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22화 (22/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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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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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어와 하론이 검으로 근처 아름드리나무 아래의 땅을 파기 시작했다. 검은 기사의 자존심이다. 결코 땅을 파는 도구 따위가 아니었다.

검으로 땅을 파는 행위. 이것은 기사의 검을 모욕하는 행위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자신들이 파는 구덩이는 자신들과 생과 사를 같이했던 동료의 안식처다.

결코 검을 모욕하는 행위가 아니다. 오히려 동료의 죽음을 애도하는 슬픈 몸부림이었다. 다른 여섯의 하이 나이트 역시 자신들의 검을 뽑아 땅을 파기 시작했다.

카르세온은 그런 부하들의 행동을 묵묵히 바라보았다. 카르세온의 눈동자에 슬픔의 기색이 맺히는 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테리신은 너무도 엄숙한 그들의 행동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근처 나무 아래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나르트의 시신이 부하들이 판 구덩이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확인한 카르세온은 몸을 돌렸다. 카르세온은 어느새 품에서 종이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종이 위에는 이니안의 용모가 그려져 있었다.

“용병 놈, 내가 네놈의 심장을 꿰뚫어주마. 나르트의 그것과 똑같이. 네놈을 살려놓으라는 명령은 없었으니까.”

살기에 찬 카르세온의 목소리가 조용히 흘러나왔다.

그들은 이니안의 이름을 몰랐다. 바실러스 자작은 그를 잡자마자 그냥 지하 감옥에 처넣었기 때문에. 이니안의 소지품은 모두 불탄 지 오래였다. 병사들이 이니안이 B급 용병이라 했기에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불태운 것이다.

어차피 바실러스 자작의 성 지하 감옥은 살아서 나올 수 없는 곳. 게다가 그곳의 용도가 상당히 떳떳치 못한 것이었기에 그곳에 갇히는 사람에 대한 모든 것을 지워왔다. 마치 세상에서 갑자기 증발된 것처럼.

이니안 역시 그런 경우에 해당되었기에 그가 가지고 있던 모든 것을 없애 버렸다. 이니안이라는 이름도. 다만 B급 용병이라는 사실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

이니안의 용모파기도 그를 잡아들인 병사들의 기억에 의존한 것이었기에 조금은 어설퍼 보였다. 하지만 그 그림만으로도 충분히 이니안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

“아함, 잘 잤다. 고마워, 케이로스. 따뜻하고 푹신해서 정말 잘 잤어.”

기지개를 켜며 몸을 일으킨 로즈는 케이로스를 향해 생긋 웃어 보였다.

[그랬나? 다행이군.]

그 순간 케이로스의 입이 마치 미소를 짓는 것처럼 움직였다. 그 순간은 극히 짧았기에 로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신이 제대로 본 것이 맞나 하고. 늑대가 웃을 리는 없다는 생각에 곧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워 버렸다.

[인간이 와서 네가 깨어나면 연락을 달라고 했다. 그가 이니안인가?]

자신을 빤히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는 로즈를 향해 케이로스가 물었다. 케이로스는 이니안과 케라우의 이름을 몰랐다. 그래서 단지 인간과 뱀파이어로 지칭하는 것이다.

“그래, 인간이 이니안 오빠야. 아까 내가 한 부탁 잊지 마.”

[알았다.]

“그럼 난 그만 가봐야겠네. 그럼 고마웠어.”

케이로스의 몸에서 벗어난 로즈는 그에게 손을 흔들어주고는 동굴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드레스가 바닥에 끌리며 여기저기 심하게 해졌다.

“왔군.”

로즈가 동굴 입구 근처에 이르자 이니안이 바닥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니안 오빠, 절 찾았다고요?”

로즈가 생긋 웃으며 말했다. 케이로스의 품에서 푹 자서 그런지 피로가 완전히 풀렸다. 온몸에서 기운이 넘쳐흘러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그것이 그녀가 자는 동안 케이로스가 회복 마법을 걸어주었기 때문임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이니안은 천천히 로즈에게로 다가갔다.

“추적자들이 근처까지 쫓아왔다. 빨리 떠나야 한다.”

말을 하는 이니안의 시선이 로즈의 기다란 드레스 자락에 머물렀다.

