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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
“이니안, 검을 이리 다오.”
아버지의 말에 이니안은 공손히 두 손으로 아버지에게 검을 건넸다.
“이 검은 당분간 내가 보관하고 있으마.”
그 말에 이니안의 얼굴이 급변했다. 마치 지금 당장 죽으라는 말을 들은 사람 같았다.
“이니안, 나 역시 검을 사랑하는 기사이기에 지금 네 심정이 어떨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네가 검을 수련하는 일에만 몰두한 나머지 남들은 열두 살에 다 익히는 것을 아직도 익히지 못하였으니. 이 검은 네가 왕립학교에 입학하는 날 돌려주도록 하마. 그때까지는 공부에만 전념하도록 해라.”
이니안이 받은 충격을 잘 아는지 아버지는 다시 인자한 얼굴로 천천히 말했다. 하지만 이니안의 표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그 얼굴에 떠올라 있는 것은 절망과 허탈함이었다.
“그리고 네 공부는 누나들이 도와줄 게다. 가정교사에게서 배우는 것도 좋겠지만 아무래도 빨리 배우려면 역시 네 누나들이 낫지 싶구나. 그렇게 알고 내일부터는 열심히 공부하도록 해라.”
아들의 표정과는 상관없이 아버지가 말을 이었다.
그때 숙여져 있던 이니안의 얼굴이 번쩍 들렸다. 허탈함이 있던 자리에 경악이라는 녀석이 들어와 있었다. 게다가 이미 얼굴에 자리하던 절망은 더욱 깊은 절망으로 바뀌었다.
“이니안, 내일부터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로레인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그녀의 말이 결정타였는지 이니안은 힘없이 고개를 떨궜다. 그 모습에 이슈데인은 소리 없이 웃었다.
***
어깨가 흔들린다.
“이만 일어나.”
그때 귀를 간질이는 목소리. 무거운 눈꺼풀을 조금씩 움직인다. 서서히 세상이 뿌옇게 보이기 시작한다.
눈을 깜빡인다. 이제야 눈에 초점이 잡힌다. 눈앞에는 자신을 내려다보는 이니안이 있었다. 그 뒤에 케라우가 불만에 가득한 눈빛을 하고는 서 있었다.
“두 시간 지났다.”
이니안이 예의 그 무뚝뚝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랬다. 자신은 이니안의 품에서 흐느껴 울다가 잠이 들었다. 그때 분명 이니안이 두 시간 있다가 깨울 테니 편히 쉬라고 했다. 그 말에 로즈는 이니안의 품 안에서 잠이 들었다. 세상에서 가장 폭신한 침대에서 자는 기분을 느끼며.
“어머.”
그때의 생각을 떠올리자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죄송해요.”
고개를 숙이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어나면서 보니 자신의 몸에 모포가 덮여 있었다. 이니안의 배려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그건 뭐였지? 꿈이었나?’
로즈는 자신의 자리를 정리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버지에게 검을 건네던 소년의 그 처량한 얼굴.
‘그러고 보니 그 아이의 이름도 이니안이라고…….’
로즈의 시선이 이니안의 얼굴을 향했다. 똑같았다. 그 귀여운 소년이 자라면 분명 저런 얼굴이 되리라. 다만 지금의 이니안의 얼굴은 차갑기 이를 데 없었다.
‘내가 왜 그런 꿈을 꾸었을까?’
로즈의 생각에 그건 이니안의 어린 시절이 분명했다. 자신이 알지 못하는 이니안의 생활. 그것이 어떻게 그녀의 꿈속에 나타났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꾸었을 뿐.
‘으음, 이니안 오빠, 어렸을 때는 무척 귀여웠구나? 하긴 뭐, 지금도……. 그래도 어렸을 때는 얼굴이 참 따뜻했는데.’
꿈속에서의 이니안의 얼굴을 다시 한 번 떠올린 로즈는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이니안 역시 그런 로즈의 변화를 알아보았다. 하지만 영문을 몰랐기에 그저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진짜 지금 이동해야 해? 아직 밤이야.”
케라우가 이니안을 향해 투덜거렸다.
“곧 날이 밝는다.”
그랬다. 지난밤은 무척이나 짧았다. 다크 크리스의 어새신의 치열한 공격에 긴장 속에서 시간이 금방 흘러버린 것이다.
“게다가 넌 그사이 새로이 영양 보충을 하지 않았나?”
이니안의 말에 케라우는 찔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이니안의 검에 잘려 튀어 오르는 피 냄새에 이끌려 잠시 이성을 잃었다.
“분명 그렇긴 하지만… 그것과 이건 다르단 말이야.”
“난 그런 건 모른다. 내가 아는 건 네놈이 한 명의 사람 피를 빨았다는 것뿐이야.”
그 말을 할 때 이니안은 미약하나마 살기를 띠었다. 그도 결국 인간이었기에 뱀파이어가 사람의 피를 빠는 것에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웃기는군.”
