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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가디언이라는 게 뭐지?”
조금 여유가 생긴 이니안이 케라우가 케이로스에게 했던 말을 떠올리며 물었다. 그때 케라우는 케이로스의 정체에 대해 어느 정도 짐작한 듯했다.
“가디언? 말뜻 그대로야. 지킴이지.”
가디언의 말뜻이 지킴이라는 것은 알았다. 가문의 업이었으니까. 이니안의 가문 사람들은 대대로 가드 나이트, 또는 가디언이라 불리는 지킴이 기사였다. 물론 현재 이니안의 아버지와 형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
이니안의 반응에 케라우가 히죽 웃었다.
“지킴이기는 한데 지키는 대상이 좀 특별하지. 사실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을 지키거든.”
“그게 뭐지?”
“드래곤.”
케라우는 와인을 목구멍으로 넘기며 짧게 대답했다. 그 대답을 할 때 그의 얼굴에 음산한 기운이 어렸다. 단지 입 밖에 내는 것만으로도 긴장하게 하는 이름, 드래곤.
인간들이 여러 이종족과 함께 모여 사는 대륙 라칼트.
라칼트 대륙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가 바로 드래곤이다. 한 번의 숨결로 한 도시를 먼지로 만들어 버리고 모든 마법을 완벽하게 사용하며 그 수명이 일만 년에 이른다는 종족.
인간의 입장에서는 도무지 생물이라 부를 수 없는 절대적인 존재.
그것이 드래곤이다.
그렇기에 케라우는 가디언이 지킬 필요가 없는 것을 지킨다고 한 것이다.
“으음, 드래곤이라…….”
이니안은 침음을 삼켰다. 그렇다면 자신들은 드래곤의 레어 바로 입구까지 갔던 것이다.
이니안은 드래곤의 존재를 믿지 않았다. 단지 허풍 떨기 좋아하는 마법사들이 지어낸 이야기라 생각했다.
드래곤이 존재한다는 수많은 증거가 있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 존재를 믿었지만 이니안만큼은 믿지 않았다. 자신의 상식으로는 너무나 터무니없는 이야기였기에 두 눈으로 직접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겠다고 결심했던 것이다.
“드래곤들은 그 능력 때문인지, 커다란 덩치 때문인지 움직이는 것을 무척 귀찮아 해. 일단 호기심이나 재미를 느낀 것에 대해서는 무서울 정도의 관심과 집착을 보이지만 말이야. 그래서 일일이 집 밖으로 나오기 귀찮으니까 집 지키라고 세워둔 개와 같은 존재가 가디언이지.”
‘집을 지키는 개의 능력이 그 정도라…….’
이니안은 잠시 케이로스의 그 강대한 힘을 다시 떠올려 보았다.
‘어쩌면 드래곤에 관한 이야기가 모두 사실일지도 모르겠군.’
케이로스와의 만남으로 이니안은 조금은 드래곤의 존재를 믿게 되었다.
‘그런데 드래곤의 가디언이 왜 로즈에게는 친근하게 굴었을까?’
처음 보았을 때부터 궁금하게 여기던 일이다. 하지만 알 수 없는 일이었고 크게 문제될 것이 없었기에 머리에서 지웠었다. 한데 케이로스가 드래곤의 가디언이라는 이야기를 듣자 다시 그 의문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뭐, 어찌 되었든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니까.’
세차게 머리를 흔들어 잡념을 떨쳐 낸 이니안은 몸을 일으켰다.
“응? 올라가려고? 잘 자라구. 난 이곳에서 좀 더 있다가 올라가야겠어. 150년 만에 와인을 마시니 좀처럼 놓을 수가 없군.”
어느새 테이블 위에는 와인 병이 두 개가 텅 비어 있었다. 그것도 이 식당에서 가장 비싼 것으로. 이니안은 그 와인 병을 힐끗 쳐다봤다.
한 병에 무려 1골드나 하는 와인이었다. 평범한 4인 가족의 한 달 생활비가 10골드인 것을 감안하면 절대 싼 가격이 아니었다.