추적자들이 벌써 근처까지 쫓아왔다는 말에 로즈의 안색이 어둡게 변했다. 조금 전까지의 생기발랄함은 사라지고 걱정이 가득 자리한 얼굴.

그녀는 문득 이니안의 시선이 머물러 있는 곳으로 자신의 눈을 움직였다. 자신의 드레스를 난감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그를 보자니 자신이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있었다.

그녀 역시 여행자. 이런 드레스가 이동에 얼마나 큰 불편을 주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지금 이니안은 자신 때문에 쫓기고 있었다. 자신을 지켜주겠다고 약속했기 때문에. 그것이 못내 부담스러운 로즈였기에 여기서 더 이상 그를 힘들게 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오빠, 그 검 좀 빌려줘요.”

이니안의 대답도 듣지 않고 로즈는 이니안의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섬뜩한 날이 빛나는 가운데 중간중간 검붉은 것이 묻어 있었다. 로즈는 그 검을 들고 이니안과 케라우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갔다.

지이익! 지이익!

검이 옷감을 가르고 지나가는 소리가 울렸다. 로즈는 자신의 드레스 자락 밑단을 움직이기 편한 길이로 잘랐다. 바닥에 질질 끌리던 드레스는 로즈의 종아리 부근에 내려오는 정도의 길이로 잘려 있다.

그리고 그녀는 곧 드레스의 양다리 사이의 가운데 부분을 허벅지 정도의 높이까지 앞뒤에서 길게 잘랐다.

드레스 자락이 나풀거리며 그녀의 하얀 다리가 살짝 드러났다. 하지만 이니안도 케라우도 그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이럴 작정을 하고 그녀가 그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움직여 온 것이다.

드레스 자락이 양쪽으로 벌어지자 그녀는 미리 잘랐던 드레스 밑단을 적절한 길이로 잘라 벌어진 드레스 자락들이 날리지 않게 질끈 묶었다. 임시방편이긴 했지만 드레스가 그런대로 봐줄 만한 바지로 바뀌었다. 모든 준비를 끝낸 로즈는 다시 이니안과 케라우가 있는 곳으로 갔다.

“여기요.”

로즈가 생긋 웃으며 검을 이니안에게 내밀었다. 로즈의 모습에 이니안은 가는 미소를 지으며 검을 받아 검집에 넣었다.

“휘유∼ 멋진걸! 엄청 매력적이에요!”

벽에 기대앉아 로즈의 새로운 모습에 케라우가 휘파람을 불며 말했다. 어떤 의미로 매력적이라는 것인지. 묶인 드레스 자락 사이사이로 하얀 살결이 언뜻 그 모습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을 아는 로즈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그녀 자신도 이 모습이 상당히 부끄러운 상태였다. 다만 상황의 여건이 그 부끄러움을 잊게 만들어주고 있을 뿐. 그런 것을 케라우가 그만 로즈가 애써 잊고 있던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그만 간다.”

그때 이니안이 로즈에게 등을 내밀며 말했다. 이니안의 행동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았기에 로즈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이니안의 등에 업혔다.

“네, 네. 그만 가십시다요.”

케라우는 옷자락을 털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굴의 입구에서 뿌옇게 밝아오는 동녘 하늘이 보였다.

***

호사스러운 장식이 가득한 방. 거대한 창의 틀은 갖가지 문양이 그려진 금으로 장식되어 있고, 창의 양옆으로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묶여 있는 커튼의 재질은 한눈에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방의 가운데 있는 멋진 세공이 가해진 테이블은 한눈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칠흑같이 검은 가운데 은은히 자주색의 빛을 띠는 재질이 여간해서는 보기 힘든 나무 같았다.

그 테이블 위에서 뜨거운 김을 피워 올리는 세 개의 찻잔 역시 정교하면서도 아름다운 문양과 장식이 보통 물건이 아님을 짐작케 했다.

“참으로 난감한 상황이군요. 일개 용병이 흑마법을 사용하다니…….”

하얀 수염을 탐스럽게 기른 노인이 미간에 주름을 잔뜩 만든 채 중얼거렸다. 그 용병 때문에 지난밤 한숨도 못 자고 아티팩트를 만든 것을 떠올리자 노인은 다시 한 번 골이 지끈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가? 난 신기한데. 흐흐흐, 연구 대상이야. 우리 흑마법사들의 전유물인 암흑 마나를 사용하다니. 꼭 한 번 보고 싶군 그래.”