이니안의 살기에 반응한 것일까? 케라우의 얼굴에도 살기가 어렸다.
“네놈, 지난번에 식당을 벗어나면서 뭐라고 했지. 응? 살기 위해서는 죽여야 한다지 않았나?”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의 눈썹이 솟아올랐다.
“난 분명 똑똑히 들었다, 네가 그렇게 말하며 로즈 양을 차갑게 몰아붙이는 것을.”
이니안의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로즈는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어쩔 줄을 모른 채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면서 바라보았다.
“나야말로 살기 위해 피를 빤 것이다. 나도 살기 위해서야. 왜 네놈이 살기 위해서 같은 동족인 인간을 죽이는 것은 되고 다른 종족인 뱀파이어가 살기 위해 인간을 죽이는 것은 안 되지? 네놈들이 소나 돼지를 죽여서 먹는 것과 뭐가 다른데? 이제는 병신 뱀파이어지만 어쨌든 뱀파이어인 이상 흡혈은 해야 한다. 그런데도 나도 겨우 생명을 유지할 정도로 최대한 흡혈을 억제하고 있어. 일단 인간과 같이 다니니까 최대한 참고 있다고.”
“굳이 인간일 필요는 없다.”
이니안의 눈이 스산하게 빛났다.
“그래, 굳이 인간일 필요는 없지. 하지만 말이야, 내가 네놈과 만난 후 한 흡혈의 양을 알고 있나? 겨우 토끼 한 마리다, 토끼 한 마리. 인간이 며칠간 토끼 한 마리만 먹고 견딜 수 있을 거라 생각해? 나도 마찬가지다. 나는 인간으로 치면 며칠을 굶고 있는 것과 다름없어. 그런 내 앞에서 인간의 피를 그렇게 뿌린 건 너라고. 뱀파이어에게 있어 인간의 피는 최고의 식사. 너는 며칠을 굶은 거지 앞에 진수성찬을 차려놨단 말이다. 지금 그걸 나보고 참았어야 한다고 말한 거냐? 게다가 그놈은 적이었다. 로즈 양을 죽이려고 하던. 난 그런 적을 막아서 네놈이 지키지 못할 뻔한 로즈 양을 지켜주기까지 했어. 그러면 그 정도는 상관없는 것 아니냐?”
이니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케라우가 이니안의 상처를 건드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어새신과의 싸움이 끝난 후 이니안은 로즈를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고 있었다. 지켜주겠다고 약속을 하고서 그 약속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고 자책하던 이니안. 그의 상처를 케라우가 그대로 후벼 판 것이다.
“뭐라고 했지?”
이니안의 몸에서 피어오르던 살기가 점점 더 짙어졌다. 눈빛만으로도 사람을 죽일 수 있을 것만 같은 숨 막히는 살기.
“네놈이 놓친 놈을 내가 처리해 주었는데 그 녀석 피를 좀 빤 것이 그렇게 잘못이냐고 했다.”
케라우도 살기를 피웠다.
지금까지 한발 물러서던 것과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그동안 참고 참아왔던 것이 결국은 터진 것이다. 아쉬운 것은 자신이었기에 어지간한 도발과 같은 것은 그냥 참았다. 특유의 능글맞은 성격으로 그럭저럭 지내왔다. 그러던 것이 지금 터진 것이다. 케라우 역시 생명체다. 인간 역시 생명체다.
살기 위해 피를 빨았을 뿐이다. 그런데 이니안은 그것을 간섭해 왔다. 자신보고 죽으라는 이야기다.
자기 자신은 살기 위해서라며 동족을 무자비하게 베어 넘기면서 뱀파이어인 자신이 살기 위해 그깟 인간 한 명의 피를 빤 것을 가지고 그러다니…….
결국 그가 가진 인내의 끈도 끊어졌다.
두 사람의 살기가 허공에서 부딪쳤다. 넘실거리던 기운은 서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해 상대의 영역을 눌러간다. 팽팽한 긴장이 허공에 어우러진다.
사위가 고요하게 가라앉았다. 두 사람이 내뿜는 살기에 하늘조차 침묵했다.
서서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저…….”
팽팽한 긴장을 파고드는 가녀린 목소리.
“우리 이제 그만 떠나야 하는 것 아닌가요? 지금 쫓기고 있잖아요.”
가슴 앞에 두 손을 그러쥔 로즈가 조심스레 말했다.
먼저 살기를 거둔 것은 이니안이다. 지금 자신이 할 일은 눈앞의 뱀파이어와 드잡이질을 하는 것이 아니다. 로즈를 지키는 것이다. 잠시 그 사실을 잊고 있었다. 아마도 과거의 버릇이 나온 모양이다.
이니안 자신이 기사였다면 자신의 명예를 건드린 눈앞의 뱀파이어를 절대 가만두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자신은 기사도 무엇도 아닌 그저 용병 나부랭이일 뿐이다.
