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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대륙력 658년 4월 7일.
나는…….
천재다.
분명 천재다. 열다섯 살의 나이에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었는데 어떻게 천재가 아닐 수 있겠는가.
한데 그렇지가 않다.
나의 곁에 진정한 천재가 있기 때문이다.
예전부터 알아왔지만 나의 형 이슈데인. 열세 살에 소드 마스터를 이루고 지금은 전 대륙에 단 세 명 있다는 그랜드 마스터의 경지를 눈앞에 두고 있다니…….
젠장.
언젠가는 꼭 따라잡을 거다.
메이린은 킥 하고 소리를 내며 웃었다. 항상 이 부분을 읽을 때는 절로 웃음이 나왔다. 이슈데인 오빠의 진정한 상황을 알지 못하는 이니안의 질투와 열등감. 그것이 절절히 드러난 일기의 내용은 매번 그녀에게 웃음을 선사했다.
대륙력 658년 10월 28일.
빌어먹을 시험이란 건 대체 누가 만들었을까? 나는 공부가 싫단 말이다, 검을 휘두르는 것이 좋지. 물론 몇 번 읽어주면 몽땅 외우는 건 일도 아니지만 어쨌든 책을 보는 건 싫다. 그런 나를 마일론 녀석이 잡아끌었다. 어떻게든 공부를 해야 한다고.
그러던 차에 쉐이나가 자신의 집에서 같이 공부하자고 했다. 항상 전교 수석을 놓치지 않는 쉐이나의 제안에 나보다도 마일론이 먼저 쌍수를 들어 환영했다.
방과 후 우리 셋은 나란히 쉐이나의 집으로 향했다. 쉐이나 집에서 마차가 마중을 나왔기에 편안히 갈 수 있었다. 어쨌든 쉐이나는 미에른 후작가의 딸이었으니까.
확실히 공부 잘하는 아이가 가르쳐 주니 공부하기가 편하기는 했다. 수업 시간에도 열심히 들었으면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학교 수업은 지루하기 짝이 없다. 잠만 올 뿐이다. 게다가 아무 필요도 없는 내용이지 않은가. 그런 거 듣고 앉아 있느니 잠이나 자면서 체력 보충을 해두는 것이 나았다.
그런데 이상하게 쉐이나가 설명해 주는 내용은 머리에 쏙쏙 들어왔다. 졸리지도 않고 집중도 잘되었다. 같은 내용인데 왜 그런 것일까?
쉐이나가 가르쳐 줘서 그런 건가?
대륙력 661년 7월 21일.
우악! 이게 뭐란 말이냐! 뭐가 지키기 위한 검이고 뭐가 가드 나이트란 거야!
난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들어야 한다고 가문에 의해 세뇌되어 왔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다.
두 눈 멀쩡히 뜨고 소중한 사람이 죽어가는 것을 지켜봐야만 했다.
지키기 위해서만 검을 뽑아야 한다기에 알면서도 놔두었었다. 절대 먼저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가문의 금기 때문에. 타인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지킬 때만 허용된다는 그 빌어먹을 가율(家律) 때문에 말이다.
난 그 녀석들이 이렇게 일을 벌일 줄 알았다. 그래서 미리 제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가율이 나의 발목을 잡았다. 그 결과가 이거다.
소중한 사람이 내 눈앞에서 죽고 나는 살았다. 이럴 수가 있을까? 뭐가 지키기 위한 검인가?
지키기 위해서만 뽑아야 한다기에 보고도 못 본 척했는데 지키지 못했다. 그러면서 뭐가 지키기 위한 검이란 말인가!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메이린의 눈가가 파르르 떨린다. 이니안이 얼마나 고통스러워했을까? 이 부분을 읽을 때면 가슴이 저려왔다.
메이린의 손이 일기를 다음 장으로 넘겼다.
대륙력 661년 7월 25일.
급한 일들의 처리가 끝난 후에야 나는 집으로 올 수 있었다. 집에 오자마자 아버지를 찾았다. 마침 오늘이 쉬는 날인지 아버지는 서재에 계셨다. 아버지께 물었다. 지키기 위한 검이라 했으면서 왜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네가 약하기 때문이다. 아직 너의 검은 소중한 사람을 지킬 수 있을 정도가 아닌 모양이구나.”
이런 어이없는 대답이 나에게 돌아왔다.
내가 약하다고? 왕국에 고작 일곱 명밖에 없다는 소드 마스터 중의 한 명인 내가 약해? 그렇다면 대체 어느 정도가 되어야 강하다는 걸까? 나는 다시 한 번 아버지께 물었다.
“지키기 위한 대상을 지킬 수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엉터리 같은 대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
나는 아버지의 대답에 분노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지키기 위해 지킴의 대상이 될 존재에게 해악이 될 것들을 미리 제거할 수는 없느냐고. 아버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럴 수는 없다. 해악이 될 가능성이 곧 해악이라는 것은 아니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들은 분명 해악이 되었다. 내가 미리 손만 썼어도 되었을 일인 것을. 아버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전부 구구절절한 변명일 뿐이다.
