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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저 녀석, 어쩌려는 거지? 절벽에 다 이르렀는데도 속도를 줄이지 않다니…….”
하론의 중얼거림에 카르세온의 머리를 스치는 생각.
“빌어먹을. 저 녀석, 절벽 아래로 뛰어내릴 생각이군.”
그답지 않게 흥분한 어투였다. 추적 이후 철저하게 이니안에게 농락당했다는 기분에 결국 그도 감정의 변화를 드러낸 것이다.
과연 카르세온의 예상대로였다. 절벽의 끝에 이르자 이니안은 망설임 없이 몸을 날렸다. 그의 뒤를 따르던 은회색의 머리칼을 가진 남자 역시 몸을 날렸다. 공중으로 조금 떠오르는 듯 보이던 둘의 몸은 곧 자연의 법칙대로 자유 낙하를 시작했다.
이니안과 케라우가 빠른 속도로 아래로 떨어질 때 카르세온은 절벽에 도달할 수 있었다.
“미친.”
까마득했다. 절벽은 그 바닥이 보이지 않았다. 이곳은 바운더리 산맥에서도 상당한 높이를 자랑하는 산허리였다. 짙은 안개에 가려진 절벽은 내려다보는 사람의 기를 질리게 했다.
“이 밑으로 뛰어내리다니, 정말 미친 것 아닐까요?”
절벽을 내려다본 하론이 기가 차다는 듯 혀를 내두르며 말했다.
“젠장.”
쾅!
카르세온의 욕지기와 함께 커다란 소리가 울렸다. 힘껏 발을 구른 것이다. 절벽 앞의 돌바닥에 선명한 발자국이 찍혔다. 카르세온은 그렇게 자신의 분노를 표현했다.
“그놈, 대단한 녀석이군. 부단장이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마이어가 하론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카르세온은 나르트가 죽었을 때도 평정을 유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었다. 비록 가슴 깊이 분노하고 있었다 하더라도 결코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한데 지금 저 모습은 확실히 화가 난 모습이었다.
“어떻게 하지요? 용병이 포르시아님과 함께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고 보고해야 하나요? 저 아래로 뛰어내리면 틀림없이 죽을 텐데…….”
하론의 말에 카르세온은 고개를 저었다.
“말이 있는 곳으로 가서 밧줄과 정을 가지고 온다. 놈은 살아 있다.”
카르세온의 말에 여덟 사람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하지만 부단장은 그 말만을 남기고 먼저 걸음을 옮겼다. 카르세온이 그렇다면 그런 것이다. 여덟 기사는 경악한 표정을 지우고 서둘러 카르세온의 뒤를 따랐다.
‘뒤로 물러날 때 그 녀석, 이미 이런 상황을 알고 있었다. 그때 그 녀석의 얼굴은 자신으로 가득했어. 결국 이럴 계획으로 이곳까지 왔다는 것. 반드시 잡고 만다, 이놈. 으드드득.’
자신이 내려다본 절벽의 아래.
카르세온 자신도 그곳으로 그렇게 뛰어내린다면 살아남는다고 장담할 수 없었다. 아니, 자신 스스로도 만약 내기를 한다면 자신이 죽는다 쪽에 배팅을 할 것이다.
그런데 그 이니안이라는 녀석은 그런 자신을 비웃듯이 자신만만한 얼굴로 뛰어내렸다. 살아남을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서. 그것이 자신을 분노케 했다. 자신도 망설이는 일을 우습게 하는 인간이 있다는 사실이.
“보고는 어떻게 하지요?”
마이어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테리신에게 대강 이야기해 주고 보고하도록 해. 그리고 그 녀석, 귀찮으니까 그만 돌아가라고 하고. 아, 앞으로 우리는 말도 없이 도보로 이동해야 할 테니 말을 데리고 가라고 해. 우리는 앞으로 필요한 짐들을 직접 지고 간다.”
차가운 목소리로 순식간에 대답한 카르세온은 걸음을 더욱 빨리 했다. 이러고 있는 사이에도 이니안이 얼마나 더 멀리 도망칠지 몰랐다. 조금이라도 빨리 짐과 장비들을 챙겨 돌아와야 했다. 추적의 고삐를 더욱 강하게 움켜쥐기 위해서라도.
***
휘익! 휘익!
