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36화 (3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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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오옷, 아침이군. 역시 아침에 신선하게 내리쬐는 햇볕은 기분이 좋아.”

여전히 전혀 뱀파이어답지 않은 말을 하면서 케라우가 모포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응?”

그런 그는 눈앞에 펼쳐진 모습에 잠시 동작을 멈추었다. 그는 로즈와는 다르게 자다 일어났건만 정신이 말짱했다.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한 케라우.

“이니안, 네가 왜 거기에 있냐? 너, 어제 분명 여기에 모포를 깔았던 것 같은데.”

케라우는 이니안의 모포가 처음 깔렸던 곳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곳의 눈 위에는 아직 이니안이 모포를 깔았던 흔적이 남아 있었다.

“설마 이니안 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케라우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가뜩이나 그 일 이후 분위기가 좋지 않아 별다른 말도 못하고 장난도 못 치고 있는 터다. 그런 상황인지라 이런 모습에 케라우는 그야말로 ‘딱 걸렸어’ 하는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고 있었다.

이니안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모포를 깔끔하게 개어서는 처음 모포를 깐 자리에 두었던 배낭에 집어넣었다.

“오빠!”

냉기가 풀풀 날리는 목소리로 로즈는 대답을 재촉했다. 하지만 이니안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주변을 정리했다. 그 특유의 표정으로.

이 분위기에 케라우는 고개를 흔들었다. 자신이 끼어들어 장난을 칠 분위기가 아니었던 것이다. 케라우는 자신이 모르는 사이 두 사람이 화해라도 한 것인가 하고 장난을 치려했던 것인데 지금 보니 자신의 착각이었다.

괜히 불난 산에 섶을 지고 뛰어들 필요는 없었다. 이럴 때는 그저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는 것이 상책이었다.

로즈는 차가운 눈으로 계속해서 이니안을 쏘아봤다. 이니안은 그 눈길을 무시한 채 태연히 가방에서 빵과 우유를 꺼내 아침 식사를 하고 있었다.

말라서 퍼석퍼석해진 빵은 먹기도 힘들었거니와 맛도 없었다. 긴 도주에 있어 영양 보충은 중요했기에 이니안은 묵묵히 빵을 씹어 삼켰다.

“응?”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케라우는 무언가를 느낀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건 피 냄샌데…….”

뱀파이어답게 피에는 민감했다.

“그것도 신선한 인간의 피야. 남자인가? 세 곳이군.”

케라우는 지난밤에 이니안이 시체를 눈 밑에 묻은 곳을 정확히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어젯밤에 어새신 놈들이 왔었냐?”

짐작 가는 것이 있었기에 케라우가 이니안에게 물었다.

“네놈이 죽는다면 그건 틀림없이 자다가 칼에 찔렸을 때일 거다.”

무심한 한마디.

그 대답에서 케라우는 간밤에 어새신들이 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것은 그것이고, 상당히 기분이 나빠지는 대답이다. 케라우는 울컥했으나 그것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자신이 세상모르고 잠에 빠져들었던 것은 사실이기에. 하지만 케라우도 할 말은 있었다.

“그건 말이야, 내가 전에도 말했지만 난 빛과 어둠에 대한 속성이 뒤틀려 버렸어. 보통 뱀파이어가 낮에 돌아다닌다는 소리 들어봤냐? 그런데 난 밤에도 움직일 수 있어. 비록 몸의 기운은 빠져나가지만. 사실은 자야 한다고. 누구 덕에 지금까지 밤에 못 잔 것이 얼만데. 솔직히 정상적인 뱀파이어들은 낮에는 깊은 수면에 빠져들어. 심장에 말뚝을 박아 넣어도 모를 정도지. 난 그런 깊은 수면을 밤에 해야 한단 말이야. 물론 자지 않으려면 안잘 수 있지만 그러면 생명과 활동에 심각한 타격을 입는다고. 어쩔 수 없는 경우가 아니라면 깊은 수면을 취하는 것이 가장 좋단 말이지. 즉, 나는 정상적인 뱀파이어들이 낮에 취하는 깊은 수면 상태였으니 아무것도 모를 수밖에 없다 이 말이야.”

케라우는 나름대로 구구절절하게 자신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이니안은 듣지 않고 있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들었지만 그 이외의 것들은 몽땅 흘려버렸다.

