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9장. 난 절대 잔인한 게 아니야
검은빛의 눈동자와 은빛의 눈동자가 허공에서 어우러졌다. 둘 모두 라칼트 대륙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신비로운 색의 눈동자다. 그 두 눈이 복잡하게 얽혀 서로를 바라본다.
“그만 말해주는 것이 어떨까, 내가 보고 있는 것들이 뭔지?”
“흐음, 어쩔까나?”
흑안사내의 말에 은안사내가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다. 그에 따라 흑안에 서서히 살기가 차오른다. 그를 본 은안의 사내 얼굴에 땀이 차올랐다.
“하하하, 이니안. 왜 그래,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이니안이 온몸에서 살기를 조금씩 피워 올리자 은안의 사내 케라우는 어색하게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내가 지금 듣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이 아닌데?”
이니안은 마나를 오른손에 집중했다. 그러자 오른손 주변의 대기가 넘실거리면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케라우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잔뜩 모여드는 어둠의 힘.
“그, 그러니까 말이야, 지금 네 주위를 돌고 있다는 그 희끄무레한 것들은 말이지…….”
이니안은 눈으로 케라우의 말을 재촉했다. 물론 오른손을 살짝 들어 보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이지만 케라우라는 녀석은 이렇게 강하게 나가지 않으면 이리저리 사람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그리고 이니안은 그런 것은 질색이었다.
“인간들이 흔히 말하는 유령이라고. 유령이란 것이 원래 죽은 이의 강한 사념에 의해서 어둠의 힘이 모이고 그곳에 영혼이 자리하는 것이지. 영혼이란 본디 육체를 벗어나면 이 세상에 머물지 못하고 죽은 이의 세계로 가야 해. 그런데 이 세상에 미련이나 집착이 강하면 그것들이 죽은 이의 주변으로 어둠의 힘을 불러들이고 육체를 벗어난 영혼은 바로 그 어둠의 힘 속으로 들어가. 그러면 비록 영혼이라 할지라도 이 세상에 머물 수 있지. 그리고 인간들은 그것을 유령이라고 부르는 거야.”
오른손을 조금씩 들어 올릴 때마다 케라우의 말이 점점 빨라지더니 결국 저 긴 이야기를 숨 한 번 안 쉬고 쏟아냈다.
“진작 그렇게 말했으면 좋았을 것을.”
이니안은 오른손에 모은 마나를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더 이상 케라우에게 볼 일 없다는 듯 몸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올라갔다.
“젠장,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라고. 무슨 장난 좀 치려고 할라 치면 저리 살벌하게 변하다니. 얼음탱이 같으니라고.”
케라우는 이니안의 모습이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속에 가득 쌓아놓은 불평을 욕설과 함께 쏟아냈다. 물론 이니안의 예민한 청각이 그것을 듣지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이니안은 굳이 그런 것까지는 신경 쓰지 않았다. 케라우가 자신에게 무어라 하든 자신은 자신의 일만 제대로 수행할 수 있으면 그만이었다.
‘유령이라…….’
자신의 방에 돌아와 침대 위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이니안은 여전히 이곳저곳에 둥둥 떠다니는 희끄무레한 것을 보며 생각에 잠겼다.
“결국 유령이란 존재는 마이너스 마나로 이루어졌다는 말이로군. 케라우 녀석이 어둠의 힘이라고 부르는 것이 마이너스 마나의 일종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야.”
생각지도 못한 효과였다. 마령천참공을 수련하면서 마이너스 마나를 몸 안에 축적함에 따라 마이너스 마나로 이루어진 유령을 볼 수 있게 되다니.
“그럼 내가 케라우를 보고서 인간이 아니라 뱀파이어라는 것을 안 것도 그놈이 가진 마이너스 마나 때문이겠군. 그리고 그놈이 뱀파이어의 성향을 강하게 띠면 띨수록 그 마이너스 마나가 강해져서 나도 모르게 그 변화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고.”
그간 이니안이 느낀 미심쩍었던 의문들이 실타래 풀리듯 하나하나 풀려 나갔다.
이니안은 지금까지 마이너스 마나를 사용하는 사람은 자신뿐일 거라 생각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의 지식 한도 내에서는 이 세상에 마이너스 마나라는 개념이 없었으니까.
마이너스 마나라는 것도 이니안 자신이 이곳 라칼트 대륙어로 이니안 자신이 붙인 이름이다. 단지 마령천참공의 책에는 어느 세계의 것인지 알 수 없는 고서의 문자에 ‘음기’, ‘사기’라고 적혀 있었을 뿐이니까.
한데 케라우가 자신에게 유령에 관해 설명할 때 어둠의 힘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그것이 아마 이니안 자신이 알고 있는 마이너스 마나와 비슷한 힘이리라.
