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35화 (35/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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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마이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변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그는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화가 안 나는 것이 아니었지만 그것을 터뜨리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자중지란은 스스로 무덤을 파는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마이어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드는 순간 하론은 아차하는 심정이 되었다. 그제야 그도 자신의 실수를 인지한 것이다.

“후우, 빌어먹을 용병 녀석. 이니안이라고 했나, 그 찢어 죽여도 시원찮을 녀석의 이름이? 그 녀석 때문에 나도 어떻게 됐나 보군. 후, 미안하다.”

하론은 이 자리에 있는 인물들 중 상황 판단이 가장 빨랐다. 그것은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하론은 자신이 잘못한 것을 인지하자 바로 그에 대한 사과를 했다.

이런 감정이 쌓이면 서로 간에 불신으로 발전하여 결정적인 순간 커다란 방해 요인이 되어버린다. 하론은 그 사실을 잘 알았고, 그랬기에 즉시 사과를 한 것이다.

“됐어. 틀린 말도 아니니까.”

마이어는 퉁명스레 대답하고는 물을 마셨다. 시원한 맥주 한 잔이 간절했지만 지금은 임무 중이다. 술을 입에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랬기에 커다란 덩치의 기사들이 연거푸 물만 들이켜고 있는 것이다.

마이어의 모습에 하론이 슬며시 웃었다. 오랜 시간을 함께한 동료다. 그가 화가 풀렸다는 것쯤은 굳이 자신에게 웃으며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 여우같은 녀석은 이 마을에 들어오지도 않았어. 우리가 포기하지 않고 뒤따를 걸 예상하고는 그대로 지나쳤지. 그 험로를 지나오면 마을을 발견하는 순간 누구라도 쉬고 싶을 텐데 말이야. 그놈은 그것을 위해서 굳이 트롤의 가죽을 벗기는 수고까지 했고, 결국 그놈은 우리가 뒤따라와 그 트롤의 시체를 보고 자신들이 마을에 들를 것이라 예상할 것까지 꿰뚫어 봤단 말이다. 우리가 이 바웬 마을을 목표로 전력으로 추적할 거란 사실도. 그래서 이 마을은 그대로 지나친 거야. 자신들의 흔적이 남지 않게. 그러니 우리가 아무리 뒤져봐야 건질 게 없지.”

분위기가 회복되자 하론은 마이어가 물었던 것에 대한 답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 설명을 하면서 다시 화가 나는지 중간중간 물을 들이켰다.

그것은 절대 목이 말라서가 아니었다. 가슴에서 솟아오르는 화를 삭이기 위해서였다.

“정확한 분석이다.”

“부단장님.”

그때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여덟 사람은 모두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들 하론의 설명에 정신을 집중한 사이 카르세온이 들어온 것이다.

“내 불찰이다. 나 역시 놈들은 지칠 대로 지쳐서 첫 마을에서 쉴 거라 생각했으니까. 이니안 그놈, 머리가 보통 영리한 것이 아니야.”

여덟의 하이 나이트는 카르세온의 말속에 깊이 내재해 있는 분노를 읽을 수 있었다. 다시 한 번 이니안에게 당했다는 사실에서 오는 분노, 그것이었다.

“그렇다면 그놈은 어디에?”

마크가 조심스레 물었다.

“차타르 마을이야.”

대답은 하론이 했다.

“그놈은 이미 이곳까지 온 것이 한계였을 거야. 우리 역시 지칠 대로 지쳤듯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때문에 이곳을 지나쳤다면 다음 마을인 차타르에서 쉬어가겠지.”

“그럼 어서 가야죠.”

마이어가 가장 먼저 자리를 박차며 카르세온에게 말했다.

“그래, 한시라도 빨리 추적한다.”

그들 모두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절벽을 내려와 쉬지 않고 달려 협곡을 벗어났다. 그 후 잠시 휴식을 취한 다음 이곳 바웬 마을까지 다시 전력으로 달렸다.

마을에 들어온 이후에는 쉬지도 못하고 흩어져서 그 이니안이라는 녀석의 흔적을 찾았다. 그리고 허탕을 치고 그 녀석에게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몸도 마음도 심하게 지쳐 있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그 녀석이 있을 곳으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제국의 하이 나이트들이었다.

바웬 마을을 벗어날 때 서쪽의 산을 넘어가는 황혼에 그들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그때 이니안은 차타르 마을을 떠난 후 첫 노숙을 준비하고 있었다.

***

불꽃 카드로 자리 가운데에 불을 피우고 모포를 깔았다. 저녁 식사는 이미 육포와 마른 빵, 그리고 우유로 마친 후다.

