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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10장. 차라리 그곳이 상대하기 더 편하다
전날 있었던 일과는 상관없이 다시 날이 밝았다. 점심과 저녁을 거른 이니안과 케라우, 로즈가 식당에서 마주 보고 앉았다.
단지 같이 한 테이블에 앉아 있을 뿐 서로 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정확히는 이니안과 로즈가 서로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고, 그 덕에 케라우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조용한 아침 식사가 끝나고 세 사람은 곧 짐을 챙겨 여관을 나섰다. 어쨌든 추적자들을 따돌리려면 이제는 떠나야 했다. 제법 큰 마을이지만 마시장(馬市場)은 없었다. 결국은 도보로 이동해야 했다.
‘하지만 그 녀석들도 우리를 쫓으려면 말을 버려야 했을 테니까.’
말을 타고 그 절벽을 내려올 수 있을 리 없다. 분명 말을 버리고 밧줄과 정을 이용해서 내려왔을 테니까. 한 마을에서 이틀을 자고 여유있게 걸어서 이동하는 것도 다 이니안이 계산한 범위 안이었다.
다만 전날의 일로 인해 분위기가 차갑게 가라앉았을 뿐이다. 하지만 크게 상관은 없었다. 어차피 로즈를 수도에 데려다주면 되는 거니까. 그게 자신이 로즈와 한 약속이었고, 자신이 맡은 의뢰니까. 거기까지만 하면 되는 일이다.
어제의 일은 기억 속에서 지우면 된다. 이니안 자신으로서도 찜찜한 기억이다.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자신 역시 어린아이를 죽인 것은 마음이 아팠다. 아무리 어새신이라 할지라도. 하지만 마음이 아픈 것으로 끝이다. 죽여야 했기에 죽였을 뿐이다.
이니안은 이미 그런 망설임으로 한번 커다란 상처를 입었다. 이제 겨우 그 상처가 아물려고 하고 있다. 이니안은 더 이상 같은 실수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때문에 그때 소녀의 가슴을 찌른 검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식당에서의 소동으로 미처 사지 못했던 몇몇 물건들을 사고 이니안은 미련 없이 마을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항상 이니안 옆이나 아니면 조금 뒤에서 따라가던 로즈가 오늘은 제법 거리를 두고 뒤에서 조심스레 따라간다. 케라우는 그런 로즈의 곁에서 걷고 있었다.
“이니안, 목적지가 어디지?”
“미오나인.”
이니안은 짤막하게 대답했다. 앞에 걷고 있는 이니안의 등이 불룩했다. 배낭을 메고 그 위에 로브를 걸쳐 로브가 솟아오른 것이다. 그것은 케라우 자신이나 로즈도 마찬가지였다. 앞으로 혹시 필요할지도 모르는 것들을 준비한 것이니까.
“멀리까지도 가는구만. 그래서 다음 목적지는?”
“다시 바운더리 산맥으로 들어간다.”
“뭐야?!”
이니안의 대답에 케라우는 무척이나 놀랐다. 기껏 산맥 밖으로 나왔는데 다시 그곳으로 들어간다니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대체 이 마을에는 왜 온 건데?”
“휴식을 위해서.”
이니안을 다시 한 번 짤막하게 대답하고는 산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물론 산맥을 빠져나온 곳과는 다른 곳이었다. 나왔던 곳으로 다시 들어간다면 자신들을 쫓고 있는 카르세온 일당과 마주칠 뿐이기에.
“물론 산맥에서 이동하는 것이 추적자를 따돌리기에는 좋아. 몸을 숨길 곳이 많으니까. 대신에 어새신들이 우리를 노릴 곳도 많다는 것쯤은 알고 있겠지?”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쯤은 자신도 알고 있다.
“그렇다면 왜 굳이 그곳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로즈 양을 지킬 자신이 있다는 거야?”
“차라리 그곳이 상대하기 더 편하다.”
이니안은 그것을 끝으로 더 이상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후 케라우가 무어라 더 투덜거리며 이니안에게 말을 걸었지만 이니안은 더 이상 반응하지 않고 꾸준히 발을 놀릴 뿐이었다. 로즈는 어제 그 일 이후 표정이 사라진 듯 무표정하게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아무리 어새신이라 하더라도 어린아이를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죽이는 이니안의 모습을 로즈로 하여금 그에게서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그래, 산속이 편해. 우리 이외에는 모두 적이라고 보면 되니까.’
