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37화 (37/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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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허어, 상당히 화가 나신 모양이군.”

노인은 걱정 어린 눈으로 사내를 보았다.

“뒷일을 부탁드립니다.”

“알겠네. 그럼 이걸 가지고 가게.”

노인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가 부탁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사내는 노인이 건네는 것을 받아 품에 넣었다.

“그럼.”

사내는 노인에게 인사를 하고는 한쪽에 있는 작은 문으로 나갔다. 문이 통하는 곳은 작은 뒷골목이었다. 정체불명의 허름한 가게들이 잔뜩 몰려 있는 골목. 사내가 나온 곳은 그런 골목의 무수한 문 중의 하나였다.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 그런 사내를 이상하게 보는 이는 한 명도 없었다. 그곳을 드나드는 것이 일상인 듯 몇몇 이는 사내에게 손을 흔들어주기도 했다. 사내도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그의 모습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사내는 익숙한 걸음으로 골목을 벗어났다.

사내는 미오나인의 모든 거리를 꿰고 있었다. 왕궁을 제외한 모든 곳을 알고 있었다. 공작가의 저택 내의 비밀 통로까지도. 그런 그가 다크 크리스를 찾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한참을 걸어가던 그는 한 호화로운 가게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라인베르 주류상.

그가 멈춰 선 가게의 간판에 적힌 이름이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가게 안으로 들어섰다.

가게는 외부만큼이나 내부도 호화로웠다. 섬세한 세공이 들어간 가구들이 적당한 위치에 자리하고 있었고, 바닥에 깔린 카펫에서는 걸음을 옮길 때마다 부드러운 감각이 전해져 왔다. 카펫에 그려진 문양도 아름다웠다.

진열대에 나열된 술병들.

술병이라기보다는 예술품에 가까웠다. 갖가지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는 술병들.

“어떻게 오셨습니까?”

말끔하게 차려입은 점원이 사내에게 다가와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고급술만을 취급하는 주류상답게 점원의 태도가 무척이나 공손하고 절도 있었다.

“샤토 그린디어 437년산.”

사내의 말에 점원의 얼굴이 살짝 변했지만 그것은 순식간이었다.

“이리로 오시죠.”

점원은 사내를 데리고 어디론가 향했다.

“어서 오세요.”

점원을 따라 미로 같은 지하실을 걸어 도착한 방. 그 안에서 사내를 맞이하는 이는 보랏빛 머리칼이 매혹적인 여인이었다. 이곳이 어떤 곳인지 알고 왔음에도 사내는 눈앞의 여인의 존재를 믿을 수 없었다.

청초하면서도 고귀했다.

절대 암살 따위나 하면서 살 여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 방에 있었다. 제국제일의 어새신 길드라는 다크 크리스의 중심부에.

“의뢰를 하러 오셨겠죠?”

사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물론 의뢰비도 아시겠죠? 이곳을 이렇게 손쉽게 찾아오신 것을 본다면 말이에요.”

여인은 살짝 미소를 지었다. 한 떨기 수선화 같은 모습. 사내는 지금 자신이 과연 어새신 길드에 의뢰를 하러 온 것이 맞는지 헷갈렸다.

“10만 골드와 의뢰자의 목숨.”

사내의 대답에 여인은 다시 한 번 웃었다. 사내는 차마 그 웃음을 똑바로 바라볼 수가 없었다.

“잘 알고 계시는군요.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커다란 죄악이에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죄악을 부탁하려는 사람들이 있지요. 우리가 의뢰인의 목숨을 요구하는 것은 그들의 각오를 확인하기 위해서예요. 과연 다른 이의 목숨을 앗아야 할 정도로 절실한 사연이 있는지. 정말로 절실하다면 자신의 목숨을 버려서라도 이루려 할 테니까요.”

궤변이다.

그 말이 목구멍까지 솟아 올라왔지만 사내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뱉지 못했다. 어쨌든 자신은 의뢰자였고, 그것이 그들의 규칙이었기에.

“그럼 의뢰 대상에 대해 말해주세요.”

“여기.”