“잊지 마라. 빌려주는 거다. 네놈이 쓸 건 네놈이 마련해.”
그 말을 끝으로 이니안은 이층으로 올라갔다.
“쳇, 녀석. 빡빡하기는.”
케라우는 알지 못했다, 그 빡빡함은 원래 로즈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여관방은 단출했다. 작은 테이블 하나와 창문, 그리고 그 곁의 침대와 작은 옷장과 서랍장, 그것이 전부였다. 방으로 들어온 이니안은 바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았다.
현재 마나 스피어의 마나가 완전히 바닥나 있었기에 마나를 보충하기 위해서 운공을 시작했다.
‘하긴, 내가 너무 마음을 놓고 있는 것인가? 지금 카르세온 그 자식을 만나면 꼼짝도 못하고 당할 테니.’
이 마을에 도착하는 순간 마나 스피어가 텅 비어버렸다. 서둘러 운공을 해 마나를 보충해야 했지만 당분간은 큰일이 없을 거란 생각에 잠시 여유를 가졌다. 함께 있는 로즈와 케라우가 걸리기도 했고, 무엇보다 마을 안에서 운공을 할 만한 적당한 장소도 없었다.
그래서 이제야 운공을 시작하는 것이다.
눈을 감고 이니안은 호흡을 깊고 느리게 했다. 호흡에 따라 이니안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는 숨은 짙은 마나를 품고 있었다. 이니안은 가슴 속에 들어온 숨을 잠시간 붙잡았다.
호흡을 멈춘 것이다. 빠져나갈 구멍을 잃은 숨 속의 마나가 이니안의 기맥으로 흡수되기 시작했다. 그렇게 흡수된 마나 중 마이너스 마나만이 기맥을 따라 이니안의 몸속을 돌기 시작했고, 나머지 마나는 이니안이 내뱉는 숨과 함께 몸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몸속으로 들어오는 마나를 이니안은 정해진 길로 움직였고, 이니안의 몸을 한 바퀴 돈 마나는 배꼽 아래의 마나 스피어에 차곡차곡 쌓였다. 그에 따라 이니안의 몸에 활력이 솟기 시작했다.
‘곳곳의 혈이 막혔군.’
운공을 하는 도중 이니안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마나가 흐르는 통로인 기맥의 곳곳에 마나가 모여 있는 혈은 마나 스피어의 마나가 기맥을 따라 몸을 순환하는 것을 방해했다. 그것을 혈이 막혔다 한다.
혈이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도록 막힌 것은 탁기가 쌓여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혈을 강력한 마나의 힘으로 넓혀 마나의 흐름을 방해하지 않게끔 만드는 과정을 혈을 뚫는다고 한다.
이니안은 전신의 모든 혈이 뚫려 있었다. 어릴 때부터의 지속적인 수련으로 혈이 채 막히기도 전에 모두 뚫어버린 것이다.
혈이 가득 쌓인 탁기로 막혀 있는 것은 그곳에 마나가 모이기 쉬운 만큼 세상의 탁기가 모이기도 쉽기 때문이다. 즉, 갓 태어난 아기는 단 한 줌의 탁기도 흡수하지 않았기에 전신의 혈이 모두 뚫려 있는 것이다.
이니안은 꾸준한 수련으로 자신의 몸을 갓난아기와 같은 상태로 돌렸었다. 그 덕에 마나의 흐름에 막힘이 없었고, 같은 양의 마나로도 더욱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러던 것이 마나 스피어를 파괴하고 삼 년을 보낸 사이 다시 모두 막혀 버린 것이다.
‘막혔으면 다시 뚫어야지.’
혈을 뚫고 안 뚫고는 무공을 사용하는 데 있어서 현저한 차이가 있기에 이니안은 마나 스피어의 마나를 일으켜 막혀 있는 혈로 부딪쳐 갔다.
‘우선 소주천의 경로부터.’