차가운 바람이 살갗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니안은 로즈를 업은 채 절벽 아래를 보며 떨어지고 있었다. 온몸으로 부딪쳐 오는 공기의 저항이 떨어지는 속도를 실감케 해주었다. 그 옆에서 케라우 역시 이니안과 같이 떨어지고 있었다.
“도망치기로 한건 잘한 판단이야. 그게 장수의 비결이지. 케헤헷.”
떨어지는 와중에도 케라우가 경박스러운 웃음을 뱉어내며 말했다.
“다음에 만났을 때는 다를 거야.”
이니안은 낮게 중얼거렸다. 케라우는 그 말을 들었는지 못 들었는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오우! 이제 바닥이 보이는걸.”
절벽에 짙게 깔렸던 안개가 사라지며 천천히 바닥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위와 마찬가지로 울퉁불퉁한 돌바닥이었다.
“쳇, 강이라도 좀 흘러주면 어디 덧나나?”
케라우의 투덜거림에 피식 웃음을 지은 이니안은 오른발과 왼발로 번갈아 반대쪽 발등을 찍으며 몸을 날렸다. 발등을 찍었을 때의 반발력으로 몸을 조금씩 절벽 쪽으로 몸을 붙였다.
손이 거의 절벽에 닿을 만한 거리에 왔을 때 로즈를 잡고 있던 손 중 하나로 검을 뽑아 절벽에 박아 넣었다. 검이 순간적으로 푸른빛을 발했다.
“소드 익스퍼트 상급 정도인가? 아까 보여준 움직임이나 실력에 비해 성취가 낮은걸.”
케라우는 이니안을 최소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으로 예상했기에 의외라는 듯 중얼거렸다.
끼이이이익!
마나를 머금고 절벽에 박힌 검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절벽을 긁어내렸다. 그 마찰력으로 인해 이니안의 낙하 속도가 점점 느려졌다. 그 속도에 맞춰 케라우도 자신의 낙하 속도를 조절했다.
거의 바닥에 근접했을 때 이니안은 절벽을 차며 검을 뽑고 사뿐히 바닥에 착지했다. 그 과정 중 로즈가 느낀 충격이라고는 거의 없었다. 그 정도로 자연스럽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늘 생각하는 거지만 네놈의 몸놀림은 반칙이라고. 내가 아는 소드 마스터도 그렇게 움직이지 못했어.”
그것은 당연했다. 대륙에 존재하는 보통의 소드 마스터와 이니안 가문의 소드 마스터는 검을 익히는 체계가 완전히 달랐으니까.
“그나저나 기분 나쁜 곳이군.”
그랬다. 으스스한 기운이 감돌고 옅게 깔린 안개가 절로 기분 나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것은 평범한 인간의 기준이었다. 당장이라도 뱀파이어 따위가 나올 것만 같은 분위기였으니까. 결코 뱀파이어인 케라우가 할 말은 아니었다.
“쳇, 아직 해가 한창 뜨고 있을 때인데 이렇게 어두워서야 어디…….”
케라우가 기분 나쁘다고 한 것은 빛이 제대로 들어오지 않는 상황 때문이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솟아 오른 양쪽의 절벽. 그 사이의 협곡과도 같은 이곳의 지형은 하늘의 태양이 발하는 빛이 그 바닥에 도달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설마 이곳에서 하루 이상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
케라우가 불안한 듯 중얼거렸다. 평소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과는 다른 정말 심각한 모습이었다. 보통 때와 기색이 다르다는 것은 느꼈지만 이니안은 평소처럼 신경 쓰지 않았다.
이니안은 로즈를 내려주었다. 이제 혼자서 걸을 수 있는 곳에 내려왔으니 굳이 자신이 업고 갈 이유가 없었다.
이니안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어차피 자신들의 목적지는 수도. 서쪽 방향으로 이동해야 했다. 우선 이 협곡을 벗어나는 것이 먼저였지만. 로즈는 이니안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케라우 역시 아무 말 없이 걸음을 옮겼다. 바닥에서 살짝 떠서 날아가던 평소의 이동 방법과는 달리 지금은 직접 걷고 있었다.
쿠아아아아!
얼마나 걸었을까? 사나운 울음소리가 일행의 귀에 들렸다.
“오빠…….”
이니안의 뒤에서 걸음을 옮기던 로즈가 이니안의 옷자락을 잡으며 바짝 달라붙었다.
“잘됐군.”
