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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조금 전 그의 변화를 로즈가 보지 못한 듯하자 그는 안도했다. 혹시라도 그것을 보고 로즈가 이니안에게 이야기했다면 현재 이니안이 보여주는 모습으로 보아 자신과 끝장을 내려 했을 것이다.
물론 이니안에게 당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몰래 숨어서 뒤따라야 한다. 이니안의 기민한 이목을 속이고 몰래 따라붙는다는 것은 무척이나 피곤한 일이었기에 그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케라우의 어색한 웃음에 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으나 곧 그러려니 했다. 지금까지 그녀가 본 케라우의 모습은 ‘종잡을 수 없다’ 그 한마디로 정리가 가능했기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 말 그대로다.”
그때 케라우의 귀에 울린 음산한 목소리. 케라우는 전신의 모공이 곤두서는 듯 섬뜩한 느낌을 받았다. 어느새 그의 뒤에 바짝 다가온 이니안이 그의 귀에 대고 작은 소리로 속삭인 것이다.
‘빌어먹을, 눈치챘구나. 저 녀석은 어떻게 된 것이…….’
분명 이니안이 없는 자리에서 일으켰던 변화였고, 금세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어찌 알고 이런 살기를 자신에게 쏘아내는 것이다.
“이번은 용서해주지. 한 일이 있으니. 하지만 다음엔 없다.”
낮게 말한 이니안이 케라우를 향해 무언가를 던졌다. 케라우는 손을 들어 이니안이 던진 것을 받아 들었다. 그것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는 회색 털의 토끼였다. 붉은 눈을 이리저리 굴리는 것이 분명 살아 있는 토끼였다. 하지만 전혀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너…….”
케라우의 시선이 이니안을 향했다.
“동물의 피를 마셔도 된다고 했지? 앞으로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라.”
그렇게 차갑게 말하고 이니안은 고개를 돌려 로즈에게로 다가갔다. 그의 어깨 위에는 협곡에서 잡은 트롤의 가죽이 빵빵하게 무엇인가를 감싼 채 올려져 있었다.
이니안은 로즈 앞에서 트롤의 가죽을 펼쳤다. 그 가죽에 안에는 잘 손질된 산돼지 한 마리와 몇몇 가지의 산초(山草), 그리고 장작으로 쓸 나무들이 쌓여 있었다. 결코 길지 않은 시간 안에 그 모든 것을 준비해 온 것이다.
“녀석, 솜씨도 좋군.”
로즈의 앞에 나뭇가지들을 잘 모아 쌓는 이니안의 모습을 잠시 본 후 케라우는 몸을 돌렸다. 살아 있는 토끼에 이빨을 박고 피를 빠는 모습을 로즈에게 보일 수는 없었기에.
아니, 그것보다는 피를 빨기 위해 흉측하게 변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이기 싫었다는 것이 더 옳은 말일 것이다.
‘역시 따뜻한 녀석이야.’
붉게 변해 번들거리는 눈으로 숲을 향해 걸어 들어가던 케라우는 작은 미소를 베어 물었다. 자신이 지하 감옥에서 지나가는 말로 식사에 소량의 동물 피가 들어갔다고 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자신의 몫으로 토끼 한 마리를 가지고 오는 행동. 말로는 귀찮다, 귀찮다 하고 있지만 이니안의 본성을 알 수 있었다.
얼음 가면을 쓰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지만 그의 몸은 얼음 가면을 쓰기에는 너무 따뜻했다. 어찌어찌 쓴 얼음 가면도 금세 녹아버릴 정도로.
이니안은 손에 바짝 마른 나뭇가지를 들고 마나를 집중했다. 그러자 손에서 열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하더니 곧 불꽃으로 화해 나뭇가지에 불이 붙었다. 이니안은 그 나뭇가지로 잔뜩 쌓아놓은 장작에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제법 양이 되는 산초들을 손으로 쥐어짜 그 즙을 산돼지에 뿌렸다. 소금이 없는 산속. 그렇다고 그냥 익혀서만 먹기에는 야생동물의 고기는 너무 비렸다. 자신은 몰라도 로즈가 먹을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래서 이니안은 산초 즙을 손질한 산돼지에 뿌린 것이다. 초보 용병 시절 야생동물의 노린내에 구역질을 할 때 닳고 닳은 고참 용병들이 알려준 방법이었다. 용병으로 일이십 년 굴러먹으면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고 했던가? 그들의 배려로 이니안이 알게 된 방법이었다.