사내는 미리 준비해 온 두 장의 스크롤 카드를 품에서 꺼내 여인에게 건넸다.

“이건?”

“하나에는 의뢰에 대한 내용이, 다른 하나에는 10만 골드가 담겨 있소.”

“철저하시군요.”

사내는 여인의 말에 무뚝뚝하니 앉아 있었다. 이제 자신 앞에 다가올 운명을 기다리며.

“그럼, 여기 찾으신 샤토 그린디어 437년산이에요.”

요사스러운 붉은 빛을 빛내는 와인이 글라스에 담겨 있었다. 사내는 망설임 없이 그 와인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리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로날드…….’

한 달 전 태어난 아들의 이름을 속으로 삼키며 서서히 온몸으로 퍼지는 고통에 몸을 던졌다. 고통이 느껴진다 싶은 순간 그는 얼마 되지 않아 더 이상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숨이 끊어진 것이다.

샤토 그린디어.

라칼트 대륙에서 최고라고 인정받는 레드 와인이다. 단, 샤토 그린디어의 첫 생산품은 제국력 438년이다. 즉, 437년산은 없다. 이들이 부르는 샤토 그린디어 437년산은 의뢰인에게 죽음을 선사하는 독의 이름이었다.

***

크리스란 운철로 만든 단검으로 물결 모양의 검날을 가지고 있다. 검면에 갖가지 신비로운 문양이 새겨진 아름다운 단검이다. 그리고 다크 크리스의 길드원들이 사용하는 무기이기도 했다.

다크 크리스(Dark Kris).

미오나인 최고의 어새신 길드다. 단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길드. 다섯 명의 어새신이지만 그들 한 명, 한 명은 초특급이었다. 누구도 그들의 본모습을 모른다. 그들을 본 의뢰자는 모두 죽었기에.

그들은 소드 마스터를 죽여 달라는 의뢰까지 성공한 전력이 있었다. 그랬기에 제국 최고라는 명성을 가진 것이다. 혹자는 그때의 일 때문에 다크 크리스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에 이른 어새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레 추측하기도 한다.

그런 길드가 로즈에 대한 암살 의뢰를 받아들였다. 수하의 목숨을 대가로 지불한 누군가에 의해.

“호호, 오랜만의 의뢰야. 모두들 준비하도록 해.”

여인의 목소리는 작은 방을 잠시 떠돌다가 사라졌다. 여인은 몸을 일으키며 미소 지었다. 사내가 죽기 전에 본 웃음과는 다른 살기에 찬 섬뜩한 미소였다.

***

어느새 또 하루가 저물어가고 있다. 이제 어느 정도 산맥에 들어서자 제법 나무들이 우거져 있었다. 간간이 낯선 방문자에 놀라 도망가는 야생동물의 기척이 느껴지기도 했다.

“내일이면 드디어 바운더리 산맥으로 다시 들어가는 것인가?”

거친 산길에서 그나마 평평한 바닥을 찾아 모포를 깔며 케라우는 저 뒤로 장엄한 산세를 자랑하는 바운더리 산맥을 바라보았다. 이니안은 가운데 모아온 나무로 불을 피우고 케리우의 시선이 향한 곳을 바라보았다.

험준한 산맥과 우거진 숲.

역시 어새신들에게는 절호의 장소다. 이니안도 그것을 알고 있다. 상대는 숨어 있고 자신들은 노출된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 숨는 것보다는 자연 속에 숨는 것이 상대를 찾기 쉬웠다. 사람은 결코 자연이 될 수 없기에.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분하여 사람 속에 숨는 것은 쉽고 찾기도 어렵다. 하지만 사람이 자연이 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이니안은 단 한 번, 사람이 자연이 된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아버지와의 대련. 그때 중단으로 검을 곧추세운 아버지의 모습은 자연 그 자체였다.

이니안은 사람이 자연이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해 보았다. 그랬기에 어새신은 절대 자연이 될 수 없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이곳으로 온 것이다. 자연 속에 숨어든 이방인을 찾아내어 격살하기 위해서.

“거창한 환영 준비를 하고 있겠지.”

