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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성명이 어떻게 되죠?”
“로즈요.”
“네, 로즈 씨. 출신은요?”
“미오나인 제국. 타다나인 영지의 펄마스 마을입니다.”
“네, 됐습니다. 여기 신분 보증서입니다. 아, 그리고 길드에서 신분 보증서를 발급한 이상 두 분의 계약에 대한 계약서가 필요한데요. 이곳에 기입해 주시겠어요?”
여직원이 내민 종이를 받아 든 이니안은 익숙한 솜씨로 계약서의 빈칸을 채워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계약서의 한 귀퉁이에 서명을 한 후 로즈에게 내밀었다.
“네?”
“서명.”
“아.”
이니안의 말에 그제야 자신이 할 일을 깨달은 로즈는 이니안의 서명 밑에 자신의 서명을 했다.
“네, 이것으로 절차는 끝났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 전에 테스트를 받으러 가신 일행 분을 기다리실 거죠? 그럼 저기 의자에 앉아서 기다려 주십시오.”
여직원은 친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숙였다.
‘이곳, 마음에 드는군.’
용병 길드는 자고로 거친 용병들이 많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랬기에 입구에 있는 안내대의 직원들도 거칠기 마련인데 이곳은 아주 친절했다. 물론 수도의 용병 길드 역시 친절하기는 하지만 변방의 길드 지소에서는 보기 힘든 모습이었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케라우가 만족한 웃음을 지으며 조금 전 걸어 들어갔던 곳에서 모습을 나타냈다.
“케라우님, 이곳으로 와주십시오.”
예의 그 여직원의 부름에 케라우는 안내대로 걸음을 옮겼다.
“테스트 결과 A급 용병 판정이 나왔습니다. 그럼 여기 케라우 드로 라토시스 님의 용병 증명패입니다. 그리고 용병 신규 등록비와 증명패 발급비 모두 해서 5골드입니다.”
돈 이야기가 나오자 케라우의 시선이 이니안을 향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지금 그는 가진 돈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18골드.”
그 말과 함께 이니안은 1골드짜리 금화 다섯 개를 케라우에게 던졌다. 사방으로 흩어져 어지럽게 날아오는 동전이건만 케라우는 능숙한 손길로 깔끔하게 다섯 개의 동전을 잡아 안내대의 여직원에게 건넸다.
“우와! 과연 A급 용병다우신 모습이네요.”
여직원의 칭찬에 슬쩍 미소를 지어준 케라우는 자신의 용병 증명패를 가지고 몸을 돌렸다. 어느새 이니안은 길드의 문을 열고 밖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그럼 오늘 하루 더 쉬고 내일 아침에 떠나는 건가?”
용병 길드를 나서서 걸음을 옮기며 케라우가 물었다. 이니안은 대답을 고개를 끄덕이는 걸로 대신했다. 하루 더 마을에서 쉰다는 말에 로즈의 얼굴이 살짝 밝아졌다. 하지만 곧 어두운 기색이 내려앉았다.
“정말 내일 가는 거예요? 그렇게 이 마을에 오래 머물러도 되는 거예요?”
“괜찮다.”
걱정스러운 로즈의 물음에 이니안이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그리곤 곧 마을 중심부의 잡화점 이곳저곳을 들락거리면서 여행 준비를 했다. 정확히는 도주 준비이지만.
“벌써 점심때가 지난 것 같은데요?”
아침을 일찍 먹고 여관을 나섰지만 용병 길드에 들르고 이것저것 하다 보니 시간이 많이 지체되었다. 해가 짧은 겨울이었기에 이미 태양은 상당히 낮은 곳으로 내려와 있었다. 로즈의 말에 그제야 시간의 흐름을 깨달은 이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이니안의 말에 로즈의 얼굴이 활짝 밝아졌다. 그 짧은 대답은 이제 식사를 하러 가겠다는 의미였으니까. 이니안의 뒤를 따라가는 로즈의 발걸음이 가벼워졌다는 것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될 일이다.
인간과는 영양을 섭취하는 방법에 다른 케라우는 별달리 식당으로 갈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다만 그가 따라다니는 이니안과 로즈가 이제 식당으로 향하니 그 뒤를 따를 뿐이었다.
여관까지의 거리도 제법 있었고 아직 사야 할 물품도 남았기에 세 사람은 근처의 가까운 식당으로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얼굴에 주근깨가 가득한 소년이 밝게 웃으며 세 사람을 맞이했다.
“세 분이신가요?”
소년의 물음에 이니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곳으로 오세요. 마침 창가에 좋은 자리가 있어요.”
쾌활한 모습으로 세 사람을 자리에 안내한 후 물잔을 테이블에 올려놓은 소년은 메뉴 판을 내밀었다. 냉큼 메뉴 판을 받아 펼쳐 든 이는 로즈였다.
“로즈, 지금까지 네가 쓴 돈은 1골드 32실버다.”
메뉴를 살피는 로즈에게 이니안이 무심히 말했다. 그 액수는 새로 산 옷값과 전날의 식사와 여관비의 합이었다. 그의 말에 가장 놀란 이는 케라우였다. 이니안의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기에. 자신이 어제, 오늘 이틀간 얼마나 당했던가!
