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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태양 빛에 눈이 부셨음인가. 로즈는 고개를 살짝 숙였다.
“어찌하시겠습니까?”
“내가 하라는 대로 할 건가요?”
“저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기꺼이.”
카르세온은 공손히 대답했다.
“그러면 돌아가요. 난 아직 이 현실을 받아들이지를 못하겠어요. 현실을 받아들일 자신이 생기면 스스로 미오나인의 칸세르 공작가를 찾겠어요.”
로즈는 당당한 모습으로 카르세온에게 명을 내렸다. 그런 그녀의 모습은 한 치의 틀림도 없는 공작가의 영애였다.
명령이란 아무나 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길가에서 장사를 하는 노점상의 주인에게 무한의 명령권을 준다고 그가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오히려 갑작스러운 상황에 그 명령권을 버릴 것이다.
명령이란 것은 내려 본 사람만이 내릴 수 있다. 남의 위에 서 본 자만이 아랫사람을 부릴 수 있다. 아래에서 남의 명령을 받는 것에만 익숙해진 이들은 오히려 자신이 명령을 내리게 되는 것을 두려워한다. 그들은 자신의 현실에 안주하려 하는 것이다.
지금 카르세온에게 명령을 내리는 로즈의 모습은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그리고 너무나 어울렸다.
‘저 모습만 보더라도 확실히 공작가의 사람이 맞군.’
이니안 역시 공작가의 자식이다. 귀족과 평민을 분간하는 눈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그 명령만은 따를 수 없습니다.”
카르세온은 흔들림 없이 똑똑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왜죠? 내가 하는 말을 듣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저희가 가능한 한에서입니다. 저희가 공작 각하께 받은 명령은 공녀님을 공작가로 모시고 오란 것입니다. 그 명령에 어긋나기에 공녀님의 명을 받들 수 없습니다.”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난 카르세온의 모습은 당당했다. 과연 제국의 젊은 검이라는 소드 마스터다웠다.
“나는 당신들과 함께 돌아갈 생각이 없어요.”
로즈는 카르세온의 대답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가 설혹 미오나인으로 간다고 해도 그것은 이니안 오빠와 함께예요.”
어느새 이니안의 곁으로 다가간 로즈는 이니안의 팔을 꼭 붙들었다. 그 모습에 하이 나이트들의 눈에 불똥이 튀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신분도 모르는 하찮은 용병에게 공녀님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는 저희의 동료를 죽인 적입니다.”
카르세온은 차가운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보며 대답했다. 이니안은 카르세온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파직!
두 사람의 시선이 얽히자 다시 한 번 허공에 불꽃이 튀었다.
그 둘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알 수 있었다. 평생을 부딪칠 숙적.
그것은 숙명이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나는 순간부터 그 숙명을 느꼈다.
“당신들에게는 하찮게 보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소중한 사람입니다. 그런 언행은 자제해 주세요.”
로즈.
그녀는 과거의 기억을 아직 찾지 못했는지는 몰라도 과거의 위엄은 찾은 듯했다. 지금 그녀의 모습은 처음 모포에서 눈을 뜰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알겠습니다.”
카르세온은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당신들의 동료를 죽인 일도 잊어주세요. 나를 지키기 위해 비롯된 일이니까요.”
고개를 숙인 카르세온의 몸이 미미하게 떨렸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작은, 그러나 단호한 대답이 카르세온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르트의 무덤에 기사의 명예를 걸고 맹세했습니다. 반드시 원수를 갚겠다고요.”
그 말에는 은은한 살기마저 어려 있었다. 카르세온의 대답을 들은 하이 나이트들의 눈이 서서히 불타올랐다.
‘부단장, 당신은 영원히 나의 대장이오.’
‘죽을 때까지 평생 대장을 따를 겁니다.’
각자 자신의 가슴에 저마다의 생각을 품었다. 포르시아 공녀의 명이라면 당연히 복수를 포기해야 했다. 그들이 충성을 맹세한 주인의 명이기에.
그들은 칸세르 공작가의 기사. 기사의 명예에 우선하는 것이 주인에의 충성이다.
주인의 명이니 따라야 하지만 카르세온은 부하의 원수를 그보다 앞세웠다.
“후우, 알았어요. 그렇다면 어쩔 수 없죠.”
로즈가 선선히 물러나자 카르세온의 눈에 이채가 서렸다. 일반적인 귀족이라면 충성을 맹세한 주인의 명을 거부한다고 화를 냈을 것이다.
그녀는 기사의 명예에 대해서만 알고 주인의 권리와 기사의 의무에 대해서는 모르는 듯했다.
