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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
이것은 일방적인 살육이나 다름없었다. 죽이기 위해 달려들고 살기 위해 검을 움직이건만 대체 누가 죽이려 하고 누가 살려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죽고 죽이는 현장.
“햐, 이놈들 정말 어새신 맞아? 그냥 머릿수로 들이밀고 있을 뿐이잖아?”
케라우는 검날을 뽑아 든 건틀릿으로 자신을 향해 덤벼드는 어새신들을 베어 넘기며 투덜거렸다. 그런 그의 얼굴에는 한 점의 흔들림도 없었다.
‘분명 이 녀석들은 이류나 삼류다.’
이니안도 느끼고 있었다. 매복도 어설펐고 공격은 더욱 어설프다. 그들은 그저 달려들고 있을 뿐이다. 자신들의 목숨을 헛되이 버리고 있었다.
지난밤에 왔던 어새신들은 달랐건만 어찌 갑자기 이런 녀석들이 쏟아져 나오는 걸까? 의혹은 생겼지만 지금은 눈앞의 적을 쓰러뜨릴 뿐이다. 머리를 쓰는 것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을 터이다.
로즈는 이니안과 케라우의 사이에 서서 그런 장면을 모두 지켜보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눈에서 초점은 사라져 있었다. 너무 엄청난 광경을 보아서였을까? 그녀가 아름답다고 생각한 이니안의 검의 움직임은 반드시 하나의 죽음을 가지고 왔다.
그렇게 앗은 사람의 생명은 대체 몇일까? 그녀는 처음에는 그 수를 헤아리고 있었으나 이제는 그것을 잊었다.
대체 왜 이들은 자신의 생명을 버리면서까지 자신을 죽이려 하는 걸가? 자신은 대체 어떤 존재인가? 그런 의문이 로즈의 머릿속에서 뒤엉켰다. 자신의 눈앞에서 수많은 생명이 스러지고 있다. 과연 이래야 하는가?
가슴에 구멍이 뚫린 아이라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왜 그렇게 죽었을까? 그 아이를 죽인 것은 정말 이니안일까?
그 아이의 가슴을 뚫은 것은 이니안이지만 죽인 것은 자신이 아닐까? 아니,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이 그 아이를 죽음으로 이끈 것이 아닐까?
수많은 의문이 로즈의 정신을 침습했다. 수많은 상념과 후회가 그녀의 가슴을 어지럽혔다. 결국 그녀는 생각하는 것을 포기했다. 그저 멍한 눈으로 눈앞의 현장에서 도피할 뿐.
그 와중에도 이니안은 천천히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가고 있었다. 그 뒤에서 케라우가 천천히 로즈를 인도하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끝이 없군.’
그야말로 끝이 없었다.
실력이 안 되기에 양으로 끝장을 보겠다는 것인지 그들은 끊이지 않고 숲에서 튀어나왔다. 이니안은 조금씩 지쳐 가는 것을 느꼈다. 자신이 아무리 강해도, 자신에게 아무리 많은 마나가 있다 해도 이건 도가 지나쳤다.
‘빌어먹을, 이 녀석들은 어새신이 아니야. 단지 명령에 따라 죽으러 달려드는 병사들일 뿐이다.’
이니안은 속에서 욕이 울컥 치솟아 올랐다. 아니, 그것은 분노였다. 하지만 그 분노를 토해낼 시간도 없었다. 적들은 끊이지 않고 숲 속에서 몸을 드러내고 있었다.
산맥에 들어오기 전에 이미 상당한 수의 적이 몸을 숨기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적은 정도라는 것을 모르는 듯이 무식하게 밀어붙였다.
‘젠장, 역시 그 인간의 조언을 듣는 것이 아니었어.’
이니안은 속으로 자신에게 이런 방법을 이야기해 준 인간을 욕했다. 산맥 속으로 들어온 것을 후회했다. 차라리 사람들 속에서 몇 안 되는 어새신을 경계하는 것이 나을 뻔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무식하게 머릿수로 들이밀 줄은 몰랐기에.
아니, 애초에 이 정도의 길드원을 보유한 어새신 길드가 있을 턱이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선택한 길. 절대 여기에서 쓰러질 수는 없었다. 자신은 로즈를 지키겠다고 했다. 그렇다면 지켜내야 했다. 이것은 자신과의 약속이다.
***
“그래, 다크 크리스가 움직였다고?”
등을 돌린 사내는 무심히 뒤에 있는 자신의 수하에게 물었다.
“네.”
그곳에는 다크 크리스를 움직이기 위해 길을 떠나던 사내에게 두 장의 스크롤 카드를 전해준 노인이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들만 움직인 건가?”
“일단 그들은 그리 알고 움직일 겁니다.”