“하지만 나는 케라우가 힘을 사용할 때 그것이 마이너스 마나라는 것을 알아보지 못했다. 마이너스 마나라면 절대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 결국 케라우가 말하는 어둠의 힘이란 마이너스 마나와 유사하지만 다른 힘이라는 말이군.”
케라우가 자신을 따라 날아올 때, 그리고 자신과 전투를 벌일 때, 케라우가 흡혈을 위한 모습으로 변이를 일으킬 때 이니안은 케라우에게서 어떤 기운의 흐름은 느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마이너스 마나라고 느끼지는 못했다. 결국 케라우의 어둠의 힘과 이니안의 마이너스 마나는 같으면서도 다르다는 것이다.
“뭐, 그건 상관없지. 어차피 그 녀석 사정이니. 그것보다는 처음 마령천참공을 익혔을 때 보지 못했던 것을 내가 지금 볼 수 있다는 것은 결국은 성취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라는 것이겠지?”
이니안은 여전히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기운 덩어리들을 바라보았다. 무언가를 자신에게 말하고 싶어하는 듯 자신의 주위를 이리저리 왔다 갔다 하는 기운 덩어리들.
이것들이 유령이라는 것을 알지 못할 때는 무척이나 기이하다 생각했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이들은 자신이 볼 수 있다는 것을 느끼는 듯했다. 처음에는 자신에게 무관심하다가 자신이 그 기운들에 반응을 하자 그들은 자신에게로 몰려들었으니까. 틀림없이 자신에게 바라는 것이 있기에 몰려드는 것이다. 그들을 볼 수 있는 인간이었기에.
“뭐, 그것도 이 녀석들 사정일 테지.”
이니안은 곧 가부좌를 풀고 이불 속에 몸을 묻었다.
케라우의 설명에 따르면 유령이란 이 세상에 미련이나 한이 남은 사람들의 영혼이 어둠의 힘을 끌어 모은 것.
결국 그 미련과 한을 풀고 싶어할 것이고, 그들을 볼 수 있는 이니안 자신에게 매달리려 한다는 것은 보지 않아도 뻔했다. 하지만 그건 그들의 사정. 이니안이 굳이 피곤하게 관여할 일이 아닌 것이다.
마령천참심법의 성취가 사성에 오르면서 이들이 보이기 시작했으니 아마 앞으로 성취가 더 오르면 더욱 뚜렷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피곤해지리라.
“젠장, 귀찮은 것은 딱 질색인데…….”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이니안은 이 한마디를 남기고는 곧 잠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다음날 아침.
모처럼 맞는 상쾌한 아침이다. 급박한 도주와 노숙으로 쌓인 피로가 어디 하룻밤으로 사라질까마는 그래도 얼마만의 편안한 잠자리였던가. 케라우의 얼굴도 로즈의 얼굴도 무척이나 밝았다. 푹 쉬었다는 증거가 곳곳에 남아 있었다.
이니안 역시 푹 쉬었다. 그래서 기분 좋게 일어났다. 그 좋던 기분을 곧 잡쳤지만.
“후우… 어떻게…….”
이니안은 자신의 앞에 놓인 수프를 먹는 둥 마는 둥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크크크크.”
케라우는 알 것 같다는 얼굴로 웃으며 차를 마시고 있었다. 뱀파이어인 그에게 인간의 음식은 별다른 영양분이 되지 않는다. 다만 그 맛은 느낄 수 있어 가끔 먹기는 하지만 케라우는 음식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대신 차와 술을 즐겼다.
“왜 그래요?”
로즈가 두 사람을 번갈아 보다가 물었다. 한 명은 한숨을 쉬고 있고 다른 한 명은 키득거리며 웃고 있으니 그녀로서는 궁금할 수밖에.
“이니안 저 얼음탱이 녀석, 사람들이 못 보는 것을 보거든. 크크크크.”
파각.
케라우가 즐겁다는 듯 웃으며 로즈에게 대답을 하는 순간 테이블의 모서리가 부러져 나갔다. 부러진 조각은 이니안의 왼손에 들려 있었다.
“네놈, 알고 있었군.”
화가 가득한 목소리.
“당연히 알고 있지. 나 역시 그것들과 사용하는 힘이 같은걸.”
“그런데…….”
“그야 내가 말해주기 전에 네가 먼저 들을 거 다 들었다고 올라갔잖아.”
이니안이 무어라 하려 할 때 케라우가 먼저 그 말을 잘랐다.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더 하게 놔두면 분명 또 살기를 풀풀 풍기면서 자신을 위협할 테니.
케라우는 이니안을 말로써 이기려면 기선 제압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지 않으면 당장에 살기를 피워 올리는 녀석이니. 살기를 피워 올릴 틈을 주면 안 되었다.