“귀찮은 녀석이군.”

“뭐얏!”

케라우의 구구절절한 이야기에 대한 이니안의 대꾸에 케라우가 발끈했다. 이니안의 입장에서 확실히 케라우의 그런 몸 상태는 귀찮은 일이었다.

“아, 그냥 내버려 두면 되는군.”

이니안은 잊고 있었다는 듯 한마디를 더했다. 그렇다. 이니안이 굳이 케라우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자신이 지켜야 하는 대상은 로즈다. 귀찮고 짐이 되면 버리면 되는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이니안은 잠시 잊었다. 케라우까지 챙길 생각을 했던 것이다.

“으윽, 이 녀석.”

두 번째 말이 케라우에게는 더 큰 상처였다. 처음의 말은 귀찮더라도 챙기겠다는 말이었기에 그나마 참아줄 만했지만 두 번째 말은 그도 아니었으니까.

‘내가 언제부터 저 녀석을 이렇게 신경 썼지?’

바실러스 성의 지하 감옥에서부터 귀찮았던 존재다. 항시 귀찮은 혹이었는데 어느샌가 혹에도 신경을 쓰고 있었다.

“젠장, 네놈은 친구를 겨우 그딴 식으로 취급한단 말이냐!”

이니안은 빵을 우물우물 씹은 후 우유를 한 모금 마시며 빵과 함께 삼켰다.

‘친구? 친구라고? 훗.’

이니안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케라우의 친구가 되어 있었다. 처음 자신을 따라붙을 때 넉살 좋게 친구라고 불렀던 것은 기억하지만 그때와 지금의 어감은 묘하게 달랐다.

이니안은 잠시 어린 시절을 떠올렸다. 자신이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이들과 함께했던 시간.

‘쉐이나…….’

다시 떠올라 버렸다. 그녀 역시 그 시간을 함께했기에 친구들을 생각하자 그녀도 자연스럽게 떠올라 버렸다.

‘쓸모없는 녀석.’

이니안은 자신에게 아픈 기억을 떠올리게 한 케라우를 노려보았지만 케라우는 이미 몸을 돌려 로즈와 함께 모포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다들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일단 떠올리자 안부가 궁금해졌다. 그렇게 떠나온 지 벌써 3년이다. 곧 신년이니 이제 3년을 꽉 채우고 4년째에 접어든다.

이니안이 잠시 과거의 상념에 잠겨 있는 사이 로즈와 케라우는 모포 정리를 끝냈다. 그리고 로즈는 자신의 배낭에서 역시 빵과 우유를 꺼내 자신의 아침 식사를 했다. 억지로라도 식사를 잘 챙겨야 한다는 사실 정도는 그녀도 알고 있었다.

“가지.”

어느새 상념에서 깨어난 이니안은 로즈가 아침 식사를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로즈와 케라우도 그 뒤를 따랐다.

이니안과 로즈 사이의 거리가 어제보다는 조금 줄어 있었다. 잠자코 뒤를 따르던 로즈가 조금씩 이니안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아침에는 미안했어요.”

그 말을 끝으로 로즈는 다시 이니안과의 거리를 유지했다. 아직 아이라의 일에서 맺힌 감정은 풀리지 않았다.

다만 케라우의 말에서 로즈는 이니안이 왜 자신의 곁에 그렇게 가까이에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간밤에 습격한 어새신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일부러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이다.

‘조금만 상냥할 수는 없나…….’

로즈는 물끄러미 이니안의 뒷모습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이니안의 배려를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저 차가운 얼굴만 아니라면 더 좋을 텐데. 마음이 조금만 더 따뜻하면 좋을 텐데.

지금까지는 그러려니 했지만 아이라의 죽음을 본 이후에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그때 본 이니안의 모습은 차가움을 넘어서 잔인하게 까지 느껴졌다. 로즈는 그런 잔인함이 싫었다.

그녀가 그를 이해하든지, 그가 자신의 모습을 바꾸든지 둘 중 어느 것도 아니라면 두 사람의 관계는 지금과 같은 상태로 지속될 것 같았다.

***

몸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다.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내의 몸이 떨리고 있다.

“그러니까 실패했다는 건가?”

“네…….”

“내가 분명 쉽지 않을 거라 했을 텐데…….”