마나를 운행하는 길에는 소주천과 대주천의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그중 이니안은 우선 소주천부터 완벽히 이루려고 했다. 소주천의 다음 단계가 대주천이었기에 우선은 소주천이 완벽해야 했기 때문이다.
강대한 마나의 기운이 탁기로 막힌 혈에 부딪칠 때마다 온몸을 울리는 고통이 느껴졌다. 혈에 단단히 붙어 있는 탁기가 떨어져 나가면서 기맥을 심하게 뒤흔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한 번 뚫은 경험이 있는 이니안은 차례차례 소주천의 경로를 막고 있는 혈의 탁기들을 부수어 혈을 뚫어갔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이니안의 얼굴이 땀으로 흠뻑 젖어들었다.
“후우, 오늘은 이만 해야겠군.”
한숨을 내쉬며 눈을 뜬 이니안은 얼굴의 땀을 닦아내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3할 정도 뚫은 건가?”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지만 이니안의 눈은 전보다 더욱 맑아져 있었다. 소주천의 경로에 있는 혈들이 뚫리면서 더욱 깨끗하고 순수한 마나가 흐르게 된 결과였다.
그에 따라 이니안의 마령천참공에 대한 성취도 올랐다. 2성 정도였던 성취가 4성 정도로 오른 것이다.
이니안은 창가로 다가가 창문을 열었다. 차가운 바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지만 이니안은 시원하게만 느껴졌다.
이니안의 시선이 밤하늘로 향했다. 만월에서 크기가 조금 줄었지만 하늘 가운데 뜬 달은 여전히 밝은 빛을 세상에 뿌리고 있었다. 하늘을 촘촘히 수놓은 별들도 저마다의 빛을 하늘 아래로 뿌리고 있다.
“응? 저건 뭐지?”
이니안의 눈에 별빛 사이의 희끄무레한 것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깨끗한 유리 한곳에 진 얼룩같이 보이는 것. 이니안이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운데 그런 것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내 눈이 잘못됐나? 아님 그간 너무 피곤했던 건가?”
이니안은 눈을 깜빡이며 비볐다. 그리고 창을 닫고 방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곳에도 있었다. 방 안에도 몇몇 개의 희끄무레한 기운들이 여기저기를 맴돌고 있었다.
“뭐지, 이건?”
이니안의 얼굴에 주름이 졌다. 운공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일어나는 현상에 혼란을 느낀 것이다.
회색빛으로 탁하게 보이는 기운? 아니, 연기 덩어리가 더 맞는 표현인 것 같았다. 어릴 적 저택 밖에서 친구들과 가끔 사 먹었던 솜사탕이라는 설탕과자와 비슷하게 생긴 것 같기도 했다.
아무튼 그 덩어리들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이니안은 몹시 기분이 나빴다. 그래서 사라지게 할 요량으로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손은 그 덩어리들을 뚫고 지나갈 뿐이었다. 마치 허깨비마냥 정말로 연기 속에서 손을 움직인 듯했다.
“어라?”
그런데 그 순간 기운 덩어리들의 움직임이 바뀌었다. 단지 방 여기저기를 둥둥 떠서 움직이기만 하던 것들이 이니안의 주위로 모여든 것이다.
“젠장.”
더욱 기분이 나빠진 이니안은 방문을 열고 밑으로 향했다. 맥주라도 한잔 더할 요량이었던 것이다. 일층으로 내려온 이니안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졌다. 이곳에도 곳곳에 존재했다, 그 기분 나쁜 기운 덩어리들이.
“어라? 이니안, 자러 간 것 아니었어? 그런데 무슨 땀을 그리 흘렸냐? 혹시 악몽이라도 꾼 거야? 케케케!”
아직도 일층에서 와인을 마시고 있던 케라우는 와인 잔을 빙글빙글 돌리며 평소의 경박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 모습에 이니안의 얼굴이 더욱 일그러졌다.
케라우가 앉아 있는 테이블 위에 텅 빈 와인 병이 네 개로 늘어나 있었다. 그리고 반 정도 와인이 차 있는 병이 하나.