아버지와 대화를 했다기보다는 일방적인 화풀이였다. 내가 지른 소리에 놀란 집사가 서재 밖에서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나를 납득시키지 못했다. 이 빌어먹을 가율에 대한 나의 의구심을 떨쳐 내지 못한 것이다.
지긋지긋하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전장을 내달리는 멋진 기사가 되고 싶었지, 왕궁에 숨어 요인 경호 따위나 하는 그런 기사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우리 가문은 반드시 그런 가드 나이트가 되어야만 했다. 난 그렇게 컸다. 자라온 대로 행동한 것이 이 비극의 원인이었다.
우리 가문이 이 비극의 원인이었단 말이다.
그날의 일은 메이린도 똑똑히 기억했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려낼 수 있을 정도로. 아버지의 서재 안에서 울려 퍼진 요란한 소리들을. 시녀가 자신에게도 급히 달려오지 않았던가.
소식을 들은 그녀는 헐레벌떡 서재로 달려갔고, 그때 본 것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채 숨을 씩씩 몰아쉬며 나오는 동생의 모습이었다.
“이니안…….”
안타깝게 동생의 이름을 중얼거린 메이린은 일기의 다음 장으로 시선을 돌렸다.
대륙력 661년 7월 27일.
무려 이틀간이나 고민했다. 사실 고민을 시작하기 전에 답이 나와 있는 것이었지만 이틀이란 긴 시간을 망설인 것은 아쉬움 때문이었다.
내가 가진 힘이 어느 정도인지 알기에 이 힘을 버린다는 것에 대한 아쉬움, 그것이 나의 발목을 이틀이나 잡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완전히 결정을 내렸다.
소중한 쉐이나가 나의 무력함 때문에 그렇게 떠났는데 나에게 집착할 것이 더 이상 무엇이 남아 있을까?
떳떳하게 모두 버리면 되었다.
검도, 성(姓)도, 가문도, 힘도.
모든 것을 버릴 것이다.
이미 아버지께 드릴 편지는 써놓은 상태다. 마지막 몇 줄만 더 쓰면 된다. 그 몇 줄 때문에 나는 이틀이나 망설인 것이다.
가문을 떠날 결심은 이틀 전 아버지의 서재에서 나오는 그 순간 이미 가슴속에 있었으면서도 말이다.
마침 아버지께서는 왕궁에 들어가셨다. 왕궁에서 돌아온 멍청하기 짝이 없는 이슈데인 형도 잠에 빠져들었다.
편지의 나머지 구절을 쓰고, 마나 스피어의 마나를 흩어버리고, 편지와 검을 이곳에 놓아두고 난 사라지면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장을 읽은 메이린의 눈에서 눈물이 또르르 굴러 떨어졌다. 지난 3년 간 이렇게 흘린 눈물이 얼마던가.
“이니안… 이 멍청한 아이야…….”
눈물과 함께 메이린의 입을 비집고 나오는 서글픈 목소리. 들을 대상도 없음에도 이 말 역시 지난 3년간 똑같이 반복하고 있다.
그때 메이린의 귀로 익숙한 소리가 들려왔다. 이것 역시 지난 3년간 늘 겪어온 일이다.
이니안이 기분 좋을 때마다 불었던 휘파람 소리.
그것이었다.
“오늘도 여전히 환청이 들리는구나.”
그녀는 어쩌면 이니안의 휘파람 소리의 환청을 듣기 위해 매번 이렇게 이니안의 방을 찾아 일기를 읽는 것인지도 몰랐다. 이니안이 부는 휘파람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절로 마음이 평안하게 가라앉았으니.
“그래, 이제 찾으러 가야지. 언제까지 환청만 듣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메이린은 지난 몇 달간 고민해 오던 일에 대해 결국 결심을 했다. 이미 오빠인 이슈데인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만 그와 함께 시행해야 할 일이 있기에 망설였을 뿐이다.
“오빠는… 막내인 이니안을 어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까? 집을 나간 지 3년이 지난 그 아이를 찾아서 데려오는 것보다 큰언니 일을 먼저 생각하다니.”
메이린은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녀의 목소리에는 이슈데인에 대한 섭섭함이 묻어 있었다.
8장. 자꾸 내 주위를 맴도는 이것들은 뭐야?
“깨끗하군.”
카르세온은 눈앞에 놓인 트롤의 시체를 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정말로 깨끗하고 깔끔하게 베어진 목. 그 한 수에서 자신들이 쫓고 있는 용병의 실력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니안이라고 했던가?”