로즈는 평원에 깔린 모포로 몸을 숨긴 지 오래였다. 이미 해는 져서 밤하늘에 별들이 총총히 빛나고 있었다. 케라우 역시 모포에 몸을 숨겼다. 해가 진 이상 그는 특별한 일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결국 불가에 이니안 혼자 깨어 앉아 있었다. 언제 어디에서 적이 나타날지 모르는 이 상황에서 그 혼자 불침번을 서고 있었다.

이니안은 묵묵히 앉아 있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동자. 그는 그저 피어오르는 불꽃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왔군.”

멍하니 흐트러져 있던 그의 눈동자에 초점이 잡혔다.

“이미 근처에 있는 것을 아니까 그만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어때?”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가 주변으로 울려 퍼졌다. 내일이면 산맥의 입구에 진입하겠지만 아직은 평탄한 지형이다. 어새신들이 몸을 숨기기 어려운 곳이다.

한데 어디에도 어새신이 숨어 있는 흔적은 없었다. 그만큼 이니안이 기척을 느낀 어새신들의 수준이 높다는 뜻이다.

이니안의 낮은 경고에도 주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그저 차가운 바람이 주위를 한번 쓸고 지나갔을 뿐.

“이 정도면 일류의 수준은 넘어섰다고 인정해 주지. 다만 운이 나빴어. 나에게 걸렸으니까.”

이니안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걸렸다. 그의 미소에 비한다면 조금 전 주변을 쓸고 지나간 바람은 따뜻한 봄바람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이니안은 앉은 자세를 그대로 유지한 채 손을 움직였다. 그에 따라 세 개의 빛줄기가 어둠을 헤치고 날아가 새하얀 눈 속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빛줄기가 들어간 눈 주위가 서서히 붉게 물들었다.

“이래도 안 나올 텐가? 이제 혼자 남았을 텐데.”

이니안은 단 한 곳만을 응시하고 있었다. 이니안의 감각에 걸린 어새신은 모두 넷이었다. 그중 셋을 마을에서 산 단검을 날려 처리했다.

이제 한 명이 남은 것이다. 그도 어디에 숨어 있는지 알고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기만 하면 순식간에 처리할 수 있다.

그러나 이니안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러면 이니안은 로즈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지게 된다. 로즈를 지키기 위해 함께하고 있는 이상 로즈에게서 떨어질 수 있는 거리에는 한계가 있었다.

언제 어떤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자신이 로즈를 지킬 수 있는 간격, 그것이 이니안이 로즈에게서 멀어질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였다. 그리고 어새신은 그 거리 밖에 있었다.

어새신이 이니안에게 다가오게 해야 했다. 그래서 단검을 날린 것이고, 마지막 남은 어새신을 도발했다. 하지만 여전히 주변에서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숨어 있는 어새신도 경험을 통해 아는 듯 숨어 있는 곳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이니안에게 발각된 것을 알고 있다. 이니안에게 단검이 한 자루만 더 있었어도 자신이 죽었을 것이란 것도. 그랬기에 움직일 수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이 자신이 죽는 순간일 것이기에.

그는 경험이 많은 어새신이었다. 이런 경우도 몇 번인가 있었다. 어마어마한 실력을 지닌 경호원을 대동한 목표의 암살. 이럴 경우는 인내력이 높은 쪽이 이긴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저 무시무시한 검은 머리의 용병이 움직이지 않는 것은 경호 대상으로부터 간격을 벌리지 않기 위해서임을. 그렇다면 그가 먼저 자신을 죽이려 움직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기다려야 했다. 그가 지치기를.

“똑똑한 녀석이군.”

이니안은 인정했다. 마지막 남은 어새신은 상황 판단이 빠르고 경험이 많음을. 그는 자신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은신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뭐, 장기전이라면 이쪽도 자신 있어.”

그렇게 중얼거린 이니안은 자신의 모포를 들고 몸을 일으켰다. 천천히 걸어 로즈의 바로 곁으로 다가간 이니안은 그곳에 모포를 깔고 모포 속으로 몸을 넣고는 눈을 감았다.

이곳이라면 어새신이 어디에서 접근하더라도 로즈에게 도달하기 전에 자신이 처리할 수 있을 테니까.

모포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얼굴을 차가운 바람이 할퀴고 지나간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니안은 잠에 빠져들었다.

불꽃 카드로 만든 마법 불꽃이 넘실거린다. 밤하늘에 달이 떠올라 사방을 은은히 밝힌다. 마치 정지한 듯한 장면. 불꽃의 넘실거림이 없다면 그림을 보는 듯 변화가 없는 고요한 풍경이다.

