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44화 (44/175)

=======================================

[44]

***

아직 죽지 않은 불씨가 곳곳에 남아 있다. 여기저기서 연기가 매캐한 냄새와 함께 피어오르고 있다. 하늘에서 운석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거대하게 파인 구덩이. 강력한 힘에 부수어진 흔적들.

뿌리째 뽑힌 나무, 허리가 부러진 나무, 격렬하게 파인 땅, 꺼멓게 그슬린 나무. 그 모든 것들이 이곳에서 있었던 일을 보여주고 있었다.

참혹한 상처와 함께 여기저기 가득한 시체들. 어떤 것은 강렬한 화기에 타 형체도 알아볼 수 없는 것들도 있었고, 강렬한 힘에 갈가리 찢겨진 것도 있었다.

“대단하군. 휴우.”

마이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흔적을 찾고 찾아 쫓아온 곳에 이런 참상이라니…….

“이건 분명 피어스 브레이크겠군요.”

하론의 말에 카르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의 참상을 만들어내는 힘은 피어스 브레이크 외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하지만 대단한 위력이다, 나도 이런 위력을 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을 정도로.”

카르세온의 말에 놀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피어스 브레이크의 위력이 그 사람의 강함으로 직결되는 것은 아니었다. 피어스 브레이크는 강력한 힘을 낼 수 있는 한 방에 불과하다. 그것도 쓰는 사람에 따라 천양지차의 위력을 보이는 것이다. 하이 나이트들은 카르세온의 실력을 믿었다.

“그나저나 위험해.”

“예?”

마이어가 알 수 없는 듯 되물었다.

“분명 위험합니다.”

카르세온의 말에 하론까지 동조하고 나서자 마이어는 더욱 혼란에 빠져들었다.

“이 복장은 분명 어새신입니다. 그것도 지금까지 지나오면서 본 시체의 수는 천이 넘어서는 어마어마한 규모입니다.”

“그래, 어지간한 어새신 길드 두세 곳은 합한 숫자지.”

“설마?”

두 사람의 대화에서 마이어도 무언가를 느낀 듯했다.

“그래, 어새신의 목표가 그분일 수도 있다는 거다.”

하론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말도 안 되는… 그분이 어떤 분인데……. 이런 찢어 죽일 놈들을.”

마이어는 진심으로 분노하고 있었다.

“어쨌든 그런 상황이다. 그분을 지키려면 더욱 빨리 쫓아야 할 것 같다. 이니안이라는 용병, 생각보다 실력이 더욱 뛰어난 듯하지만 그래 봤자 결국 한 개인일 뿐이다. 이 흔적은 단체가 움직인 것. 그 혼자서 어찌할 수 없어. 곧 한계가 올 것이다.”

카르세온의 말에 하이 나이트들의 얼굴이 긴장으로 물들었다.

“최악의 사태만은 피했으면 하는군요.”

하론이 어두운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르세온의 의문에 찬 시선이 그를 향했다.

“이 정도 규모의 어새신을 동원한 녀석이 있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그들을 움직이지 못할 리 없죠.”

“다크 크리스 말인가?”

하론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의 부단장이라면 그 이름을 꺼내는 순간 이미 모든 사실을 예상할 수 있을 테니까.

“그 정도 녀석들이라면 더욱 큰일이군. 전력으로 쫓아야 한다.”

그 말을 마친 것과 동시에 카르세온은 바람과 같이 달렸다. 전신의 마나를 몽땅 두 다리에 집중하고 전력으로 발을 놀렸다. 그의 얼굴은 긴장으로 가득했다. 이미 상황은 최악을 향해 치달리고 있었다.

‘대체 누가? 빌어먹을, 이니안이라고 했던가? 내가 갈 때까지 어떻게든 버텨라. 그러면 그 보답으로 최대한 편안한 죽음을 줄 테니.’

카르세온은 정말 간절히 빌었다. 하론의 추측대로일 것이다. 이런 인원을 동원할 저력이 있다면 제국 최고의 어새신 길드라는 다크 크리스를 움직이지 않을 리 없었다.

***

갈수록 산속은 울창한 나무로 뒤덮였다.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기에 정리되지 않은 채 마구 자란 나무들. 나무 사이사이의 좁은 공간을 통해서만 걸음을 옮길 수 있다. 가득 쌓인 눈은 그런 걸음조차 더욱 조심스럽게 만들었다.