‘설마 저 인간이…….’
“오빠, 너무 빡빡한 것 아니에요? 누구 씨가 갑자기 안아 들고 뛰쳐나가는 바람에 달랑 옷 한 벌만 남은 숙녀에게 말이죠.”
로즈 그녀도 이니안이 하는 말의 의미를 알았다. 그녀 자신이 먼저 시작한 일이니까.
“이렇게 하자고 한 건 너였다.”
하지만 그런 투덜거림은 이니안에게 통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오전에 용병 길드에서 쓴 계약서의 의뢰비 기입란에 있는 그대로 ‘빵 두 조각과 차가운 우유 한 병’이라고 썼겠는가. 물론 그 여직원이 그 부분은 제대로 살피지 않아 별다른 일 없이 넘어갔지만 말이다.
길드를 통하지 않고 개인 대 개인으로 이루어진 계약에 대해서는 길드에서 별다른 간섭을 하지 않는다. 물론 길드에 중개료를 내지 않아도 된다. 길드에서 그런 경우의 계약서를 요구하는 경우는 길드에 신고를 했을 때가 유일하다.
이니안의 경우는 로즈의 신분 보증서가 필요했기에 그것을 제출했고, 길드의 입장에서는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해 계약 관계에 대한 증거 자료로 계약서를 요구한 것이다.
즉, 그들 입장에서는 이니안과 로즈 사이에 합의된 의뢰비와 하등 상관이 없는 부분이었기에 여직원이 대충 넘긴 것이다.
“하지만 말이에요, 가진 거 하나 없이 몸뚱이 하나 있는 연약한 숙녀가 무슨 수로 그런 돈을 지불 하냐고요.”
로즈의 목소리가 처연하게 가라앉았다. 눈가에 조금씩 습기가 어리기 시작한다. 보는 이가 절로 동정심이 일 듯한 얼굴이다. 가만히 그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던 주근깨 소년이 눈가의 눈물을 훔칠 정도로.
로즈의 모습은 완벽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과 속눈썹, 눈가에 살짝 어린 물방울, 살짝 아래로 내리깐 눈, 발갛게 물든 뺨과 처연한 눈빛, 살짝 들썩이는 어깨까지…….
결코 불쌍해 보이지 않으나 애절한 모습.
저절로 마음이 일어 행동으로 옮기게 만드는 모습이다.
정말이지, 완벽하게 상대의 동점심에 호소하는 모습의 표본이었다. 이러한 모습에도 도와주지 않는다면 그는 그야말로 피가 얼음으로 되어 있고 가죽은 철판으로 된 인간이리라.
하지만 그런 인간 같지도 않은 인간은 분명 존재했다. 수많은 인간 군상 중 어찌 그런 인간이 없겠는가.
한데 그 인간이 지금 눈앞에 앉아 있는 인간이라는 것이 중요했다. 정말이지, 이니안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그저 로즈를 무심히 바라볼 뿐.
“빌려주지. 단 목적지에 도착하면 갚아라.”
냉정했다. 차가웠다.
“흑.”
그 말에 신음을 흘린 것은 로즈가 아니라 여태껏 그 모든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소년이었다.
“뭐지?”
그 소리에 이니안의 차가운 눈길이 소년을 향했다.
“저… 주문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그제야 자신의 일을 상기한 소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의 말에 계속해서 이니안을 쏘아보던 로즈는 시선을 메뉴 판으로 돌렸다. 어쨌든 배가 고픈 것이 현실이었고 그 허기를 잠재워야 했기에.
물론 속으로 이니안에게 있는 욕, 없는 욕 몽땅 끌어다 퍼부었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매정한 인간.”
메뉴 판을 넘기는 가운데 조용히 새어 나온 목소리. 그것을 끝으로 로즈는 메뉴 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이러자고 한 건 너였다.”
조금 전에 했던 말을 반복하는 무뚝뚝하면서도 차가운 이니안의 목소리.
“흥, 속은 좁아 터졌어요. 아직도 그 일을 기억해서는 이렇게 연약한 숙녀를 괴롭히고.”
메뉴 판으로 이니안의 시선을 가리자 없던 자신감이 솟았음인가. 로즈가 가시 돋친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파직.
이니안이 반응을 보였다.
‘저 녀석, 속이 좁긴 좁은 모양이군. 분명 ‘속 좁은’에서 반응을 보였어.’
케라우는 두 사람의 모습을 계속 관찰하고 있었기에 그 변화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여기 치킨 샐러드, 오믈렛, 그리고 빵, 이렇게 가져다줘요.”
이니안의 변화를 감지했음인가? 로즈는 얼른 주문을 마치고 메뉴 판을 소년에게 주고는 고개를 돌려 딴청을 피웠다. 창밖으로 언뜻 보이는 하늘을 계속해서 바라보는 로즈.
그 모습에 이니안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그저 이마에 힘줄이 불끈 솟은 상태로 로즈를 노려볼 뿐이었다.