이니안은 준비를 마치자 어느새 활활 타오르고 있는 불속으로 산돼지를 집어넣었다. 곧 고기가 익는 구수한 냄새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꼬르륵.
그러고 보니 로즈는 바실러스 자작과 함께한 식사 이후 지금껏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아니, 자신의 배에서 울린 부끄러운 소리가 그 사실을 알려주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보기 좋게 익어가는 산돼지 고기의 모습을 지켜보는 로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붉게 넘실거리는 불꽃이 얼굴을 발갛게 비추고 있어 그다지 티가 나지 않는다는 정도일까?
“저… 이니안 오빠.”
고기가 완전히 익기까지 시간이 있었기에 로즈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이니안은 무심히 불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까 그 토끼…….”
로즈는 이니안이 케라우에게 아무렇게나 던진 그것이 토끼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그것도 살아 있는 토끼. 빨간 눈동자가 빛나는 것을 그녀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빨간 눈을 이리저리 뒤룩뒤룩 굴리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웠던지.
그 토끼를 케라우가 들고 갈 때 로즈는 그 토끼의 운명을 대강 짐작할 수 있었다. 케라우가 뱀파이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알지만 너무 불쌍했다.
“그놈은 뱀파이어다.”
로즈가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알아차린 이니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잘랐다.
“하지만…….”
“우리가 살기 위해 음식을 먹듯 그 녀석에게도 필요한 일이야.”
조금 전보다 더욱 차가운 목소리. 로즈는 곧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탁. 타닥. 탁.
나뭇가지가 불타면서 튀어 오르는 소리만이 고요한 산속에 울렸다.
‘토끼라도 주지 않으면 언제 사람을 덮칠지 알 수 없는 일이지.’
이니안은 그 말은 속으로 삼켰다. 지금까지 케라우가 보여준 모습은 뱀파이어 같지 않았기에 잊고 있었지만 케라우는 뱀파이어다. 동물보다는 사람의,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피를 가장 좋아하는.
‘그때 그 느낌…….’
한창 산돼지 손질을 마치고 필요한 것들을 모두 챙겼을 때쯤 이니안은 등줄기를 훑어가는 기분 나쁜 느낌을 받았다. 그 느낌은 전에 동굴에서 케라우의 생각이 자신의 머릿속에 저절로 흘러들어 왔을 때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서둘러 돌아왔다. 과연 케라우의 모습을 보니 당장에라도 로즈의 목을 잡고 피를 빨 듯한 상태였다. 입술을 비집고 나온 그 흉측한 송곳니라니.
그때 마침 울린 늑대의 울음소리에 케라우는 정신을 차렸다. 자신을 자책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는 케라우의 얼굴에서 이니안은 그가 순간적으로 본능에 져 정신이 나간 것임을 알 수 있었다.
사람도 극한 상황에 몰리면 이성을 본능이 지배할 때가 있지 않은가. 이니안은 케라우도 그것과 마찬가지라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저 녀석도 계속 굶었지?’
거기에 생각이 미쳤기에 작은 토끼 한 마리를 더 잡아온 것이다. 물론 경고를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항시 긴장을 하게끔 만들어놓지 않으면 언제 사고를 칠지 몰랐으니.
솔직히 죽여 버릴까도 생각했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달고 다니는 것보다는 제거해 버리는 것이 나았으니까. 하지만 곧 고개를 저으며 그 생각을 지웠다.
우선 죽일 자신이 없었다. 케라우와의 단 한 번의 싸움. 그때 이니안은 케라우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그랬기에 케라우와 함께 있는 로즈를 두고 사냥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케라우의 변화에 반응하는 자신의 몸. 그것은 분명 마령천참공 때문일 것이다. 자신도 제대로 알지 못하는 마령천참공과 마이너스 마나. 케라우의 변화에 자신이 반응을 했다는 것은 분명 케라우가 보인 변화의 그 무엇과 마령천참공이 관련이 있다는 소리였다.
마령천참공의 비밀을 완전히 파악하기 위해서는 케라우가 필요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렇게 일을 끝낸 것이다.