이니안은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었다.
나뭇잎을 숨기려면 숲에 숨겨라.
너무나 당연한 말이고, 어느 정도의 지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상식이다. 그리고 이 상식을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이도 적지 않다.
지금 이니안의 상황에 그 말을 적용한다면 이들은 인적이 드문 산속으로 갈 것이 아니라 사람이 많은 성도(城都)로 가야 했다. 그곳에서 수많은 사람들 속에 묻혀야 했다. 이니안 역시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만일 자신들이 그저 카르세온 일당에게 쫓기기만 하는 것이라면 이니안은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로즈는 카르세온에게 쫓기는 것 외에 또 다른 무리의 표적이 되어 있었다. 그것도 어새신들을 보내 은밀히 목숨을 앗으려는 무리에게.
사람이 많은 곳이 물론 몸을 숨기기 좋은 곳이다. 평범한 이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면 되는 것이기에.
그것은 비단 이니안과 그 일행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었다. 어새신들 역시 사람들이 많은 곳이 몸을 숨기기 좋았다. 식당에서 그 소녀의 습격만 보더라도 명백한 사실이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섞이면 이니안은 그 수많은 사람들을 모두 경계해야 한다. 그들 중 어느 누가 숨어든 어새신인지 모르기에.
그것은 너무나 피곤한 일이다. 항상 신경을 곤두세우고 근처에 다가오는 모든 이들을 유심히 관찰해야 한다.
절대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을 쉬이 지치게 하고, 그 결과 육체 역시 지친다. 로즈를 지키며 이동해야 하는 이니안으로서 그것은 반드시 피해야 할 일이었다.
반면, 인적이 드문 산속은 어떤가? 주변의 야생동물, 벌레들이 낯선 이의 존재를 알려준다. 그리고 조용한 산속에서 자신들을 향해 다가오는 기척을 느끼는 것은 현재의 이니안에게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비록 그것이 어새신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현재 이니안의 기감은 그 정도로 예민해져 있었다.
산속에서는 낯선 기척만 조심하면 된다. 오히려 이니안으로서는 어새신들을 상대하기에 더 쉬운 곳이다.
‘빌어먹을.’
이니안은 요즘 들어 자신의 입에 욕이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산맥을 향해 이동하면서 다시 기억하고 싶지 않은 것을 떠올린 때문이다.
‘설마 그 인간의 조언대로 할 줄은…….’
“하하하, 이니안.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을 것 같아? 어새신들이 집중적으로 노리는 공주님, 그리고 경호 기사는 나 혼자. 정말이지, 어이없는 상황이었지.”
아마 일곱 살 때로 기억된다. 형은 그때 이미 왕국에서 촉망받는 기사였다. 열셋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를 이루었고, 그때 형의 나이 열아홉이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그런 형이 어느 날인가 온몸에 상처를 잔뜩 입고는 한껏 자랑스러운 얼굴로 자신에게 무언가를 떠벌렸다.
그래, 그때 형이 맡았던 일은 막 성년이 된 공주의 나들이 경호였을 것이다. 제법 먼 길을 떠난 여행이었고, 상당한 인원이 따라갔었으나 어새신들의 치밀한 공격에 결국 형 혼자만이 공주를 경호하게 된 상황이었다 한다.
“그러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이니안은 그때 자신이 알고 있는 상식대로 대답했다.
“틀렸어. 그러면 어새신 녀석들도 몸을 숨기기 쉬워지거든. 일반인들 사이에서 어새신을 찾아내는 것은 피를 말리는 일이야. 엄청 힘들다구. 그래서 난 숲 속으로 들어갔어. 이쪽이 노출되긴 하지만 나의 기민한 감각에 어새신들도 다 드러나게 되니까. 결과는 말 안 해도 알겠지? 푸하하하하!”
당연하다. 결과가 성공이었으니 그때 형이 내 앞에서 그렇게 마음껏 떠들 수 있었을 것이다.
“아, 이니안. 이 방법에는 주의할 점이 있어. 그만한 실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지. 지키는 자와 자신의 안전을 충분히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이. 그럼 난 이만 간다. 하하하!”
마지막에 터뜨린 형의 웃음이 아직도 귓가를 울리는 듯하다.
‘젠장.’
눈을 밟는 이니안의 발에 힘이 들어갔다. 머릿속에 떠오른 기분 나쁜 기억 때문이다.