스스슥.

마침 불어오는 바람과 동시에 울린 낮은 소리. 바람 소리에 완벽히 묻혔기에 그 소리를 듣는다는 것은 설사 들개나 토끼같이 청력이 뛰어난 야생동물에게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꿈틀.

이니안은 몸을 완벽히 감싸고 있는 모포 안에서 몸을 뒤척였다. 그리고 그는 곧 눈을 천천히 떴다. 자다가 막 일어난 사람 같지 않은 맑은 눈. 그 눈은 한곳을 응시하고 있다.

‘빌어먹을 괴물 녀석.’

어새신은 당장에라도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욕을 억지로 꾹 눌렀다. 마침 불어오는 바람을 이용한 완벽한 이동이었다. 어떤 기척도 일지 않았음을 그는 자신할 수 있었다.

그의 어새신 인생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기척을 숨긴 것은 처음인 것 같았다. 그런데 그것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것도 모포 속에 누워서 자던 녀석이.

‘이대로는 해가 뜰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겠군.’

판단을 내렸으면 행동으로 옮겨야 한다. 어새신은 몸을 돌렸다.

“갔군.”

이니안은 부스스 모포에서 몸을 일으켰다. 다시 한 번 정신을 집중해 주변을 살폈지만 주변에서는 어떤 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것을 확인한 이니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어새신을 처리하기 위해 던졌던 단도를 회수했다.

어새신들의 시체는 깔끔하게 눈 속에 묻었다. 일부러 찾으려 해도 찾을 수 없을 만큼 깔끔한 뒤처리였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본 후 이니안은 자신의 모포로 몸을 돌렸다. 모포를 로즈의 바로 곁에 두었기에 자연 이니안은 다시 로즈의 곁으로 돌아왔다.

로즈는 머리끝까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단지 모포가 불룩 솟아 오른 것처럼만 보였다. 그 모습에 이니안은 살짝 웃었다. 입술만 살짝 휘어지는 가는 미소. 그것이 잠시 이니안의 입가에 떠올랐다 사라졌다.

“응?”

그때 모포 아래로 기이한 기운이 느껴졌다. 분명 로즈의 몸에서 풍겨져 나오는 기운이었다.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로즈를 이렇게 지켜본 적이 없었기에 처음 느끼는 기운이었다.

“대체 뭐지, 저 기운은?”

두 겹의 막으로 이루어진 것 같은 기운이 로즈의 전신을 덮고 있었다. 특히 머리 부분에 많은 기운이 몰려 있었다.

이질적인 기운이 온몸을 감싼 로즈.

“역시 알 수 없는 아이야.”

작게 중얼거린 이니안은 자신의 모포에 몸을 묻었다. 기이한 일이기는 했지만 자신이 그것까지 신경 쓸 수는 없었다.

사연이 많아 보이는 그녀였기에 그 기운도 로즈의 사연 중 하나라 생각한 것이다. 모포에 몸을 묻은 이니안은 천천히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몸은 모포 속에 있었지만 여전히 얼굴만은 모포 밖으로 나와 있었다. 케라우와 로즈가 머리끝까지 모포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눈꺼풀을 두드리는 밝은 빛. 눈꺼풀을 넘어서 눈동자에 전해지는 자극에 이니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동쪽 하늘에서 서서히 태양이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침인가?”

이니안은 모포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때 로즈가 자고 있던 모포가 꿈틀거렸다. 그러더니 로즈가 모포 밖으로 머리를 길게 빼내며 역시 상체를 일으켰다.

“아함∼ 잘 잤다.”

눈곱이 낀 눈을 비비며 주위를 둘러보는 그녀. 조금 먼저 일어나 상체를 일으키고 있던 이니안과 두 눈이 딱 마주쳤다.

“응?”

아직 잠이 덜 깬 것일까. 로즈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 그녀가 제정신을 차리는 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곧 그녀의 두 눈이 차갑게 식었으니까.

“오빠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요?”

그랬다. 이니안의 모포는 로즈의 모포 바로 옆에 딱 붙어 있었다. 지난밤 그 질긴 어새신 때문에 이곳으로 모포를 옮겼다가 그가 떠난 후 이니안은 그냥 그대로 잤다.

하지만 그러한 사정을 모른다면 지금 이니안의 위치는 정말 오해하기에 딱 좋았다.

이니안이 그의 모포 밖으로 터럭 하나 내밀지 않았다 해도. 로즈의 모포와 이니안의 모포는 닿은 적조차 없다고 해도.

로즈의 차가운 눈이 이니안의 대답을 재촉하고 있었다. 이니안은 그 눈을 마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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