“5골드다.”
“알아. 알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쫌생이 같긴!”
이니안의 말에 기분이 상한 듯 케라우는 인상을 팍 쓰고 투덜거렸다.
이미 밤이 깊어 식당에는 이니안과 케라우 둘뿐이다. 오늘밤 당번인 듯한 점원이 이니안이 테이블에 앉자 곁으로 다가왔다.
“생맥주 한 잔. 차갑게.”
이니안의 주문에 점원은 펍으로 갔다. 점원이 맥주잔을 가지고 오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이니안은 테이블 위에 놓인 맥주를 입으로 가져갔다. 쌉싸름하면서도 차갑게 톡 쏘는 이 맛. 이 맛 때문에 이니안은 차가운 맥주를 즐겼다.
좋아하는 맥주가 입 안을 자극하며 목구멍으로 넘어가고 있건만 이니안은 도통 맥주 맛을 느낄 수 없었다. 처음의 한 모금만이 이니안이 좋아하는 그 맛을 느끼게 해주었을 뿐이다.
그 원인은 자신의 주위를 맴돌고 있는 희끄무레한 것들 때문이었다. 방에 있을 때보다 수가 더욱 늘었다. 이니안의 얼굴에 점점 짜증이 어렸다.
“응? 왜 그래?”
기분 좋게 와인을 홀짝이던 케라우가 이니안의 변화를 발견하고는 물었다. 이니안은 처음에 그의 물음을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을 바꾸었다. 이 기이한 것들이 자신의 눈에만 보이는지, 아니면 다른 사람도 볼 수 있는지 알아볼 생각에서였다. 자신에게만 보인다면 자신에게 무언가 이상이 생겼다는 뜻이었기에.
“이것들이 보이나?”
이니안은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희끄무레한 기운 중 하나를 가리켰다.
“뭐야? 농담해? 아무것도 없잖아.”
케라우는 지금 자기를 데리고 장난을 치냐는 듯 피식 웃고는 와인을 한 모금 더 삼켰다. 그의 대답에 이니안의 얼굴에 생긴 주름이 더욱 깊어졌다.
“쯧쯧, 헛것이 보이나 보군.”
케라우는 혀를 차며 장난스레 말했다. 그러나 곧 그의 얼굴에서 장난기가 사라졌다. 헛것이라 말하면서 머릿속에 무언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니안은 자신을 보자마자 자신이 뱀파이어인 것을 알아보지 않았던가. 지하 감옥에서의 그의 몰골은 더러운 인간 죄수의 그것과 꼭 같았다. 자신에게 식사를 주는 병사들조차 자신을 징하게도 오래 갇혀 있는 인간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케라우의 은색 눈동자가 점차 붉게 물들었다. 그 변화에 이니안이 흠칫 긴장했다. 이니안은 그때 본 케라우의 흉측한 모습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변화한 것은 눈동자 색뿐이었다. 그것을 확인한 이니안은 긴장을 풀었다. 하지만 경계를 늦추지는 않았다.
“너, 아까 가리킨 것 다시 한 번 가리켜 봐.”
이니안은 다시 한 번 더 그 기분 나쁜 기운 덩어리를 가리켰다. 그사이 그것이 움직였기에 조금 전과 다른 위치였다. 이니안의 행동에 케라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것 하나만 보여?”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의 눈이 반짝였다. 방금 케라우가 하나만이라고 말했다. 그 말은 케라우 역시 이니안이 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는 말이다. 이니안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한 번씩 가리키고 지나갔다. 그에 따라 케라우의 눈도 점점 커졌다.
“정말 보이는 거야?”
끄덕.
“정말?”
케라우가 다시 한 번 물었다.
“그래. 자꾸 내 주위를 맴도는 이것들은 뭐야?”
케라우가 그것들의 정체를 안다 생각한 이니안은 답답한 마음에 즉시 질문을 던졌다.
“거참, 신기한 인간일세.”
케라우는 이니안의 물음에 답할 생각은 하지 않고 그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