‘그래도 앞으로 로즈와 케라우 둘만 함께 있도록 해서는 안 되겠어.’
서투른 판단으로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던 상황을 다시 떠올리며 이니안은 긴장의 끈을 더욱 바짝 조였다.
“응? 다 익었군.”
잠시 상념에 빠진 사이 고기가 딱 먹기 좋을 만큼 익었다. 그러고 보니 완전히 익은 고기에서 식욕을 동하게 하는 구수하고도 향기로운 냄새가 퍼져 나오고 있었다.
이니안은 아무렇지도 않게 불속으로 손을 집어넣어서는 돼지의 앞다리 부분을 죽 찢었다. 그리고 다시 먹기 편할 정도의 크기로 찢어서 잠시 들고 있었다. 고기가 어느 정도 먹기 적당한 온도로 뜨거운 기운이 가셨다 생각될 때쯤 그것을 로즈에게 내밀었다.
“고마워요.”
이니안이 불속에 손을 집어넣을 때부터 유심히 바라보고 있던 로즈가 활짝 웃으며 냉큼 받아 든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얼마나 허기가 졌었는지 알 수 있는 행동이다. 그 모습에 살짝 웃은 이니안은 자신도 고기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 역시 몹시 배가 고팠기에.
로즈는 먹는 데 정신이 팔려 이니안의 미소를 보지 못했다. 한번 봤다면 절대로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그 미소를.
두 사람이 막 고기를 먹으며 허기를 채우기 시작했을 무렵 케라우가 숲에서 걸어 나왔다. 그의 얼굴은 밤임에도 불구하고 조금 전보다 생기가 도는 듯했다.
히죽 웃은 그는 아무 말 않고 달빛이 잘 드는 곳에 앉았다. 그의 몸에서 희미하게 혈향이 풍겼지만 곧 산돼지가 구워진 냄새에 묻혀 사라졌다.
***
흑발의 아름다운 여인이 사박거리며 긴 복도를 걷고 있었다. 앞을 바라보는 검은 눈동자에 알 수 없는 걱정과 슬픔이 자리해 있다. 얼마간 걷던 그녀는 걸음을 멈춰서 몸을 돌렸다. 그리고는 마주하고 있는 문을 열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에는 임자가 없는 듯 깨끗했다. 사람이 사용한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단지 매일 청소와 정리를 하는지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하나 그뿐이다.
여인은 그리움에 물든 눈으로 방 안을 둘러본다. 그리고 한쪽 벽에 붙여져 있는 책상으로 걸음을 옮겼다. 의자를 빼내 그곳에 몸을 의지한다.
익숙한 손길로 책상 오른쪽에 위치한 서랍장의 밑에서 두 번째 서랍을 연다. 그곳에 들어 있는 책 몇 권을 모두 꺼낸 후 서랍을 길게 빼냈다. 그러자 서랍의 중간 부분에 가는 선이 두 개 있었다. 그 선 사이의 나무판자를 들어 올리자 작은 노트 한 권이 나왔다.
메이린 케이 사이몬.
서랍에 숨겨진 공간에서 노트를 꺼낸 이 여인의 이름이다. 이니안이 그토록 좋아했던 막내누나이다.
그녀는 이니안의 방에 노크도 없이 들어올 정도로 친했기에 그녀만이 알 수 있었던 비밀 공간이다. 물론 이 비밀을 들킨 후 이니안은 그녀에게도 방에 들어올 때는 노크를 할 것을 요구했지만 말이다.
메이린은 그렇게 비밀 공간에서 노트를 꺼낸 후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벌써 3년이 지났구나.”
맑은 목소리다. 하지만 맑은 목소리에 스며 있는 걱정스러움은 절로 듣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만들었다.
메이린은 일주일에 두세 번 습관적으로 그러는 것처럼 오늘도 이니안의 방에 들어와 이니안의 비밀 공간에서 노트를 꺼냈다. 노트에는 메이린의 손때가 검게 물들어 있었다. 그 노트의 표지에는 Diary라고 적혀 있었다.
메이린은 오늘도 어김없이 그 표지를 넘겼다. 너무 많이 읽어 이제는 글자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우고 있는 일기이건만 그래도 그녀의 시선은 노트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