈, 케라우가 있었고, 맞은편에 카르세온이 서 있었다. 그 외 기사들은 각자 나무 사이의 공간에 저마다 서 있었다.

“난 크게 상관없는데……. 아무래도 너 정도 되는 녀석과 싸우면 이 주위가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아서 말이야.”

그 말을 하면서 이니안의 시선이 로즈를 향했다. 그 눈에는 걱정의 빛이 담겨 있었다. 카르세온의 눈이 이니안의 시선을 따라갔다. 분명 그랬다. 이 자리에 있는 다른 인물들은 몰라도 포르시아라면 두 사람의 격돌의 여파를 견딜 수 없을 터.

“분명 그렇군. 좋아, 장소를 옮기도록 하지.”

카르세온이 동의하자 이니안의 눈이 케라우를 향했다. 그 뜻은 분명했다.

“쳇, 알았어. 알아봐 줄게.”

케라우는 곧 눈을 감았다. 그러고 얼마나 있었을까?

“따라와라.”

케라우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포위되다시피 한 상황. 급할 건 없었다. 지금은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싸우러 가는 것이니까.

이니안과 로즈가 그 뒤를 따랐고, 차례로 카르세온과 하이 나이트들이 뒤를 따랐다. 좁은 산길에 긴 행렬이 만들어졌다.

케라우는 익숙한 발걸음으로 나무 사이를 헤치며 걸었다. 그렇게 얼마간 걷자 서서히 나무들의 간격이 넓어졌다. 그리고 조금 후 사람들의 눈앞에 제법 널찍한 공터가 드러났다.

“신기하군. 마치 이곳의 길을 알고 있는 듯해.”

자신들의 길을 안내한 인물이 이곳에 처음 온 것이라는 것쯤은 카르세온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마치 알고 있다는 듯 찾아오다니 분명 신기한 일이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닐 텐데?”

이니안의 말에 카르세온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하긴 그렇지. 우리가 이곳에 온 목적을 잊으면 안 되지.”

카르세온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공터의 한가운데에 약 3미터의 간격을 두고 이니안과 카르세온이 마주 보고 섰다.

로즈는 케라우의 이끌림에 공터 가장자리로 갔다. 하이 나이트들은 그런 로즈와 케라우를 둘러쌌다.

스르릉!

맑은 소리를 내며 카르세온의 검이 뽑힌다. 멋들어진 하얀 나신을 자랑하며 카르세온의 검은 아침 햇살에 빛났다. 그의 위치를 말해주는 듯 검은 훌륭했다.

검의 손잡이인 검병(劍柄)부터 그 위의 손을 보호하는 호수(護手)까지 이어진 미려한 선과 정교한 세공 장식들, 그리고 그 위에 찬연히 빛나고 있는 백광(白光)의 검신.

명검이었다.

“좋은 검이군.”

이니안은 카르세온의 검을 보며 천천히 자신의 검을 뽑았다. 무기점에서 적당히 골라서 산 이니안의 평범한 검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제법 질이 좋아 보이지만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평범한 검이다.

“진정한 검사는 검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인가?”

곧추세워진 이니안의 검봉을 보며 카르세온이 말했다.

“아니, 난 가난한 용병이라서 좋은 검을 가질 여유가 없어.”

이니안은 싱긋 웃으며 대답했다.

“그런가?”

“물론.”

이니안은 짧게 대답하고 자신의 검을 바라보았다.

결코 좋은 검은 아니다. 그리고 자신이 얻은 지 오래되지도 않은 검이다. 하지만 어느새 이니안은 손에 들린 검에 정이 듬뿍 들었다. 그간 이 검으로 싸워온 횟수는 그가 사용했던 어떤 검보다도 많았다.

‘네놈도 주인 잘못 만나서 고생이 많다. 나도 지금까지 내가 가진 검에 이렇게 많은 피를 적실 줄은 몰랐으니까. 조금만 더 힘내라. 아마도 이 싸움이 마지막일 듯하니까.’

자신의 검을 바라보는 이니안의 눈에 애잔한 기운이 서렸다.

두 사람은 검을 곧추세운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런 두 사람을 로즈와 케라우, 그리고 하이 나이트들이 지켜보고 있다. 그들의 눈은 이미 긴장으로 물들어 있었다. 마치 그들이 당장 생사대적과 싸우는 듯했다.

바람 한 점 없다.

이제 막 산을 넘어 푸른 하늘에 올라선 태양이 겨울의 추위를 달래는 따스한 햇살을 내리 비출 뿐이다.

침묵이 감돈다.

고요가 내려앉았다.

시간이 멈춘 듯하다.

공간은 그렇게 굳어 있었다.

먼저 움직인 것은 카르세온이었다. 그는 천천히 발을 끌며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것이 멈추어진 시간을 움직이게 하는 시작이었다.

그 순간 이니안이 사라졌다.

마령보의 방위를 밟아 이니안은 순식간에 카르세온의 옆으로 이동했다. 그때 천천히 발을 끌던 카르세온의 몸이 맹렬히 회전했다. 자신의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오는 검에 유유히 자신의 검을 갖다 대었다. 허공에서 얽히는 검.

이니안은 검이 맞닿는 순간 자연스럽게 손목을 돌렸다. 그러자 이니안의 검이 영활한 뱀처럼 카르세온의 검을 감아올리며 그의 옆구리를 노리고 찔러 들어갔다.