느릿느릿한 목소리. 하지만 지금 무릎을 꿇은 사내에게는 세상의 어느 소리보다도 공포스러웠다.

“그래서 일류 어새신들로만 추려서 보냈습니다만…….”

“훗, 일류라는 놈들이 제대로 된 공격 한번 못해보고 모두 죽고 한 놈만 살아왔다? 여섯이나 투입되어서?”

소파에 등을 기댄 사내는 수하의 보고를 잘랐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져 있었다.

“이니안이라는 용병에 대한 평가를 잘못했습니다.”

“그래? 어느 정도로 예상했었나?”

“중급의 소드 익스퍼트로 생각했습니다.”

“네놈!”

지금까지 조용한 목소리로 느릿느릿 이야기하던 사내의 입에서 폭갈이 터져 나왔다.

“네, 넷!”

깜짝 놀란 수하는 양 무릎을 모두 꿇고 넙죽 엎드렸다.

“카르세온의 손에서 한번 벗어난 녀석의 실력이 겨우 그 정도일 거라 생각했단 말이냐?”

“그, 그것이…….”

주인의 물음에 그는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쩔쩔매고 있었다. 솔직히 운이 좋아 탈출했다고 생각했다.

“후우, 저런 멍청한 녀석이 수하라니…….”

그 말에 사내는 온몸이 오싹함을 느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주인이 칼을 뽑아 들었음을. 그 칼은 자신의 목을 내려칠 것이다.

“부, 부디 용서해 주십시오. 아니,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시오.”

필사적이다. 자신의 목숨을 건지기 위해 필사적이다.

“한 번만 더라…….”

사내는 주인의 처분을 기다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다.

“좋아, 한 번 더 기회를 주도록 하지.”

그 말이 주인의 입 밖으로 나오는 순간 사내의 얼굴에 안도의 기색이 내려앉았다.

“움직여라.”

“네?”

“다크 크리스(Dark Kris)를 움직여라.”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자신의 주인은 지금 자신에게 제국 최고의 어새신 길드를 움직이라고 한다. 그들을 움직이기 위해 필요한 대가를 알기에 사내의 얼굴에 절망이 어렸다.

“알겠습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해야 했다. 자신의 주인을 알기에 그는 주인의 말을 따라야 했다.

“그럼 이만 가거라.”

주인의 말에 사내는 천천히 그 방에서 물러났다.

방을 빠져나온 사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후우, 다시 한 번 준 기회가 이것이라니… 역시…….”

사내의 얼굴에 체념의 빛이 어렸다.

“하지만 일단은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니까 뒷일은…….”

이제 사십대 중반으로 보이는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사내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복도를 잠시 걷던 그는 곧 멈춰 서서 벽의 한곳을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거친 소리와 함께 바닥부터 허리 어림까지의 공간이 열렸다. 그는 그 구멍으로 몸을 숙여 기어들어 갔다.

낮고 좁은 통로는 한 치 앞도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으나 그는 익숙하게 기어갔다. 얼마나 갔을까? 그는 멈췄다.

벽의 한곳을 누르자 다시 한 번 거친 소리와 함께 벽 옆의 공간이 열렸다. 그곳에서 희미한 빛이 새어 나왔다. 사내는 그 구멍으로 들어갔다.

사내가 들어간 곳은 창고였다. 커다란 오크 통이 곳곳에 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술 창고인 듯했다. 사내는 익숙한 걸음걸이로 오크 통 사이를 걸어갔다.

그가 향하는 곳은 막다른 곳이었다. 오크 통만 가득 쌓인 벽. 사내는 그중에서 오크 통 하나를 빼냈다. 가득 쌓인 것들 중 하나가 빠졌으니 오크 통들이 무너져야 정상이었지만 그것들은 여전히 그 모양을 유지하고 있었다.

오크 통을 빼내고 드러난 공간. 그는 그곳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오크 통 뒤에 달린 손잡이를 잡고 다시 오크 통을 제자리에 끼워 넣었다.

“왔는가?”

“예.”

사내가 드러난 공간에 허리가 구부정한 노인이 작은 책상에 앉아 있었다.

“앞으로의 일은?”

노인의 물음에 사내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다크 크리스를 움직여라.”

그의 대답에 노인의 눈썹이 꿈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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