이니안이 산속으로 방향을 잡은 것은 그것 이외에도 또 다른 이유가 있었다.
싫었다.
자신이 살인을 하는 모습을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것이 싫었다. 그때 식당에서 사람들에게 받았던 시선. 기분이 나빴다. 이니안은 그런 기분 나쁜 시선이 싫었다. 그래서 인적이 드문 곳으로 가는 것이기도 했다.
차타르 마을은 바운더리 산맥의 남쪽에 위치했다. 이니안은 협곡에서 벗어난 이후 정남쪽으로 이동을 해 바웬 마을을 지나쳐 차타르 마을에 도착했다.
차타르 마을을 나온 이후 얼마간은 서쪽을 향해 이동했다. 목적지인 수도가 차타르 마을의 서쪽에 위치해 있었으니 카르세온 일당을 피하기 위한 당연한 경로였다.
얼마나 그렇게 이동했을까? 이니안은 방향을 북쪽으로 돌렸다. 본격적으로 바운더리 산맥을 향해 이동하는 것이다.
***
형형한 안광이 빛나는 인물은 낭패한 기색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가죽으로 된 경갑을 입고 허리에 검을 찬 모습. 용병이라 생각하기에는 절도 있는 모습이다. 그렇다고 기사라고 생각하기에는 입고 있는 경갑이 거슬린다.
하지만 이내 조끼 형태로 상체에 입은 가죽 갑옷으로 가슴 부위의 문장을 보고는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기사로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검에 앉아 날개를 활짝 펼친 독수리. 하이 나이트의 상징이었다. 그는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내 그가 찾고자 하는 것을 찾은 듯했다.
그와 같은 복장의 사람들이 그와 비슷한 얼굴로 모여 앉아 있었다. 그들 역시 그를 발견했다. 그리고 그의 얼굴을 보고는 곧 고개를 내저었다.
“역시 너도냐, 마크?”
“후우, 그래.”
일행에게 다가간 사내 마크는 빈 의자에 몸을 걸터앉았다.
“이제 부단장만 오면 다 모이는군.”
“뭐, 부단장도 우리와 마찬가지일 거야. 내 생각이 짧았어.”
하론은 투덜거리며 테이블에 있는 물을 들이켰다. 주점에 여덟 명이 모여 앉아 물만 마시고 있는 모습은 분명 이상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들에게 무어라 하지는 않았다. 허리에 차고 있는 검이, 그리고 가슴에 있는 문장이 그들이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하론의 말에 마이어의 눈이 그를 향했다.
“쳇, 그 빌어먹을 용병 녀석이 상당히 똑똑하다라는 것을 계산에서 뺐단 말이다. 산맥 안에서도 추적하는 우리를 그렇게 애먹인 녀석이었는데 그걸 깜빡하다니. 후우.”
가슴이 답답해졌음인지 하론은 다시 물을 벌컥벌컥 들이켰다.
“네 말은 그럼 그 녀석이 이 마을에 없을 거다 이거냐?”
“쳇, 네놈도 머리 좀 굴리는 게 어때? 머리가 안 돌아가는 녀석이면 말도 안 해. 생각하는 게 귀찮다고 그 좋은 머리를 그냥 냅두냐?”
이니안을 놓친 것에 대한 짜증 때문일까. 마이어를 향한 하론의 말은 그다지 호의적이지 않았다.
하론은 알고 있었다. 마이어가 결코 단순무식하기만 한 기사가 아니라는 것을. 단순무식한 돌격형 기사라면 마이어가 추적술에서 그렇게 뛰어난 모습을 보일 리 없다. 그렇다. 그는 단지 생각하는 것이 귀찮아서 다른 사람들에게 머리 쓰는 일을 떠넘기는 것뿐이었다.
그는 다만 추적에 있어서는 적극적으로 변했다. 사냥이란 그가 가장 즐기는 취미였으니까.
이니안에게 죽은 나르트는 그와 가장 친한 동료였다. 기사단의 일이 없을 때 그와 함께 사냥에 나서는 것은 그의 삶에 있어 가장 큰 즐거움 중 하나였으니. 그래서 나르트의 시신을 봤을 때 그가 가장 흥분한 것이기도 했다.
하론은 그가 지금까지 그래왔기에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오늘은 이니안에게 한 방 먹은 덕에 평소에는 그냥 무심히 지나치던 일에 시비를 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