“너, 그놈들이 밤에만 보일 줄 알았지? 그거야 어쩌다가 어둠의 기운에 예민한 인간들의 경우지. 유령은 낮이나 밤이나 그 자리에 존재한다고. 다만 밤에는 어둠의 힘이 강해지기에 더 강한 힘을 가지고 그것을 어둠의 기운에 조금 더 민감한 인간들이 간혹 보는 거라고.”
기선 제압. 그것이 중요했기에 케라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사실을 쏟아냈다. 이니안이 찍소리도 못하게 하기 위해서. 과연 이니안은 얼떨떨한 얼굴로 케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후훗, 이 얼음탱이도 이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군.’
케라우가 본 이니안의 얼굴은 대부분 차갑게 굳어 있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이제야 인간다운 표정을 짓게 만드니 그 쾌감이란…….
“우와! 이니안 오빠! 유령을 볼 수 있어요?”
두 사람의 대화를 재미있게 바라보던 로즈가 놀랍다는 듯 끼어들었다.
“대단하다. 유령은 어떻게 생겼어요? 말로만 들었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로즈는 정말로 궁금하다는 눈으로 이니안을 보며 물었다.
“대단할 것 없다. 귀찮을 뿐인 것을.”
그 대답을 하는 순간에도 이니안의 눈앞에 희끄무레한 기운 덩어리가 자리했다. 그 덕에 이니안의 시야가 희뿌옇게 변했다. 유령을 통해서 그 건너편의 모습을 보기에.
“젠장.”
갑작스러운 이니안의 욕설에 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의 모습에서 그 욕설의 대상이 자신과 케라우가 아니라는 것을 안 까닭이다.
“큭큭큭, 그냥 적응하라구.”
이니안의 당황한 모습이, 짜증 어린 모습이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던 케라우가 예의 그 기분 나쁜 웃음과 함께 말했다.
“네놈은 어떻게 평소에는 이 귀찮은 것들을 안 볼 수 있지?”
“그야 평소에는 눈에 어둠의 힘을 보내지 않으니까. 사실 꽤 귀찮다고, 이 징그러운 녀석들을 보고 있는 것은. 특히 상대가 자신들을 볼 수 있다는 것을 알면 얼마나 징하게 달라붙는데.”
케라우는 넌덜머리가 난다는 듯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말했다.
“뭐, 그래도 계속해서 보면 익숙해지겠지. 넌 나랑 달리 얼음탱이니까. 케케케.”
이니안이 곤란한 상황에 빠진 것이 무에 그리 즐거운지 케라우는 계속해서 이니안을 놀려대며 웃었다. 다만 이니안이 살기를 발하면 즉시 몸을 피할 준비를 하고서 말이다.
“못됐어요.”
두 사람의 대화에서 로즈는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 대강 추측할 수 있었다. 그녀의 머리는 그리 나쁘지 않았다. 다만 경험이 부족할 뿐.
“이런, 로즈 양. 절대 제가 못된 것이 아닙니다. 로즈 양도 보셨잖습니까, 저 녀석의 평소 행동을. 전부 인과응보입니다. 신이 저런 녀석을 그냥 둘 리 없죠. 저런 얼음탱이를 말입니다.”
로즈의 말에 케라우는 얼른 진지한 표정을 하고는 정중히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 얼굴이 이니안을 향하는 순간 금세 웃음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물론 그것은 상대를 놀려먹고 쾌감을 느낄 때 나오는 그런 웃음이었다.
“훗, 고맙군.”
이니안은 그런 케라우의 얼굴을 마주 보며 피식 웃었다. 가소롭다는 듯.
그 웃음을 보는 순간 케라우의 얼굴이 팍 일그러졌다.
“너, 설마?”
“네 녀석이 그렇게 쉽게 방법을 가르쳐 줄 줄은 몰랐어. 뭐, 나도 조금만 생각해 보았다면 알 수 있는 방법이지만 내가 거기까지 차분히 생각을 하기에는 지금까지 너무 짜증에 차 있었거든. 원래 마음이 안정이 안 되면 머리도 안 돌아가는 법이니까.”
이니안의 얼굴에는 여유로운 웃음이 맺혀 있었다.
“설마 몸에 흐르는 기운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단 거냐?”
케라우는 벌떡 일어나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으로 이니안을 가리키며 말했다.
“후우, 좋군. 세상이 이렇게 맑고 깨끗한 줄은 몰랐어.”
지금까지 케라우에게 당한 것에 대한 보복일까? 차가운 얼굴로 좀처럼 농담이란 것을 하지 않는 이니안이 케라우를 놀리듯 딴소리를 늘어놓는다.
“빌어먹을 괴물 얼음탱이 같으니…….”
하지만 이니안은 그런 케라우를 무시한 채 묵묵히 식사에 열중했다. 정신을 어지럽히던 존재들도 사라졌으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 것이다. 이니안은 이제야 자신의 입으로 들어가는 수프의 맛을 느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