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이쯤에 동굴이 있어! 어서 오라구!”
이니안이 있는 곳에서 절벽 아래로 상당히 떨어진 위치에 케리우가 둥둥 떠 있었다. 케라우가 있는 높이를 정확히 확인한 이니안은 아무런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뛰어내렸다.
그간의 정신없는 이동에 피곤했는지 로즈는 이니안의 품에서 잠들어 있었다. 그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비명 소리가 울릴 법한 상황에서 이니안은 너무나 손쉽고 조용히 절벽 아래로 낙하해 갈 수 있었다.
“나 먼저 들어간다!”
이니안이 떨어져 내려오는 것을 확인한 케라우는 천천히 동굴 안으로 몸을 날려 들어갔다. 점차 아래로 떨어짐에 따라 이니안의 눈에도 검게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동굴이 들어왔다.
절벽을 마주 보고 똑바로 떨어지고 있었기에 이니안은 동굴의 입구를 정확히 볼 수 있었다. 동굴의 입구와 이니안의 몸이 정확히 수평면 상에 놓이자 이니안은 오른발로 왼쪽 발등을 찍었다.
그때 생긴 반탄력으로 이니안은 유유히 동굴의 입구에 들어설 수 있었다.
‘또 사용했군. 맹세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인가? 지금까지 내가 맹세를 지키고 살아왔던 것은 내 의지가 강해서가 아니라 다만 내가 능력이 되지 않아서였던 것인가?’
이니안은 조금 전 자신이 가문에 있을 때 즐겨 사용하던 기술을 사용하고는 심한 자괴감에 빠져들었다. 지난 3년간 자신이 가문의 무공을 사용하지 않고 지냈던 것은, 가문의 무공을 사용할 기본적인 마나가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마나를 얻자마자 무의식적으로 예전처럼 반응하는 몸이 그 증거라는 생각에 가슴 한쪽이 쓰려왔다.
‘내가 이렇게 나약했다니…….’
“휘유∼”
짝짝짝짝!
휘파람 소리와 함께 박수 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졌다.
“대단한걸! 너 정도면 무리 없이 쫓아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그런 멋진 움직임이라니!”
“시끄러워!”
“쳇! 너, 말야. 처음 봤을 때는 안 그랬는데 지금 완전히 얼음 덩어리로 변한 거 알아? 이 얼음탱이야, 칭찬을 해줘도 반응이 그게 뭐냐?”
케라우의 말에도 이니안은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케라우가 안내한 동굴은 제법 훌륭했다. 입구는 세 사람 정도는 여유롭게 드나들 정도의 크기였고, 위치 또한 절벽에서 중간쯤인 데다 입구 위에 불룩 튀어나온 암석 덩어리 때문에 위에서 내려다보더라도 이런 곳에 동굴이 있는지 알 수 없는 위치였다.
게다가 제법 깊은 동굴인지 여전히 동굴의 검은 아가리는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 정도라면 하루 이틀이 아니라 1년 정도를 머물러도 추적자들이 찾지 못할 것 같았다. 물론 식량이 문제였지만.
“용케도 이런 곳을 찾았군. 칭찬해 주지.”
지금 들어선 동굴이 무척이나 마음이 들었기에 이니안의 입에서는 무미건조하나마 칭찬의 소리가 나왔다. 그 말을 들은 케라우는 즉시 기고만장한 웃음을 터뜨렸다.
“푸하하하하핫! 그렇지? 이게 다 이 뱀파이어 중의 뱀파이어 케라우님이시니까 가능한 일이라고! 으하하하하!”
너무 극심한 케라우의 반응에 이니안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괜히 칭찬한 것인가?’
“으하하하! 내가 이곳을 어떻게 찾았는지 알아? 응? 내가 없었으면 넌 아직도 그 눈 덮인 산속을 발바닥에 땀나도록 돌아다니고 있겠지? 나한테 감사하라고! 으하하하! 내가 이곳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궁금하지 않아? 응? 너는 열심히 돌아다녀도 못하던 것을 이 케라우님이 순식간에 떡하니 찾아낸 비결, 궁금하지 않아? 응?”
의기양양한 얼굴에 한껏 자만한 눈빛으로 이니안을 보며 케라우는 연신 웃음을 터뜨렸다.
“전혀.”
짧은 한마디의 대답만을 남기고 이니안은 동굴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솔직히 이곳을 찾아낸 케라우의 능력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궁금하지는 않았다. 자신은 쉴 수 있는 곳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이었으니까. 단호한 이니안의 행동에 당황한 것은 케라우였다.