카르세온은 가볍게 손목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티팅!

검신과 검신이 맞닿는 소리가 울리며 이니안의 검이 튕겨 나갔다. 하지만 이니안은 곧 몸을 반회전시키며 등에서부터 카르세온을 베어갔다. 카르세온은 곧 자신의 검을 움직여 이니안의 검을 향해 자신의 검을 아래에서 위로 올려쳤다.

두 검이 막 맞닿으려는 순간,

이니안의 몸이 사라졌다. 카르세온의 검은 빈 허공을 갈랐다. 아니, 허공을 가르는 듯했다. 하지만 이내 이니안이 사라졌음을 깨닫는 순간 카르세온의 검은 그 자리에 멈추었다.

그리고 곧 중단의 자리에 돌아왔다. 카르세온은 검의 출수와 회수가 그의 의지대로 자연스럽게 흘렀다.

그때 마령보의 수법으로 잠시 카르세온에게서 떨어졌던 이니안은 강력한 찌르기로 카르세온의 가슴 한가운데를 파고들었다.

그 움직임은 마령천참검법의 일초인 마령소혼이었다. 카르세온은 자신을 향해 찔러 들어오는 검의 위력을 느낀 듯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 순간,

카르세온의 검 주위의 공기가 일렁이기 시작했다. 곧 검에서 황금빛 기운이 일렁이기 시작하더니 곧 검날의 형태를 이루며 정형화되었다. 백광의 검신 위에 황금의 검신이 덧입혀졌다.

“오러 블레이드!”

그 모습에 마이어가 존경 어린 감탄을 토했다.

검의 길을 걷는 자의 꿈이라는 소드 마스터. 그리고 소드 마스터의 상징이라는 오러 블레이드. 그것이 지금 그들 앞에 현신해 있었다.

카르세온은 오러 블레이드를 형성하자마자 이니안의 찌르기에 맞부딪쳐 갔다.

콰앙!

힘과 힘의 격돌은 요란한 폭음을 만들어냈다. 폭발이 터지는 순간 일진 광풍이 몰아치며 바닥의 눈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사방에 흩날린 눈이 바닥에 가라앉을 즈음 두 사람의 모습은 그곳에 없었다.

“위다.”

케라우는 담담히 말했다. 그 말에 좌우를 살피던 로즈의 시선이 하늘로 향했다. 하이 나이트들 역시 케라우의 말을 듣고서야 공중을 쳐다보았다.

싸움 도중에 몸을 공중으로 띄우는 것은 누구나 아는 금기다. 그랬기에 하이 나이트들은 공중을 살필 생각을 하지 못한 것이다. 지금 이 싸움을 지켜보는 이들 중 카르세온과 이니안의 동작 하나하나를 모두 꿰뚫어 보고 있는 이는 케라우가 유일했다.

챙채채채챙!

이니안의 마나를 머금은 검과 카르세온의 오러 블레이드가 허공에서 수차례 격돌했다.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무엇이든 베어버린다는 오러 블레이드였지만 이니안의 검은 멀쩡했다.

이니안의 마나를 통해 검의 강도가 어느 정도 상승한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이니안의 검을 놀리는 기교가 자신의 검을 지키고 있었다.

일반적인 검은 검날에만 절단력이 있고 검면은 그저 보통의 금속면일 뿐이다. 오러 블레이드는 그런 검신에 오러를 덧입혀 마나로 이루어진 하나의 검을 만드는 것. 오러 블레이드 역시 검날과 검면이 존재했다.

이니안은 카르세온의 공격을 검면을 치면서 막고 있었다. 아무리 오러 블레이드라도 검면에는 절단력이 없었다. 하지만 오러였기에 그 강도는 어마어마했다.

이니안이 마나를 검에 불어넣어 강도를 늘리고 있다지만 오러 블레이드와의 격돌에 의한 피로는 이니안의 검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사람은 새가 아니다.

그것은 소드 마스터라도 마찬가지다.

이니안과 카르세온은 잠시 후 바닥에 착지했다. 바닥에 착지할 때까지 검을 섞던 두 사람은 바닥에 떨어지는 충격을 도약력으로 바꿔 서로를 향해 돌진했다.

챙!

검과 검이 정면으로 부딪치며 울리는 소리.

이니안은 카르세온의 오러 블레이드의 검면에 자신의 검면을 대고 있었다. 서로 교착된 검.

두 사람은 서로의 검에 가진 바 모든 힘을 불어넣었다.

땅을 딛고 있는 양발에 힘이 들어갔다. 두 사람의 발이 눈 속으로 파묻혔다. 눈 아래의 얼어붙은 땅에 깊은 발자국이 찍혔다.

“타핫!”

이니안의 입에서 기합성이 터져 나왔다. 그와 함께 이니안은 힘껏 자신의 검을 밀었다. 그때 카르세온 역시 자신의 검을 힘껏 밀었다. 그 반발력으로 두 사람은 사선 방향으로 3미터 정도 간격을 벌렸다.

“헉헉헉! 대단하군.”

“후후, 그쪽이야말로.”

이니안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호흡 역시 거칠어져 있었다. 반면 카르세온은 여전히 고른 호흡을 하고 있었고, 얼굴에 여유가 넘쳤다.

분명 일방적으로 공격하며 몰아친 것은 이니안이었지만 더욱 지친 것도 이니안이었다.

‘소드 마스터와 소드 익스퍼트의 차이란 말이지.’

케라우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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