노인의 대답에 사내는 차가운 미소를 지었다. 그가 한 말의 의미를 이해했기 때문이다.
“어디인가?”
“길리안 길드입니다.”
“길리안 길드?”
생소한 이름에 사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 들어보셨을 겁니다.”
사내는 노인의 말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머리 위로 올라온 소파의 등받이로 인해 노인은 그 모습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노인은 지금 자신의 주인이 어떤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어새신 길드이면서 어새신 길드가 아닙니다.”
“계속 말해보게.”
사내는 흥미를 느낀 듯했다.
“네, 그들은 길리안 산맥 전체에 걸쳐 모여 살고 있는 산적들입니다.”
“산적?”
노인의 대답에 사내는 의외라는 듯 되물었다.
“네, 그렇습니다. 다만 산적질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의뢰를 받아 청부살인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별 볼일 없겠군.”
사내는 흥미를 잃은 듯했다. 처음 들은 길드였기에 가졌던 관심은 모두 사라졌다. 산적 나부랭이라고 하는데 관심이 갈 일이 없었다.
“다만…….”
노인은 그런 주인의 변화를 눈치챘다. 노인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지은 채 말을 이었다.
“그들의 수가 좀 많습니다.”
“그래야 칠팔백 정도 아닌가?”
일반적인 산적의 규모가 그 정도였기에 사내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일반적인 어새신 길드의 어새신의 수가 삼백 정도인 것을 생각하면 상당히 많은 수이지만 볼 것 없는 산적이라야 그 수는 결코 대단한 것이 아니었다.
“삼만입니다.”
노인은 주인의 반응을 예상했다는 듯 더욱 짙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삼만?!”
그의 말에 사내는 놀란 듯했다.
삼만이라니? 삼만 명이라면 어지간한 정규군 수준이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공작령의 영지를 침탈하고도 남을 규모였다.
“길리안 산맥은 깊고도 넓습니다. 그 정도 인원은 충분히 안을 수 있지요.”
“그렇다 해도 대단하군. 끄응, 반란을 일으킬 수도 있을 정도의 수야.”
그 말은 사실이다. 삼만의 반란군이라면 제국으로서도 진압에 상당한 곤욕을 치를 터. 무시 못 할 세력인 것이다.
“그렇습니다만 진정한 그들의 힘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저도 우연히 입수한 정보였습니다.”
“자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수완이 상당히 좋아.”
사내는 만족한 미소를 머금었다. 아무리 대단한 사람이라 해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설사 드래곤이라 해도 사람의 머릿수에는 당하지 못한다. 그렇게 드래곤을 잡은 전력이 대륙에는 남아 있었다. 기록으로만 전해지는 전설 같은 이야기지만 그 증거는 남아 있었다. 비록 십만에 이르는 병사와 기사, 마법사들이 목숨을 잃었다 하더라도 말이다.
“얼마나 움직였나?”
“삼천입니다.”
“흐음, 그 정도면 충분하겠군.”
삼천이란 결코 작은 수가 아니다. 동네 건달이라도 삼천이라는 수가 모이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 삼천 명의 사람이 그냥 죽기 위해 천천히 걸어서 다가간다 해도 그 사람들을 모두 베어 넘기려면 지쳐 쓰러질 것이다.
아니, 인간의 체력으로 삼천 명의 목숨을 혼자서 베어 넘긴다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했다.
“하지만 길리안 산맥에 있다면…….”
사내는 걱정되는 것이 있는 듯 중얼거렸다. 길리안 산맥은 바운더리 산맥과는 제법 멀리 떨어져 있는 산맥이다.
바운더리 산맥은 제국의 북부 해안가를 따라 길게 이어진 산맥이다. 길리안 산맥은 제국의 남쪽 중심부에 국경을 이루면서 양쪽으로는 살짝 북쪽으로 휘어진 형태다.
바운더리 산맥과 길리안 산맥이 가장 가깝게 근접하는 곳도 말을 달려 일주일 이상은 달려야 하는 거리이다.
삼천 명이라는 대 인원이 그 거리를 이동해 로즈를 습격하기에는 거리가 너무 멀었다.
“이미 그들은 바운더리 산맥의 길목에 진을 치고 있습니다.”
노인은 주인의 걱정을 모두 안다는 듯 말했다.
“그래?”
“예, 그들이 바운더리 산맥 쪽으로 들어갔다는 말을 들었을 때 혹시나 해서 그들을 동원했습니다. 설마 다크 크리스 길드를 움직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아니야. 하하하! 좋아. 일은 확실히 해야 하는 법이지. 삼천 명의 삼류 어새신과 다크 크리스 길드라……. 이번 일은 확실히 성공하겠군. 이래도 살아남는다면 인간이 아닌 거야. 수고했어.”