“엉? 어라? 이봐, 이니안. 정말 안 궁금해? 좀 궁금해 해보라고! 이런 신기한 능력인데 말이야! 응?”
하지만 이니안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나참,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어떻게 이곳을 찾았느냐 하면 말이야…….”
케라우는 자신의 능력에 대해 이니안에게 자랑을 늘어놓고 싶었는지 가만히 걸음을 옮기고 있는 이니안의 뒤를 따라붙어 열심히 자신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했다.
“관심 없어.”
하지만 이니안은 짧은 말로 케라우의 말을 끊었다.
“아니, 이봐. 네가 애타게 찾는 것을 찾아준 게 난데, 내가 하는 말 정도는 귀 기울여 들어줘야 하는 거 아냐?”
“후우, 그럼 지껄여 봐.”
케라우의 얼굴이 너무 애처로웠기에 이니안은 한숨을 쉬며 퉁명스레 대답했다. 들어주겠다고 하지 않으면 계속해서 귀찮게 굴 거라는 예감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기 때문이기도 했다.
“으하하하! 진작에 그럴 것이지!”
결코 기분 좋은 소리가 아닌, 오히려 상당히 화가 날만한 대답이었음에도 케라우는 기분 좋게 웃었다.
그는 이미 이니안을 상당히 삐딱하게 듣고 삐딱하게 보고 무척이나 싸가지 없게 말하는 건방진 애송이 정도로 자신의 머리에 입력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 탓에 그의 행동을 대수롭지 않게 받아넘긴 것이다.
물론 이런 사실을 이니안이 알았더라면 당장에 칼부림이 났겠지만 이니안이라도 케라우의 머릿속에 든 것을 모두 알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내가 어둠의 귀족인 뱀파이어 아니겠어? 뱀파이어라면 어둠의 귀족인데 부리는 시종이 없다는 것은 말이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우리는 여러 동물들과 몬스터들을 부릴 수 있는데 말이야, 그중에서도 주로 부리는 녀석이 박쥐들이지. 박쥐 녀석들의 습성이 낮에는 동굴 속에 숨어서 자는 것이라서 근처에서 박쥐들이 많은 곳을 찾아본 거야. 정신 감응으로 그 녀석들을 부리는 것이라 찾는 것도 가능하거든. 게다가 나는 뱀파이어 중의 뱀파이어! 출중한 능력으로 이런 곳을 찾아냈다 이거야. 이런 곳, 아무 뱀파이어나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케라우는 숨도 차지 않는지 자신의 자랑을 길게 늘어놓느라 정신이 없었다. 이야기하는데 온 신경을 집중했기에 케라우는 결코 알 수 없었다. 자신의 열과 성을 다한 설명이 이니안의 한쪽 귀로 들어가서 반대쪽 귀로 그대로 쏟아져 나가 공허하게 동굴 벽을 울리고 있음을.
그렇게 걸음을 옮기던 이니안이 우뚝 멈춰 섰다.
“그러니까 말이지, 이 내가 어떤 뱀파이어냐 하면… 응?”
여전히 자기 자랑에 정신이 팔려 있던 케라우는 이니안보다 몇 걸음을 더 걷고 나서야 그가 멈춰 선 것을 알아차렸다.
“왜 그래?”
케라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현재 자신들이 있는 곳은 동굴에서 통로와 같은 곳이었다. 쉬기에는 적당하지 않은 곳이었기에 계속 걷고 있었던 것인데 이니안이 멈춰 서자 의아함을 느낀 것이다.
“여기, 안전한 곳 맞아?”
이니안이 차갑게 물었다.
“당연하지! 박쥐 녀석들이 얼마나 겁이 많은 녀석들인데! 위험한 곳에는 절대 있지 않는다고!”
케라우는 발끈하며 소리쳤다. 마치 이니안의 말이 자신이 찾은 이 훌륭하고 안락한 동굴에 대한 트집 같았기 때문이다.
이니안은 케라우의 반응을 무시하고는 잠이 든 로즈를 한쪽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꺾어진 동굴의 끝 부분을 손으로 가리켰다.
“그래? 그럼 저건 뭐지?”
케라우의 시선이 이니안의 손가락을 따라갔다.
“아무것도 없잖아.”
“멍청한 놈.”
케라우의 반응에 이니안은 한마디만 남기고는 앞으로 저벅저벅 걸음을 옮겼다.
스르릉.
바실러스 영지에서 빼앗은 검이 섬뜩한 소리를 내며 검집 밖으로 하얀 몸을 드러냈다.
꿀꺽.
이니안의 행동이 무척이나 신중했기에 케라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다른 것은 몰라도 전투에 관해서 이니안의 감각이 무척이나 뛰어나다는 것을 바실러스 영지에서 확인을 한 터였다. 그런 이니안이 저렇게 긴장했다면 분명 무언가가 있었다.