절벽을 내려오는 데 꼭 하루가 걸렸다. 중간에 해가 져 몸을 밧줄로 고정하고 절벽에 매달려 잠시 눈을 붙이며 해가 뜨길 기다렸다. 한겨울의 밤은 춥고도 길었다. 그렇게 바닥에 도착한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딱딱하게 얼어 있는 트롤의 시체였다.
“아무래도 마을에 들를 모양이군요.”
“그렇지. 트롤의 가죽을 벗겨간 걸 보면 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니까.”
하론의 말에 카르세온이 동조했다. 쫓기는 입장에서 굳이 시간을 들여 트롤의 가죽을 벗겨갔다면 결국 마을에 들러 쉬는 데 필요한 돈을 마련하겠다는 소리였으니까.
“그러면 아마도 바웬 마을 정도이겠군요.”
하론은 잠시 이 근방의 지도를 떠올려 생각하더니 단정하듯 말했다.
“왜 하필이면 바웬 마을이야?”
가만히 듣고 있던 마이어가 물었다. 마이어는 카르세온을 제외한 이 자리의 하이 나이트 중 가장 강했다. 대신 다른 이들에 비해 생각하는 걸 싫어했다. 나름대로 추적술에 일가견이 있기는 했지만 머리 쓰는 것은 싫어하는, 그야말로 단순무식한 인물인 것이다.
“지금까지 이니안이란 용병은 계속해서 서쪽으로 이동했어. 그놈의 목적지가 이곳에서 서쪽 어딘가에 있다는 말이지. 그리고 이 협곡을 벗어나서 서쪽에 있는 가장 가까운 마을이 바웬이야. 내 기억이 분명하다면.”
하론의 설명에 마이어는 신기하다는 듯 그를 쳐다보았다.
“너는 귀찮지도 않냐? 어떻게 그 지도를 외우고 그런 걸 생각을 하냐?”
마이어의 말에 하론은 한숨을 쉴 뿐 별다른 대꾸는 하지 않았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기에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버린 것이다.
“이곳에서 얼마나 걸리지?”
“전력으로 달렸을 경우 3일 정도입니다. 하루 여섯 시간 잔다는 가정 하에서요. 아, 속도는 저희들 기준입니다.”
카르세온의 물음에 잠시 생각을 하던 하론이 확신에 찬 어조로 대답했다.
“전력으로 달린다. 하론, 앞장서라.”
카르세온의 명령에 하론이 선두에 서고 나머지 기사들은 전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아홉의 인원이 전력을 다해 바람같이 달리고 있었지만 별다른 소리는 나지 않았다.
***
“이 마을은 그냥 지나친다.”
차가운 이니안의 목소리에 케라우는 그러려니 했다. 다만 이제는 따뜻한 곳에서 마음 편히 쉬고 싶었던 로즈의 입에서 불만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피곤한데 이곳에서 쉬면 안 돼요?”
등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이니안은 차갑게 대답했다.
“추적자들도 그렇게 생각할 거다.”
카르세온의 차가운 그 눈빛을 떠올린 이니안은 그 말만 남기곤 바웬 마을을 지나쳐서 달려가는 속도를 더욱 빨리 했다.
“하하하! 걱정 말아요, 로즈 양. 이곳에서 하루거리에 조금 더 큰 마을이 있다고 하니까요. 이 녀석 속도면 다섯 시간이면 충분할 겁니다. 해질녘이 되겠군요.”
케라우는 이니안의 옆에서 바로 선 자세로 낮게 몸을 띄워 날아가며 박쥐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말했다. 그의 말에 그제야 로즈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하루를 꼬박 달려 바운더리 산맥 자락의 작지 않은 마을에 막 도착한 참이었다. 그런데 그냥 지나친다고 하니 기분이 상할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멀지 않은 곳에 더 큰 마을이 있다고 하니 기분이 조금은 풀린 것이다.
“더 빨리 간다.”
이니안은 낮게 중얼거리고 자신이 펼칠 수 있는 최대의 속도로 마령보를 밟았다. 배꼽 아래의 마나 스피어에서 마나가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도 슬슬 한계였다. 마을에서 몸을 쉬고 싶은 마음이 가장 강한 건 이니안 본인이었다.
“넌 대체 몸이 뭐로 만들어졌냐? 인간이 이런 체력을 보이다니.”
이니안의 속도에 맞춰 더욱 빨리 날아가는 케라우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그도 슬슬 한계에 이른 속도였기 때문이다. 어느새 쉬지 않고 움직이던 입이 조용해졌다. 더 이상 말을 하면서 날아갈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케라우가 길을 알려주는 것 외에는 세 사람 사이에 오가는 말이 없었다. 이니안이야 원래 필요한 말 이외에는 하지 않았고, 항상 이야기를 하던 케라우가 조용히 하자 로즈도 뭐라 말을 꺼내기 힘든 분위기였기 때문이다.
그 덕분이라고 할까. 마을에 훨씬 빨리 도착할 수 있었다. 케라우는 다섯 시간이라 했지만 세 시간 만에 도착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