노인은 주인의 칭찬에 미소를 지으며 방에서 물러났다. 그의 생각 역시 마찬가지다. 설사 카일로니아 왕궁의 그랜드 마스터라는 사이몬 공작이라 할지라도 그런 상황에서는 필사(必死)일 터다.
***
서서히 하늘이 황혼에 물들고 있다. 이제 곧 태양이 서편 너머로 그 모습을 감출 태세다.
“빌어먹을, 벌써 밤이야?”
케라우의 입에서 욕설이 쏟아져 나온다. 그럴 수밖에. 여전히 적은 숲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그런 와중에 밤이라니…….
이런 식으로 힘을 소모해서는 다음날 아침의 태양을 볼 수 있을 거라 장담할 수 없다.
그 와중에도 세 녀석이 동시에 달려들었다. 케라우의 양손이 빛을 발하며 교차했다. 케라우 쪽으로 달려든 세 사람은 가슴이 찢어진 채 나가떨어졌다. 즉사였다.
갈비뼈를 자르며 심장을 훑고 지나간 케라우의 손톱이 피에 물들어 요사스럽게 빛났다. 케라우의 건틀릿에 달려 있던 검날은 이미 부러져 나간 지 오래였다.
이니안처럼 무기에 마나를 불어넣어 싸우는 것이 아니었기에 수많은 어새신들을 베어 넘기며 결국은 부러진 것이다.
‘빌어먹을, 일단 몸을 피해야 한다.’
한 번의 칼질로 네 사람의 허리를 훑어낸 이니안은 결국 후퇴를 결정했다. 밤이 오면 곤란했다. 그나마 한쪽에서 케라우가 버텨주고 있기에 이 정도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더 이상은 무리였다.
이미 호흡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었다.
“케라우! 헉헉!”
“왜? 헉헉!”
“동굴을 찾아라! 입구는 좁고 우리 세 사람이 충분히 들어가서 쉴 수 있을 만한! 헉헉헉!”
이니안은 적들이 듣든지 말든지 신경 쓰지 않고 케라우에게 소리쳤다. 이미 호흡은 거칠어질 대로 거칠어져 있고 힘도 빠질 대로 빠져 있었다. 저들이 듣는 것을 걱정하며 은밀한 방법을 쓸 여유 따위는 없었다.
“이 빌어먹을 놈아, 지금 이 상황에서 그게 가능할 것 같냐?”
“얼마나 필요해?”
이니안은 케라우가 말하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즉각 물었다.
“5분.”
“헉헉! 뭐가 그렇게 길어? 빌어먹을!”
이미 그들의 검에 쓰러진 사람의 수는 천을 넘어서고 있었다. 두 사람이 해낸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결과였다. 하지만 아직도 무수한 인간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아니, 이 정도로 사람을 죽이면 공포를 느끼고서라도 덤벼들지 않게 되는 것이 정상이다. 저들은 아직 이니안과 케라우의 옷깃조차 건드리지 못하고 있었다.
달려들면 죽을 뿐. 그렇다면 섣불리 달려들지 못하는 것이 정상적인 인간이다. 그런데 저들은 아무 상관없다는 듯 달려들고 또 죽었다.
이 상태라면 지쳐서 상처를 입는 것도 금방이다.
이니안은 검을 떨쳐 주변을 둘러싸고 접근해 오는 적들을 쓸어냈다. 하지만 이번에는 죽은 이가 아무도 없었다. 아니, 일부러 죽이지 않았다. 이니안은 잠시의 여유를 얻기 위해 주변으로 달려들던 적들을 검풍으로 밀쳐낸 것이다.
아주 잠시 생긴 여유. 이니안은 한껏 숨을 들이켰다.
“후흡.”
신선한 숲 속의 마나가 호흡과 함께 몸속으로 들어온다.
‘이 정도면… 아슬아슬하군.’
이니안은 마나 스피어의 마나 량을 확인했다. 그다지 많다고는 할 수 없는 마나. 적의 수를 알아차린 후부터 최소한의 마나로 적들을 쓰러뜨려 왔기에 그나마 이 정도라도 남아 있는 것이다.
지금은 마나가 있어도 체력이 모자라 더 이상 싸울 수 없는 상태였다. 서서히 집중력도 떨어져 가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 마나를 한 번에 쏟아내는 것도 한 방법이다. 아니, 5분의 시간을 벌려면 그 수밖에 없었다.
“딱 5분이다.”
이니안의 외침에 케라우는 즉시 손톱을 거두고 로즈의 옆에 딱 붙었다. 주변에 있을 박쥐들을 찾기 위해서이다. 그 순간 케라우의 몸은 완전한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그곳으로 다섯의 적이 날아들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날아들려 했으나 그들은 곧 한줌 핏물로 화해 바닥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