‘흐음, 저 얼음탱이를 반응하게 만들려면 속이 좁다고 하면 되는군. 아, 그리고 신참도 있었지?’
이니안은 모르고 있었다. 케라우가 자신을 바라보면서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고 있음을.
속 좁은 녀석.
이니안이 가장 듣기 싫어하는 세 가지 말 중 하나였다. 그 세 가지는 ‘신참’, ‘속이 좁다’, ‘약한 녀석’이다. 이 세 가지 말 모두 그의 형이 그를 놀릴 때 쓰는 말이었기에.
이니안에게 있어 형은 언제나 넘어서야 할 벽이었고, 넘어설 수 없는 한계였다. 그랬기에 형과 관련이 있는 것들은 콤플렉스가 되어 그의 가슴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었다.
끼익.
“할머니! 할머니!”
그때 식당 문이 열리면서 머리카락을 양 갈래로 길게 땋아 내린 붉은 머리의 소녀가 들어왔다. 나이는 이제 열두 살 정도 되었을까? 커다란 눈망울이 무척이나 맑은 예쁜 아이였다.
“할머니! 할머니!”
그 아이는 연신 할머니를 부르며 식당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였기에 때 아닌 소란에도 무어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제법 큰 마을이라고는 하나 마을은 마을이다. 이 식당을 주로 이용하는 사람은 이 일대의 사람들. 대강 서로 간에 안면은 있는 사이다.
그런데 저 소녀는 이 식당에서 처음 온 듯했다. 즉, 이 마을 아이라면 제법 멀리 떨어진 곳에 사는 아이이거나, 아니면 여행 중인 가족의 아이일 것이다. 그렇게 보이는 아이가 할머니를 잃어 그 할머니를 찾아 돌아다니는 것이다. 누가 그 아이에게 무어라 하겠는가.
“얘야.”
소녀가 막 지나치던 테이블에 앉아 있던 텁석부리의 장한이 소녀를 불러 세웠다.
“예? 아저씨, 혹시 우리 할머니 보셨어요? 백발을 양 갈래로 땋으시고 커다란 목걸이를 하셨어요.”
소녀의 기대에 찬 물음에 장한의 얼굴에 안타까움이 스쳐 지나갔다.
“으음, 그런 할머니는 보지 못했는데… 그런데 넌 어디에서 왔니?”
“저요? 으음, 이 마을의 북동쪽 끝이요.”
북동쪽이면 이 마을에서 가장 못사는 이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그러고 보니 소녀의 옷이 허름하기 짝이 없었다.
“저런, 그런데 어찌 혼자 여기에 있는 거니?”
“할머니가 오늘 약초를 팔러 온다고 하셨어요. 마을 밖의 들에서 자라는 약초를 그동안 모아왔는데 이제 많이 모였대요. 그걸 팔아서 아이라에게 예쁜 옷을 사준다고 했어요.”
소녀는 해맑게 웃으며 말했다.
“네 이름이 아이라니?”
소녀의 말에서 이름을 알게 된 장한이 다정한 눈빛으로 물었다.
“네, 아이라에요.”
“그래, 아이라. 이곳에서 아저씨와 함께 식사를 하지 않겠니? 배가 고파 보이는데 말이야.”
장한이 웃으며 말하자 소녀 아이라는 망설였다. 그 모양새를 보아 배가 고픈 것이 분명했다. 아이라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도리질을 쳤다.
“안 돼요. 아이라는 할머니를 찾아야 해요.”
아이의 것이라 볼 수 없는 단호함이 아이라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그래, 그렇다면 아쉽구나. 빨리 할머니를 찾으렴. 그런데 이 식당에는 안 계신 것 같구나.”
장한은 안타까운 얼굴로 이야기했다. 정말이지, 아이라는 보는 누구라도 당장 꼭 껴안아주고 싶을 만큼 귀엽고 예뻤다. 그러니 장한은 아이라가 식사를 거절하자 안타까워하는 것이다.
보아하니 배가 고픈 것 같은데 식사를 거절하고 할머니를 찾겠다니. 그 모습은 기특하기보다는 안타까웠다.
“네.”
장한의 말에 아이라는 방긋 웃고는 다시 식당 안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침대에 누운 이니안의 입에서 욕설이 흘러나왔다. 눈을 가린 팔 사이로 두 줄기의 액체가 흘러내린다. 그의 목소리는 젖어 있었다.
이니안은 온몸의 힘이 쫙 빠졌다. 자신이 이토록 약하다는 사실에.
그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약하기에 어린아이를 죽일 수밖에 없는 현실에. 스스로의 약함을 경멸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이니안은 믿었다. 스스로의 결정은 그 상황에서 최선이었음을 믿었다.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 아직 너의 검은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을 정도가 아닌 모양이구나.”
집을 뛰쳐나오기 전에 마지막으로 아버지를 봤을 때 들었던 말이 머리에 울렸다. 자신이 오늘 로즈에게 한 말도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그때 자신은 저 말에 얼마나 분노했던가.
로즈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아마도 분노에 몸을 떨고 있겠지.
“젠장…….”
그걸 끝으로 이니안은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