울음소리를 들은 이니안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울음소리로 봤을 때 분명 트롤이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이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된 원인이나 다름없는 트롤.
예전이라면 분명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3년 전만큼은 아니지만 이제 어느 정도 힘을 찾았다. 트롤 정도는 어렵지 않게 상대할 수 있는 힘을.
이니안은 로즈의 손을 가볍게 떨쳐 내고 걸음을 빨리 했다. 어느새 이니안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검은 섬뜩한 살기를 뿌리고 있었다. 검을 이리저리 살핀 이니안은 무엇인가 마음에 안 드는 표정을 지었다.
“역시 병사들이 쓰던 검이어서인지 싸구려로군.”
이니안은 근처의 바위에 검을 세게 후려쳤다. 기교를 부리지도 않고 마나를 주입하지도 않은 채 순수하게 검의 강도로 바위를 후려친 것이다.
쩔그렁.
거친 소리와 함께 검의 절반이 뚝 부러져 나갔다. 절벽을 내려오면서 검에 쌓인 피로로 인해 결국 부러진 것이다.
이니안은 검을 살피며 곧 부러질 것을 알았기에 미리 부러뜨린 것이었다. 전투 중에 검이 부러져 튀어나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부러진 반검을 들고 싸우는 편이 나았다.
트롤 역시 이곳에 있는 이니안과 로즈의 냄새를 맡고 이동해 오고 있었는지 곧 그 흉측한 모습을 드러냈다. 트롤의 모습을 확인한 이니안의 얼굴에 차가운 웃음이 걸렸다.
“이젠 예전의 내가 아니니까.”
전광석화와 같은 움직임으로 이니안은 트롤의 옆으로 돌아갔다. 마나를 한껏 머금은 검을 휘두르자 트롤의 팔이 뚝 떨어졌다. B급 용병의 실력으로는 절대 보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크아아앙!
트롤은 고통과 분노의 외침을 토해냈다. 잘려진 팔의 끝 부분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서서히 재생을 시작했다.
쾅!
트롤은 순간 몸을 돌려 남아 있는 한쪽 팔로 이니안이 있던 곳을 후려쳤다. 요란한 소리가 협곡을 울렸다. 하지만 그곳에 이니안은 없었다. 마령보의 방위를 밟아 순식간에 그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트롤은 자신이 사냥감을 맞추지 못했다는 것을 깨닫자마자 발을 굴렀다. 트롤의 거대한 발이 이니안의 전신으로 짓쳐들었다.
이니안은 가볍게 몸을 띄워 트롤의 발 위에 올라섰다. 그리고는 트롤의 다리를 타고 트롤을 향해 쇄도해 들었다. 놀란 트롤은 다리를 흔들어 이니안을 떨쳐 내려 했다. 그 순간 훌쩍 뛰어오른 이니안은 트롤의 왼쪽 어깨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잘 가라.”
서걱.
이니안이 휘두른 검이 트롤의 목을 깨끗이 가르고 지나갔다.
트롤의 몸이 서서히 뒤로 넘어갔다.
쿵!
트롤의 몸이 땅에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후와! 한두 번 잡아본 솜씨가 아닌데?”
그야말로 능숙한 움직임에 케라우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런데 저 몸놀림은 아무리 봐도 반칙이란 말이야?”
케라우는 아래로 떨어지면서 이니안에게 했던 말을 다시 한 번 중얼거렸다. 로즈는 멍한 얼굴로 이니안과 트롤을 번갈아 보았다. 사실 이곳까지 이동하면서 이니안에 대한 의구심이 가슴에 자리하고 있었다.
동굴에 들어갈 때는 자신이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나뭇가지를 밟으며 이동한 것이나 이 절벽 아래로 내려온 것이나 절대 평범한 용병의 실력이 아니었다. 그런데다 트롤을 저렇게 간단히 상대하는 모습이라니.
“거짓말쟁이.”
로즈는 짤막하게 중얼거렸다.
“응? 왜 그러시죠, 로즈 양?”
로즈의 중얼거림을 들은 케라우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이니안 오빠가 절 처음 만났을 때 그랬단 말이에요. 트롤을 만나면 도망쳐야 한다고. 그런데 저게 뭐예요? 순식간에 트롤 한 마리를 잡았잖아요.”
말을 하면서 속은 것이 점점 더 분해지는지 로즈의 볼이 부풀어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