‘역시 기억이 없으시단 말인가…….’
처음에는 포르시아가 연기를 한다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지금의 행동으로 보아서는 확실히 기억을 잃은 모양이었다.
조금 전의 행동은 포르시아의 기억에 대한 카르세온 나름의 시험이었다. 그녀가 제대로 된 기억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 자신의 말을 그냥 넘기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말은 주인의 권위에 대한 거부였기에.
물론 자신은 완전한 칸세르 공작가의 기사는 아니다. 하지만 오랜 세월을 거쳐 오는 동안 거의 그런 상태로 되어 있었다.
카르세온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포르시아가 기억을 잃었는지.
포르시아를 열 살 때부터 지켜봐 온 카르세온이다. 절대 포르시아를 다른 사람과 착각할 리 없다. 결국은 포르시아가 현재 기억을 잃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포르시아가 그런 일을 당할 이유가 없었다.
혼란스러웠다.
지금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버님, 정녕 칸세르 공작 각하를 따라야 합니까?’
카르세온은 얼마 전에도 그 일로 아버지와 크게 다투었다. 그의 눈에 비친 칸세르 공작은 기사도를 벗어난 인물이다.
선대의 인연에 카르세온 백작가가 칸세르 공작가의 가신으로 있을 뿐, 그들의 작위는 제국의 황제로부터 받은 것이다. 가신 집안에서는 특이한 경우였다.
보통 고위 귀족은 자신들이 작위를 내린 가신을 둘 수 있었다. 공작은 백작의 작위까지 개인의 권한 내에서 수여가 가능했고, 후작은 자작까지, 백작은 남작까지 가능했다.
고위 귀족 집안의 가신들은 보통 자신들이 주인으로 섬기는 주인에게서 작위를 받는다. 하지만 카르세온 백작가는 달랐다. 그들은 제국의 황제에게 작위를 수여받았다.
그리고 칸세르 공작가의 가신으로 들어간 것이다. 선대에 어떤 인연이 있었는지 카르세온은 알지 못했다. 아니,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는 현재의 칸세르 공작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에. 그는 뼛속까지 기사인 인물이기에.
자신의 딸이 기억을 잃고 사라졌다.
하지만 그는 기억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카르세온 자신에게 명령을 내릴 때 단지 조금 놀랄 일이 있을지도 모르나 무시하라고만 하였다.
기억을 잃은 것이 조금 놀랄 일일까? 그런 명령을 내린 것만 보아도 공작은 현재 자신의 딸의 상태를 알고 있다. 한데 그런 명령이라니…….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까지 자신과 믿음으로 가득하던 카르세온의 눈이 흔들렸다. 현재 마음속에 혼란이 찾아왔다는 증거다.
“확실히 말하죠. 당신이 진실을 말하고 있다지만 난 아직 나의 과거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지 않았어요. 내 머릿속의 과거는 여전히 백지 상태이기에. 그러니 당신들을 따라갈 수 없어요.”
또랑또랑한 로즈의 목소리가 카르세온의 귀에 들렸다. 그 목소리 덕에 카르세온은 혼란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훗, 그 목소리는 여전하시군요. 역시 당신은 당신입니다.’
누구도 모른다.
카르세온이 칸세르 공작을 따라야 하는가 하고 번민을 하면서도 칸세르 공작의 충실한 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그 이유는 포르시아다.
포르시아를 처음 본 것은 정확히 8년 전 그녀가 열 살 때이다. 그때부터 그는 그녀의 기사로 그녀의 곁을 지켰다. 당시 열아홉으로 성년식을 일 년 전에 치른 카르세온의 입장에서는 애를 보는 보모나 다름없었다.
포르시아는 그 미모와는 달리 활발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덕분에 카르세온, 아니, 페르마타의 고생은 말이 아니었다.
“이니안 오빠, 그만 가요.”
잠시 과거를 떠올리던 순간 로즈가 이니안의 팔을 잡아끌며 몸을 돌렸다. 더는 볼일이 없다는 태도다.
그녀의 행동보다 그녀의 말이 카르세온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의 눈은 분노로 타올랐다.
‘페르마타 오빠!’
조금 전 들린 그 맑은 목소리로 포르시아는 항상 자신을 불렀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성가신 목소리였다.
자신은 더 높은 경지의 기사가 되기 위해 수련으로 바쁜 놈이다. 그런데 열 살짜리 꼬마 여자 애와 놀아줘야 했으니 그 심정이 오죽했는가.
하지만 그 감정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달라졌다.
