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너에게서는 그분과 비슷한 냄새가 난다. 그분이 마지막에 남기신 것에서 풍겨 나오던 냄새가 너의 몸에서도 나고 있어. 그것은 절대 보통 인간은 가질 수 없는 것. 네가 그 냄새를 지니고 있다는 것은 인정을 받았다는 뜻. 네가 인정을 받은 인간인 이상 난 너를 어찌할 수 없다.]
로즈는 케이로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인정을 받았다니? 기억을 아무리 뒤져 봐도 그런 일은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걸. 너무 어려워.”
[아무래도 상관없다. 나에게는 네가 인정을 받았다는 사실만이 중요할 뿐.]
케이로스의 말에 로즈의 두 눈이 반짝 빛났다.
“저기, 그러면 말이야, 내가 저 문 뒤로 들어가 보고 싶다고 해도 들여보내 줄 거야?”
[네가 원한다면.]
“그럼 내가 다른 사람들을 데리고 들어가려 한다면?”
[네가 원하는 대로.]
케이로스의 대답에 로즈는 활짝 웃었다.
“그래? 그럼 내가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케이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니안 오빠를 저 안으로 들어가게 해줘. 조금 전에 보니까 상당히 화가 난 얼굴이었어. 평소에 그러고 앉아 있으면 굉장히 편안한 얼굴이었는데 오늘은 어딘가가 달랐어. 아마도 여기를 못 지나가서 그런 게 아닐까?”
로즈는 나름대로 분석한 듯 빙긋 웃으며 케이로스에게 말했다.
[알았다. 단 한 번 허락하도록 하지.]
케이로스의 대답에 로즈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웃음이 더욱 밝아졌다.
“고마워. 그런데…….”
로즈의 시선이 케이로스의 몸통 한가운데로 향했다.
“거기 참 폭신하고 따뜻해 보인다.”
[무엇을 원하는가?]
“거기에 푹 파묻혀서 자고 싶어.”
차가운 돌바닥에서 자서 그런지 몸 여기저기가 욱신거렸다. 낯선 곳에서 눈을 뜨고, 또 케이로스를 만난 사실 때문에 지금껏 느끼지 못했던 통증이 온몸을 따라 찌르르 울려 퍼졌다.
그때 로즈의 눈에 들어온 윤기 나는 케이로스의 은빛 털은 세상 어느 고급스러운 침대보다도 더 편안한 침대처럼 보였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 그대는 인정을 받은 자. 내가 어찌 할 수 없으니까.]
“꺄아! 고마워!”
케이로스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로즈는 서둘러 케이로스를 향해 달려가더니 몸을 날려 그 푹신한 털 속에 몸을 파묻었다.
“역시 예상대로 무척이나 따뜻하고 편안하다. 그럼 난 잠시 좀 잘게.”
그간의 피로가 몰려오는지 로즈는 눈을 감았다. 사실 동굴에서 눈을 뜬 것은 잠자리가 불편해서였지 피로가 풀려서가 아니었다. 바실러스 영지에서 체포되었을 때부터 지금까지 얼마나 마음을 졸였으며 얼마나 피곤하게 이동하였는가?
두 눈을 감자마자 로즈는 곧 잠의 바다에 빠져들었다.
‘검을 들고 싸우겠다고 마음먹은 이상 마령천참검법을 한시라도 빨리 익혀야 한다.’
마령천참공을 운용하며 마나를 쌓던 이니안은 앞으로의 험난한 일정을 생각하며 마령천참검법의 구결을 살폈다.
그 동작과 구결은 머릿속에 들어 있었지만 익히지를 않았기에 안다고 할 수 없었다. 추적자들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이곳에서 일주일을 있을 수 있다.
자신이 예전에 익혔던 것과는 전혀 궤를 달리하는 마이너스 마나의 무공이다. 하지만 이니안은 결국 검을 움직이는 근본은 같다 여겼기에 일주일이면 기본적인 움직임은 익힐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지금의 자신이 검을 잡는다면 틀림없이 피를 토하며 쓰러진다, 운용하는 마나와 검을 쓸 때의 마나 운용법이 서로 충돌하기에. 검을 들고 적을 쓰러뜨리려면 어떻게 해서든 기본적인 수준이라도 마령천참검을 익혀야 했다.
이니안은 운공을 멈추고 일어서서 동굴 입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어느새 그의 손에는 검이 들려 있었다.
‘마령천참검법. 그것은 전삼초, 중삼초, 후삼초의 아홉 초로 구성되어 있다. 마치 대응되는 노래처럼 세 부분으로 나뉘어 있어.’
이니안은 운공을 하는 가운데 명상을 통해 익힌 마령천참검법의 구결을 떠올렸다. 그리고 머릿속에 그려지는 동작대로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1초 마령소혼(魔靈召魂).
마령이 혼을 불러.
2초 귀혼천검(鬼魂千劍).
귀신의 혼이 천개의 검을 떨치니.
3초 혈화만천(血花滿天).
핏빛 꽃이 하늘을 가득 채우는구나.
“후우, 여기까지가 전삼초로, 노래로 치면 일절이군.”
순서대로 검을 움직이던 이니안은 잠시 멈춰 호흡을 조절했다. 이니안의 눈은 심유한 빛을 발하며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니안의 몸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4초 청검밀밀(淸劍密密).
맑은 검이 은밀히 다가와.