용병이라면 의뢰를 최우선시해야 한다. 그것이 용병의 명예다.
“그만 하지.”
이니안이 몸을 돌려 걸음을 옮겼다. 지금 이 시각에도 카르세온은 더욱 추격의 고삐를 조여오고 있을 것이다.
게다가 자신은 시간을 너무 많이 소비했다. 이미 카르세온이 지척에 있을지도 모른다. 또한 어새신들과 싸우면서 너무 많은 흔적을 남겼다. 서둘러야 한다.
“로즈 양, 간밤에는 죄송했습니다. 아름답고 청초하며 가녀린 레이디께 흉측한 모습을 보이고 말았군요.”
케라우는 이미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언제 그렇게 흉흉한 살기를 뿌려냈냐는 듯 로즈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정중하게 말했다.
“에… 예. 그만 가는 것이 어떨까요?”
로즈는 얼떨떨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녀의 대답에 케라우가 활짝 웃으며 일어났다.
“그럼 가시죠. 제가 모시겠습니다.”
케라우가 한쪽으로 비켜서며 자연스럽게 팔을 앞으로 뻗었다.
“예.”
로즈는 여전히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아, 어젯밤에는 감사했어요.”
어찌 되었든 케라우가 그녀를 죽이려는 어새신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준 것은 사실이다. 케라우가 피를 빠는 모습에 놀라 그만 로즈는 여태 감사의 인사조차 하지 못했다. 거기에 생각이 미쳤기에 로즈는 작은 소리로 감사의 인사를 전한 것이다.
“별말씀을. 귀족으로서 레이디를 지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케라우는 익숙한 모습으로 허리를 숙이며 로즈의 감사에 답했다. 조금 전 이니안과 살기를 뿌려대며 대치하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정말이지, 놀랄 만큼 빠른 변화다.
“쓸데없는 장난칠 시간 없다.”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의 무심한 말이 들려왔다. 그 말에 케라우의 얼굴이 일그러졌지만 무어라 대꾸하지는 않았다. 어쨌든 곁에 로즈가 있었으니까.
‘뿌드득, 네놈들! 절대 용서하지 않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눈동자가 있었다.
미르.
그녀였다. 전날 밤 발론이 당하는 순간 황급히 몸을 피했지만 다시 돌아왔다. 이니안의 감각에 아슬아슬하게 걸리지 않을 거리에 은신한 상태다.
발론이 죽고 없기에 이니안들의 모습을 자세히 살필 수는 없지만 대강의 모습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이면 충분했다. 미르는 조용히 그들의 뒤를 따랐다.
“서두르자.”
앞서 조금 걸음을 옮기던 이니안이 몸을 돌려 로즈의 앞으로 다가왔다. 로즈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이니안의 등에 업힌다고 생각하니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붉어졌다.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는데 이제는 생각만으로도 얼굴에 반응이 생겼다.
그때 이미 이미안은 로즈에게 등을 내밀고 있었기에 그녀의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로즈를 등에 업자 이니안은 빠르게 다리를 놀렸다. 아마 오늘 하루는 이렇게 전력으로 달려야 할 것이다. 그의 직감이 말해주고 있었다. 카르세온 일당이 이미 하루 이내의 거리까지 자신들을 추격해 왔다고.
이니안의 가슴 한구석에 초조함이라는 녀석이 자리했다.
‘빌어먹을 녀석, 오늘도 하루 종일 달릴 모양이군.’
케라우는 앞서 가는 이니안의 등에서 오늘 하루도 죽도록 달려야 한다는 것을 직감했다. 하지만 전날의 흡혈 덕일까? 한결 몸이 가벼웠다.
***
어느덧 오후에 이르렀는지 나무의 그림자가 제법 길어져 있었다.
이니안이 크리스 길드의 어새신과 격렬한 전투를 벌였던 곳에 카르세온과 하이 나이트들이 도착했다.
“이것 보십시오.”
마이어가 단검을 하나 들고 왔다.
검신에 새겨진 물결 모양의 무늬와 정교하고도 아름다운 장식들.
“크리스로군.”
“네.”
카르세온은 한눈에 그 단검이 크리스임을 알아보았다.
“그렇다면 다크 크리스의 녀석들이 나선 것이 확실하군. 이 크리스를 사용하는 어새신은 그 녀석들뿐이니.”
“네.”
“크리스만 남아 있었나?”
크리스가 이곳에 떨어져 있다는 것은 이곳에서 다크 크리스의 어새신이 목표를 습격해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암습에 성공한 어새신들이 자신들의 독문 병기를 현장에 남겨둘 리 없었다.
“시신이 네 구 있습니다.”
“가자.”
카르세온의 말에 마이어가 앞장섰다. 카르세온이 마이어의 뒤를 따라 도착한 곳에는 아름드리나무 아래에 시신이 널브러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