흐르는 물과 같은 세월은 꼬마를 소녀로, 그리고 여인으로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페르마타 카르세온은 그 여인을 사랑했다. 그랬기에 칸세르 공작가에 남아 있었다.
포르시아가 1황자의 약혼녀가 된 일은 그로서는 어찌할 수 없었다. 1황자는 곧 제국의 황제가 되어 자신의 주인이 될 사람이다. 단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단지 그냥 1황자라면 타국으로 도망칠 생각까지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국의 1황자는 그에게 있어 그냥 단순히 황자가 아니었다. 그랬기에 사랑을 가슴 한켠에 묻어둔 채 현실을 받아들였다.
대신에 한 가지 맹세를 했다. 평생을 포르시아의 기사로서 보내겠다고.
그런데 사라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눈앞에 나타났다.
하늘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카르세온은 온몸이 떨렸다.
가슴에서 인 불꽃은 그 열기를 더해갔다.
“멈추십시오.”
카르세온이 낮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온몸을 에는 지독한 살기가 어려 있었다. 로즈에게 말을 했지만 살기는 이니안을 향했다.
그의 말에 이니안이 걸음을 멈추었다. 로즈가 계속 앞으로 나아가자 했지만 이니안은 요지부동이었다.
그 순간 사방으로 몸을 날린 하이 나이트들이 이니안과 로즈, 케라우를 둘러쌌다.
“더 이상 가지 못하십니다. 가시려면 저를 쓰러뜨리셔야 할 겁니다.”
카르세온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16장. 나의 검에는 눈이 없다
“후우, 정녕 그래야 하나요?”
로즈는 고개를 돌려 잔잔한 눈으로 카르세온을 보았다. 카르세온의 눈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이제는 내가 나서야 할 차례인가?”
이니안이 로즈의 손을 살짝 떼어내며 몸을 돌렸다.
다시 이니안과 카르세온이 마주했다.
이니안의 등을 바라보는 로즈의 두 눈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그녀는 지금 이니안의 몸이 평소와 같은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알고 있는지는 모른다. 굳이 말하라고 하면 여자의 감이라고 할까.
“훗, 이니안 케이 사이몬.”
카르세온은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그의 말에 이니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맞지? 대륙 최강의 검의 가문, 사이몬 공작가의 사라진 막내.”
“웃기는군. 그따위 가문을 대단하다고 하는 거나, 나를 그딴 가문과 연관 짓는 것이나.”
이니안은 씹어뱉듯 말했다. 그의 음성에는 분노가 가득했다. 그 분노는 카르세온을 향한 것이 아니라 가문을 향한 것이다. 하지만 이니안의 그런 반응은 자신의 신분에 대한 시인과 같았다.
“푸하, 푸하하하! 놀랍군! 정말일 줄이야! 정말 사이몬 가문의 사람일 줄이야!”
카르세온은 광소를 터뜨렸다. 그의 눈에는 묘한 흥분과 기대가 어려 있었다.
이니안을 둘러싼 하이 나이트들의 얼굴에는 놀람과 경외가 함께했다. 그들은 대륙의 전설, 검의 신화라 불리는 사이몬 공작가의 인간을 마주하고 있는 것이다. 검의 길을 걷는 기사로서 경외가 생기지 않을 리 없었다.
로즈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이니안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케라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둘 역시 사이몬 가의 명성을 알고 있었다. 로즈는 과거의 기억을 잃었지만 사이몬 공작가에 대한 것은 알고 있었다.
“히야, 괴물 얼음탱이가 괴물인 이유가 있었군. 그 끔찍한 가문의 녀석이었다니.”
케라우는 정말로 진심을 담아 말했다. 사이몬 가와 연관이 된 과거가 있는 듯 그는 몸을 살짝 떨기까지 했다.
“어디, 그 대단하다는 사이몬 가의 검을 좀 구경할 수 있을까?”
“그따위 빌어먹을 가문의 검 따위 볼 것도 없거니와 난 그런 쓰레기 같은 검, 알지도 못한다.”
이니안은 여전히 분노가 내재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하군. 이 대륙에서 사이몬 가의 검을 쓰레기라고 말하다니. 난 꿈에서조차 그런 인간이 존재할 거라 생각하지 못했다.”
카르세온은 어이가 없다는 듯 이니안을 쳐다보았다. 비단 그런 표정을 지은 것은 그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동일한 표정으로 이니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킥킥킥, 그딴 빌어먹을 가문의 검 따위보다는 쓰레기가 나아.”
한이 맺힌 웃음소리. 과연 어떤 한이 서린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