5초 만혼금쇄(萬魂禁鎖).
모든 귀신의 혼을 가두니.
6초 창천광휘(蒼天光輝).
푸른 하늘이 빛을 뿌리는구나.
“여기까지가 이절인 중삼초인가?”
다시 한 번 호흡을 고르며 이니안은 자신이 펼쳤던 동작을 조용히 음미했다.
“어디, 마지막까지 해볼까?”
7초 마령현신(魔靈現身).
마령이 몸을 드러내.
8초 마령노후(魔靈現身).
분노의 외침을 토해내며.
9초 마령천참멸(魔靈天斬滅).
하늘을 가르고 무너뜨리더라.
“후우, 끝이군. 하지만 조금 찜찜한 검법이군.”
이니안이 가문에서 익혔던 검법들은 맑고 강하며 부드러운 느낌의 검법들이었다. 하지만 마령천참검법은 그것과 달랐다.
전삼초는 음유하면서 끈적한 느낌의 환검(幻劍)이었다. 중삼초는 그나마 맑고 강한 느낌의 검이었다. 다만 4초의 검은 맑은 느낌과는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은밀한 초식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또 절묘하게 어우러졌다. 마지막 후삼초는 어둡고 빠르며 요사스럽고 어지러운 동시에 패도적인 기운이 강한, 무어라 정의할 수 없는 느낌의 검이었다.
“으음, 노랫말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는군.”
머릿속으로 조금 전 펼쳤던 검초들을 복기한 이니안은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중얼거렸다.
그도 그럴 것이, 3절의 노랫말로 풀어지는 초식 명은 마령이 귀신을 불러 세상을 어지럽히다가 귀신들이 쫓겨나자 그가 직접 나타나 하늘을 무너뜨린다는 내용이었다. 누구라도 찜찜하게 여길 만한 구절들이었다.
“뭐, 검이 나쁜 것이 아니라 검을 쥔 손이 나쁜 것이니까. 조금 으스스한 느낌의 초식이라 할지라도 내가 제대로 사용하면 되는 것이지.”
약간은 꺼림칙하게 느껴지는 검법을 그렇게 받아들인 이니안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자신이 눕혀놓았던 로즈를 찾기 위함이다.
“응?”
없었다. 분명히 운공을 하기 전에 편평한 바닥에 눕혀두었는데 없었다.
“설마?”
머리를 스치는 불길한 생각. 자신이 운공에 빠져든 사이에 깨어나 주변을 살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젠장.”
이 동굴에서 로즈가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입구가 깎아지른 듯한 절벽 한가운데 있으니 깊숙한 안쪽으로 들어가는 길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케이로스라는 거대하고 또 강대한 힘을 지닌 늑대가 있었다. 모든 침입자들을 쫓아내려고 하는 사나운 늑대가.
이니안은 서둘러 안쪽으로 달렸다. 다시 모습을 드러내면 목숨을 버릴 각오를 하라는 경고를 들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그 아이를 지키기로 약속했단 말이다.’
그렇다.
이니안은 분명 로즈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약속은 이니안 자신의 명예였다. 한데 무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로 그 약속을 소홀히 하다니.
이니안은 스스로를 자책하며 발을 더욱 빨리 놀렸다. 케이로스가 있는 곳까지 도착하는 것은 금방이었다.
“케이로스!”
모퉁이를 돌자마자 케이로스를 거세게 불렀다.
[조용히 해라.]
이니안의 모습을 힐끗 본 케이로스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뭐… 응?”
케이로스의 말에 무어라 대꾸하려던 이니안의 눈에 가득히 들어오는 모습이 있었다. 케이로스의 허리 부근의 털에 온몸을 파묻고 편안한 모습으로 자고 있는 로즈의 얼굴.
“후우…….”
케이로스가 로즈에게 무슨 해코지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무슨 일인가?]
케이로스의 물음이 이니안의 머리에서 울렸다.
“로즈를 찾아왔습니다.”
[그녀는 편안히 자고 있다. 그냥 있던 곳으로 돌아가라, 깨어나면 너를 찾아갈 테니.]
케이로스의 대답에 의구심이 이니안의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찌 저 케이로스의 품에서 잠을 잘 수가 있단 말인가. 자신과 케라우는 이곳에 발을 들였다는 이유만으로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어떻게 그 아이는 이곳에 있을 수 있는 겁니까?”
궁금한 것은 참지 못하는 이니안. 즉시 케이로스에게 물었다.
[그녀는 인정을 받은 자, 이곳에 있을 자격이 있다.]
인정을 받았다는 것이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었지만 이니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쨌든 이곳에서 안전히 있을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도 이곳에 있어도 됩니까?”
[인정받은 자와 함께 있으니 동굴에 머무는 것은 허락한다.]
일주일의 기한이 무기한으로 늘어났다. 충분한 시간을 확보한 셈이다.
“그럼.”
로즈의 안전을 확인한 이니안은 이곳을 찾은 용건이 끝났기에 다시 동굴 입구로 걸음을 옮겼다. 로즈 덕에 무한정 이 동굴에서 머무를 수 있다는 소득을 얻고서.
‘하지만 로즈 그 아이의 정체는 뭐지? 게다가 인정을 받은 자라니……?’
함께 있으면 있을수록 로즈의 정체는 더욱 깊은 미궁 속으로 빠져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