이니안의 몸에서 어둠의 힘이 뭉클거리며 솟아나기 시작하는 것이 케라우의 눈에 보였다.
‘분명 무언가 엄청난 것이 있기는 있나 보군.’
케라우의 양손의 손톱이 길게 자라나며 섬뜩한 빛을 뿌렸다.
이니안은 조심스럽게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동굴 통로의 모퉁이. 그곳에 이르렀을 때 이니안의 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케라우가 흠칫 놀랄 정도로.
[네놈들, 돌아가라. 네놈들이 올 곳이 아니다.]
모퉁이를 채 돌아가기 전에 둘의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
그 목소리에는 엄청난 힘이 담겨 있었다.
“엉? 뭐야, 이거?”
케라우는 부들부들 떨리는 자신의 무릎을 억지로 붙잡았다. 이니안의 턱 끝에서 땀방울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닥에 딱 붙어서 떨어지지 않는 발바닥을 억지로 움직여 이니안은 모퉁이를 돌았다.
“어어… 이니안.”
케라우는 그 자리에서 돌아갈 마음을 먹고 있었기에 갑작스러운 이니안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조금 전 느낀 그 힘은 뱀파이어인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전율과 공포를 보여주었기에 자신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돌아가라고 했을 텐데?]
다시 한 번 머릿속을 울리는 공포스러운 목소리. 케라우는 그 자리에 석상처럼 굳어 버렸다.
“이럴 수가……!”
모퉁이를 돈 이니안은 그 목소리의 주인공을 볼 수 있었다. 모퉁이를 돌자 입구의 서너 배는 될 넓은 공간이 나타났고, 그 공간의 한 벽을 거대한 문이 채우고 있었다. 그리고 문 앞에 엎드려 있는 거대한 짐승.
은색의 털이 빛나는 늑대였다.
다만 평범한 늑대라고 보기에는 그 덩치가 너무 컸다. 머리가 사람의 몸통만 했으니까.
[다시 한 번 말한다. 이곳은 너희 같은 하찮은 것들이 올 곳이 아니다. 돌아가라.]
늑대는 심유한 눈으로 이니안을 보며 다시 한 번 말했다. 그 모습을 본 이니안은 천천히 검을 검집에 꽂아 넣었다. 자신이 예전의 힘을 온전히 가지고 있었다 하더라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이 뒤에 무엇이 있습니까?”
이니안의 입에서 존대가 나왔다. 케라우는 공포로 인해 뻣뻣하게 굳어서 그 자리에 서 있었기에 그 모습을 볼 수는 없었지만 들을 수는 있었다.
[감히 너희 따위가 알려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음산하고도 살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다시 한 번 머리에 울렸다.
‘대체 어떤 녀석이 있기에 저 얼음탱이가…….’
케라우는 자신을 이 무거운 공포로 짓누르는 존재에 대한 호기심이 생겼다. 이만큼 강대한 힘을 가졌다는 사실보다도 이니안에게서 존대를 들었다는 사실 때문에.
대체 이니안이 존대를 할 만한 대상이 누구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케라우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호기심이 공포를 이기는 순간이었다.
“헉!”
겨우겨우 걸음을 옮겨 모퉁이를 돈 케라우의 입에서 비명과도 같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 역시 이니안과 같은 것을 본 것이다. 은빛 털을 가진 거대한 늑대를.
[뱀파이어인가? 겁없는 녀석들이군.]
그 말과 동시에 늑대의 몸에서 엄청난 기운이 일어났다.
이니안은 그 힘에 대항하기 위해 황급히 온몸의 마나를 끌어올렸다. 케라우 역시 자신이 가진 모든 힘을 이끌어내어 몸을 보호했다. 늑대가 뿜어내는 기운에 자신들의 몸을 지키는 것도 힘겨웠다.
[재미있군. 인간이 마나를 그렇게 순수하게 뽑아서 사용하다니.]
늑대는 이니안을 재미난 장난감을 보는 어린아이와 같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재미있는 것을 보여준 보답으로 살려줄 테니 어서 나가거라.]
늑대는 다시 한 번 강렬한 기운을 두 사람에게 쏘아 보낸 후 말했다. 다시 한 번 몰려오는 성난 파도와도 같은 기운을 겨우겨우 받아넘긴 둘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헉헉헉!”
“헥헥헥!”
이것도 어디까지나 늑대가 자신의 힘을 중간에 끊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 힘이 계속해서 쏘아져 왔다면 틀림없이 온몸이 찢어져 죽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