회색 머리칼을 가지고 얼굴에 주름이 가득한 노인은 수염 하나 없이 깨끗한 자신의 턱을 문지르며 음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쯧쯧, 클레비클,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지 않은가?”

흰 수염의 노인이 고개를 저으며 걱정스럽다는 듯 이야기했다.

“아아! 그만 하게, 시메티딘. 확실히 나도 클레비클처럼 흥미를 느끼던 중이었으니까.”

“흐흐흐. 그렇지 않습니까, 공작님? 일개 용병 따위가 마법을 사용하다니 말이지요. 그것도 흑마법을.”

공작이라 불린 온화한 인상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옆집 할아버지 같은 노인의 말에 클레비클이라는 노인이 기분이 좋은 듯 웃었다.

“하지만 시메티딘의 말대로 중요한 건 그 녀석이 아니네.”

뒤이어진 그의 말에 시메티딘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 용병 녀석이 암흑 마나를 흘린다면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겁니다. 저와 시메티딘이 만든 이것이 있다면요.”

세 개의 찻잔 사이 가운데에 흰색 구슬이 박힌 목걸이가 놓여 있었다. 급히 만든 듯 투박하기 이를 데 없는 모양이었지만 그것을 바라보는 시메티딘과 클레비클의 두 눈에는 자부심이 가득했다.

“8서클을 마스터한 백마법사와 흑마법사인 자네 둘이 만들었으니 뭐, 당연한 일이겠지.”

공작의 칭찬에 두 사람의 얼굴에 가득하던 자부심이 더욱 진해졌다.

“그럼 어서 카르세온 자작에게 보내줘야 하지 않는가?”

“조금 전에 완성했습니다. 차 한 잔 즐기는 여유 정도는 있어야지요. 그사이 마나도 회복하구요.”

테이블 위의 찻잔을 들며 시메티딘이 대답했다. 그는 어느새 찻잔에서 피어오르는 다향에 완전히 취해 있었다.

“크흐흐흐, 그렇습니다. 조금 쉬어야지요. 완전히 기진맥진입니다. 저 작은 목걸이 하나를 만드는 것이 좀 힘들어야지요. 하룻밤 사이에 만들었으니.”

두 사람의 노고를 잘 알았기에 공작은 그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둘을 바라보았다. 솔직히 그가 생각하기에도 두 사람은 간밤에 정말 고생했다. 아티팩트를 만드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 공작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을 하룻밤 만에 만들었으니 오죽하겠는가.

“뭐, 나도 자네들 덕에 해가 뜨는 것도 보고 좋군. 이렇게 해가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찻잔을 들고 창가로 간 공작의 얼굴이 막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태양 빛에 의해 붉게 물들었다.

테리신의 품에서 수정 구슬이 옅은 빛을 내면서 깜빡였다. 테리신은 황급히 수정 구슬을 꺼내 통신을 연결했다. 수정 구슬에 나타난 얼굴은 칸세르 공작이 아닌 자신의 스승 시메티딘이었다.

“스승님.”

테리신은 스승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며칠 사이 스승의 얼굴이 눈에 띄게 말라 있었다.

“칠칠치 못한 녀석, 그곳에 대응 마법진을 그리고 좌표를 말하거라.”

“네.”

시메티딘의 말에 테리신은 황급히 품에서 마법 시료를 꺼내 눈 위에 마법진을 그렸다. 그의 행동에 하이 나이트들이 주위로 모여들었다. 곧 그 빌어먹을 용병을 쫓을 수 있는 아티팩트가 도착할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렸기 때문이다.

마법진의 크기가 상당히 작았기에 완성되는 것은 금방이었다. 마법진을 완성한 테리신은 품에서 작은 책자 하나를 꺼내 뒤적였다. 그리고 주변의 마나의 흐름을 느끼며 책과 대조해 좌표를 확인했다.

“다 되었느냐?”

테리신의 얼굴이 통신용 수정 구슬에 나타나자 시메티딘이 작은 목걸이를 들어올렸다.

“이것이 내가 너에게 보낼 물건이다. 이 가운데의 하얀 구슬이 암흑 마나와 반응하면 검게 변할 테니 그것을 기준으로 용병 녀석을 쫓으면 될 것이다.”

“네.”

스승의 설명에 테리신은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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