“얼마나 더 깊이 들어가는 거야?”

“깊이 가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단지 서쪽으로 움직일 뿐. 우리의 목적지는 수도니까.”

돌아온 이니안의 대답에 케라우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일부러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향하는 방향에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차 있을 뿐인 것이다.

‘이제 슬슬 들이칠 때가 된 것 같은데…….’

이니안은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섯의 기척이 근처에 있는 것은 얼마 전부터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가 어디인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니안은 온몸을 긴장시켰다. 전신의 근육이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언제 어디서 어새신이 튀어나와도 이상할 것이 없는 깊은 산속이다. 어느새 이니안은 로즈의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쩝, 다시 한 번 말하는 거지만 역시 그때 치는 것이 낫지 않았을까? 오히려 더욱 빈틈이 없는데…….]

[…….]

[…….]

발론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그런 생각을 떠올리는 참이었기에.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이군. 대체 어떻게 벌써 마나를 회복할 수 있는 거지?]

이번 작전을 세운 라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무려 스물네 시간을 쉬지도 않고 싸웠다. 그리고 어마어마한 위력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사용했다.

그뿐이 아니다. 그 후 바람보다도 빠른 속력으로 달렸다. 그 속도로 달리는 것은 마나를 사용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한데 지금 저 모습은 마나를 모두 회복한 모습이다.

인간인 이상 그럴 수는 없다. 보통 사흘 이상은 마나 호흡법을 병행하면서 쉬어야 소모한 마나를 채울 수 있다. 그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그만한 마나를 사용하고 벌써 저런 모습이라니……. 완전히 상식을 무시하는 괴물이잖아, 저거.]

킬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상식을 무시한다라……. 사이몬 가의 인간들이 그렇지.]

[……?!]

[……?!]

미르의 중얼거림에 나머지 네 사람은 온몸이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분명 그랬다.

사이몬 가.

다른 검가들과는 비교 자체를 거부하는 상식을 벗어난 대륙제일의 검가다.

그들은 한 사람이 오직 하나의 피어스 브레이크를 가진다는 상식을 무시하고 있다. 그리고 온몸의 마나를 완전히 소모한 후 사흘은 쉬어야 한다는 상식도 무시하고 있다. 그들은 일반인의 상식 밖에 있는 아득한 존재인 것이다.

[정말일까? 저 녀석, 사이몬 가의 사람일까?]

제논이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아마도. 8할 이상의 확률로.]

라딘이 기가 질린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설마 했지만 저런 모습이라면 사이몬 가의 인물일 가능성은 거의 10할이다. 단지 동료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8할이라 낮춰 말한 것이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10할이란 말이군.]

미르가 담담히 중얼거렸다. 이미 라딘의 버릇을 알고 있는 그들이다. 그가 8할의 확률이라 하면 그것은 10할의 확률이란 말이다. 그것이 성공의 확률이든 실패의 확률이든 말이다.

[어떻게 할 거지? 그래도 마지막으로 세운 작전대로 하는 거야?]

이미 미르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니안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게 되자 긴장으로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모두들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우리가 맡은 의뢰는 로즈라는 여자의 암살이다. 저 괴물 같은 녀석이 아니라 로즈라는 여자만 죽이면 의뢰는 완수된다는 거지.]

라딘의 말에 네 사람은 머릿속이 번쩍했다. 너무나 엄청난 이니안의 모습에 그들은 암살 대상을 잊고 있었다. 그들 같은 초특급 어새신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실수였다.

[동굴에서는 저 괴물 같은 녀석을 죽여야만 저 여자를 죽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니다. 저 여자는 노출되어 있어.]

라딘은 냉정하게 현재의 상황을 분석했다.

[그렇다면 다른 사람들이 저 용병을 붙잡고 있는 동안 내가 여자를 죽이면 되는 건가?]

[그래야지. 마스터, 뒤를 맡긴다. 모두 13번 대형이다.]

미르의 물음에 라딘이 냉정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13번이란 말이지. 훗, 결국 사용하는구나.]

제논이 씁쓸한 웃음과 함께 중얼거렸다.

다크 크리스의 암습은 항상 연수 합격이었다. 그래서 그 연수 합격에 대한 연습도 충분히 되어 있고, 각각의 대형도 있었다.