이니안은 홀로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는 이미 느끼고 있었다. 고요해야 할 산맥 위로 솟구쳐 올라오고 있는 살기를.

11장. 지킨다는 것은 무척 힘든 일이다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밝았다.

세 사람은 산맥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곳이 자신들의 목적지로 향하는 길이기에 그 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제부터 최대한 나에게 가깝게 붙어 있어라.”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이니안은 로즈에게 말했다. 로즈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이니안의 목소리에 담겨 있는 기색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아직 그에 대한 시선이 완전히 예전으로 돌아온 것은 아니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다면 따라야 했다. 어쨌든 그는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이다. 그것엔 항상 감사하고 있다. 비록 그 방법이 자신의 생각과는 다르다고 해도. 결국은 자신을 지키기 위한 행위였기에.

“흐음, 원래 이 산이 이렇게 조용했던가?”

케라우가 주변의 기척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세 사람이 별다른 대화 없이 걷기를 네 시간여. 이미 상당히 깊은 산속에 들어와 있는 상태다. 그럴수록 야생동물들의 기척이 더 많이 감지되어야 할 터.

그런데 그런 것들이 전혀 없었다. 물론 보통 사람이라면 현재 숲의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것을 느낄 수 없다. 그들은 애당초 야생동물의 기척을 느끼지 못하기에. 하지만 이니안과 케라우는 달랐다.

“곧 오겠군.”

이니안은 로즈에게 조금 더 가깝게 붙었다.

온몸이 빳빳하게 긴장했다. 물론 그렇다고 굳어든 것은 아니다. 최적의 상태로 검을 뽑을 수 있는 적당한 긴장. 이니안은 자신의 몸을 그런 상태로 만들었다.

로즈 역시 잔뜩 긴장한 채 주변을 살폈다. 그런다고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그녀의 행동은 스스로를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었으니까.

그 순간,

로즈는 하얀 빛살을 보았다. 자신의 눈앞을 가르고 지나간 새하얀 빛. 순식간에 가르고 지나갔지만 그녀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아름다워.’

그녀의 눈에 비친 세상을 가득 채우는 하얀 빛. 그것을 보는 순간 그녀는 그렇게 느꼈다. 순수하게 가슴에서 솟아오른 감정의 조각들.

이제는 사라진 하얀 빛의 궤적을 로즈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때 그 궤적을 뚫고 들어오는 이물. 그것은 붉은 색이었다. 점점이 하얀 빛의 궤적을 침습하는 듯한 붉은 점은 곳 선이 되고 면이 되어 그녀의 동공을 꽉 채웠다. 그리고 코로 스며드는 비릿한 혈향.

“이게?”

그제야 로즈는 정신을 차렸다. 그녀의 눈에 보인 것은 붉은 피가 가득한 바닥과 목이 없는 시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녀가 아름답다고 느낀 하얀 빛은 이니안이 검으로 그린 궤적이었고, 눈앞의 시체는 그녀의 목숨을 노린 어새신임을.

“이제부터 시작이다. 정신 똑바로 차려.”

이니안은 검을 가볍게 흔들어 검신에 묻은 피를 말끔히 털어내고는 다시 검집에 꽂아 넣었다. 로즈는 아무런 말도 않고 이니안의 뒤를 따랐다.

그때부터다.

산은 무수한 사람들을 토해내고 있었다. 모두 어디에 몸을 숨기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나무와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 나뭇잎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 흙과 같은 색의 옷을 입은 사람 등, 갖가지 옷을 입고 기묘한 무기들을 가진 사람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들의 목적은 단 한 가지였다.

로즈의 목숨.

그리고 그들은 모두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이니안의 검이 정신없이 움직였다. 검이 한 번 움직이면 반드시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 검이 그린 하얀 궤적을 따라 붉은 핏줄기가 비산했다.

하얀 빛과 붉은 선혈이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이니안이 팔을 놀리는 대로 움직이는 검은 빈 허공을 하얀 실로 수를 놓는 듯했다. 그 모습은 유려하고도 아름다웠으며 망설임이 없었다. 그렇게 하얀 실이 지나간 자리를 어새신들의 붉은 실이 뒤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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