그중 최후의 대형이 바로 13번 대형이다. 수십 가지의 대형 중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은 대형. 그것은 마스터를 제외한 네 명의 목숨을 버리는 것이었기에 그들 역시 그 대형을 짜면서 설마 사용하게 되는 날이 올 줄은 몰랐다. 아니, 그런 날이 오지 않기를 빌었다.

하지만 이니안이라는 저 괴물 용병은 이 13번 대형으로도 과연 성공할 수 있을지 불안했다.

[마스터, 뒤를 부탁해.]

[원래 이 일을 하면 언젠간 닥칠 일이었지. 마스터, 반드시 의뢰를 완수해야 한다.]

발론과 킬이 한마디씩 했다.

미르는 대답하지 않았다. 굳이 대답이 필요하지 않았다. 자신은 자신의 실력을 다해 로즈라는 여인을 죽이면 되는 것이다. 자신들이 암살 의뢰를 받은 인물은 로즈라는 여인이다, 저 괴물 같은 이니안이라는 이름의 용병이 아니라.

자신의 동료 네 명이 13번 대형으로 이니안을 덮치면 자신은 그 틈에 로즈를 쳐야 한다. 케라우라는 또 다른 기이한 사내가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그는 밤이 되면 힘을 못 쓰는 듯했다. 그렇다면 기회는 있었다.

[암습은 오늘밤이다. 대형은 잘 숙지하고 있겠지?]

라딘의 말에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들은 프로다. 제국 최고의 어새신 길드라는 다크 크리스의 어새신들이다. 온몸이 차갑게 식었다. 근육은 적당한 수축 상태를 유지하며 팽팽하게 긴장해 있었다. 이제는 시간이 흐르기를 기다려야 한다.

이번 암살은 기회를 만들어 치는 것이다. 기회가 오길 기다릴 필요는 없다. 네 명이 목숨을 버려 기회를 만들 테니까.

미르는 그 기회를 잡으면 된다.

***

서서히 사방에 어둠이 내리고 있다. 하늘은 붉은빛을 띤 지 오래다. 곧 밤이 올 시간이다.

“오늘은 여기서 쉬어야 하는군.”

이니안이 하늘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그래, 난 지금 한계라고. 누구 덕에 밤에도 죽어라 달려서.”

케라우는 나무 사이에 그나마 평평한 땅을 찾아 고르며 투덜거렸다.

“충고하지. 오늘밤은 자지 않는 것이 좋을 거야.”

“대답하지. 그러면 난 소멸된다.”

으르렁거리듯 대답한 케라우는 금세 모포를 깔고 그 속으로 몸을 숨겼다. 전날 밤, 조금도 쉬지 못하고 달렸다. 온몸의 생명력이 빠져나가는 그 기분을 느끼면서.

물론 낮에 빛을 쬐며 어느 정도 기력을 회복했지만 오늘밤만큼은 자야 했다. 온몸의 구성 조직이 케라우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잠이 필요하다고.

이니안은 케라우의 반응에 고개를 가로저었다. 사실 케라우의 사정 따위야 자신이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걱정인걸. 저 녀석이 깨어 있어 주는 쪽이 안심이 되는데…….’

솔직히 이번은 조금 아쉬웠다.

어새신들이 노리는 것은 케라우가 아니라 로즈였다. 즉, 케라우가 자든 말든 그가 어새신들을 방해하지 않는다면 그에게는 별 일 없을 것이다.

지금 자신들을, 아니, 정확히는 로즈를 노리고 있는 어새신들은 초특급이다. 그들이 동시에 달려든다면 이니안 자신이 로즈를 지켜낼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솔직히 지금 이니안의 몸 상태 역시 말이 아니었다. 마나를 바닥까지 긁어서 사용했다. 그런 상태에서 몸에 무리가 많이 가는 마령현신의 초식도 사용했다.

제대로 된 위력이 나오지 않아 몸에 오는 부담은 생각보다 적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생각보다 적은 것이다. 절대적인 부담의 측면에서 몸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그 상태로 최소한의 마나만을 보충하고 달리고 또 달렸다.

지금 이니안의 몸 내부는 상처로 곳곳이 할퀴어진 상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지금 당하고 있는 일도 예상외였지만 케라우 역시 예상외의 전력이다. 그를 아쉬워할 이유는 없는 것이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