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과연… 대단하다.’
자신은 더 이상의 흔적을 찾지 못하고 포기한 곳에서 이들은 한 시간의 절반도 되지 않은 시간 만에 완벽히 흔적을 찾아냈다. 마커의 입장에서는 과연이라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자네는 그만 영지로 돌아가도록. 이곳까지 안내해 줘서 고마웠다. 우리는 이대로 용병을 추적해 체포해서 그분을 모시고 그대로 수도로 돌아갈 것이니까 영지로 돌아가 자작님께도 인사를 전해주게. 그럼.”
그 말을 남긴 카르세온은 나무 위로 올라간 부하의 손짓에 따라 말을 천천히 몰아갔다. 마커는 그 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흥, 역시 시골 영지의 기사들이란 무능하군. 이 정도 흔적도 못 찾아 놓쳤다며 그냥 돌아오다니.”
기사들의 후미를 따라 말을 몰아가던 테리신의 한마디에 마커는 울컥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그와 자신 사이에는 거대한 차이가 존재했으니까. 그저 말없이 화를 삭일 뿐.
‘저 재수 없는 마법사 자식은 갈아 마셔도 속이 시원하지 않겠지만… 역시 대단하다, 하이 나이트들이란.’
감탄 가득한 눈으로 그들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던 마커는 천천히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테리신 네놈은 언젠가 내가 자근자근 밟아주는 날이 꼭 올 것이다. 기다리고 있어라.’
살기 띤 눈으로 살짝 뒤돌아본 마커는 말 옆구리를 찼다.
“테리신.”
“네, 부단장님.”
“너무 설치지 말도록.”
“네.”
테리신이 중얼거리는 소리를 하이 나이트들은 모두 들었다. 아니, 그가 마커가 들으란 듯 제법 큰 소리로 중얼거렸기에 듣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들의 청력은 일반인들에 비해 훨씬 예민했으니까.
아무리 변방의 시골 영지 기사라고는 하지만 마커는 기사였다. 기사에게는 명예라는 것이 있다. 하이 나이트들과 카르세온 역시 기사였기에 기사의 명예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아니, 기사에게는 주군에 대한 충성과 명예가 전부였다.
그런데 테리신이 마커에게 한 말은 기사의 명예를 깎아내리는 말이었다. 일개 마법사 주제에 기사의 명예를 무시한 것이다. 그들 역시 기사였기에 그런 모습이 곱게 보일 리 없었다. 그랬기에 카르세온이 주의를 준 것이다.
‘겁 없는 마법사 녀석, 주제를 모르고 설치다니…….’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비단 마이어만이 아니었다.
카르세온의 경고에 테리신은 조용히 뒤를 따랐다.
이니안이 처음에만 주위를 맴돌다가 이후에는 쭉 일직선으로 달렸기에 점점 더 추적에 속도가 붙었다. 그렇게 얼마나 달렸을까? 나무 위의 기사가 갑자기 멈춰 섰다.
“나르트, 왜 그러나?”
갑자기 멈춰 서자 마이어가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발자국이 없습니다.”
나르트의 대답에 기사들의 안색이 살짝 굳었다. 이니안이 마령보를 익히기 시작하며 이동한 후 어느 정도 익숙해지기 시작한 위치였다.
“흐음.”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카르세온이 말 안장에서 곧장 몸을 날려 나무 위로 올라갔다. 그가 나르트의 옆에 도착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그는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탐색했다.
“내려가지.”
“네.”
카르세온은 언제 나뭇가지 위로 올라갔었냐는 듯 어느새 말 안장에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나르트는 가지와 가지 위로 번갈아가며 몸을 날린 후 자신의 말 안장에 내려앉았다.
“우리가 판단을 잘못한 듯하다.”
“네?”
“적도는 최소한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실력이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정도이니.”
마나를 운용하면 몸이 강해지고 또한 가벼워진다. 그래서 보통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도약이 가능하고 믿을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는 것이 가능해진다.
소드 익스퍼트의 경지에 들어서면 몸 전체에 퍼져 있는 마나를 어느 정도 조정할 수 있게 된다. 그에 따라 경지가 깊어질수록 마나를 더욱 능숙하게 다룰 수 있게 되고, 상급의 단계에 오르면 정신을 집중해 이동할 경우 눈 위를 걸어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을 수 있게 된다.
“그렇다는 것은?”
“그분을 업고 이동한다고 가정하면 너희들과 비슷할지도 모르지. 어쩌면 소드 마스터일지도.”
“어떻게 그럴 수가……!”
카르세온의 말에 여기저기서 믿을 수 없다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지만 카르세온의 말이었기에 믿지 않을 수도 없었다.
“지금부터 적에 대한 평가를 새로이 한다. 적은 우리와 일 대 일로 싸울 수 있는 강자다. 그렇게 생각하고 이동한다.”
“넷!”
“지금까지의 경로로 보아 그는 일직선으로 계속 이동할 것이다. 이대로 계속 추적한다. 인간인 이상은 언젠가는 아래로 내려오기 마련이니까.”
***
이니안은 서쪽으로 쭉 달리고 있었다. 일단 로즈의 목적지가 수도였기에 이니안으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게다가 바실러스 영지로부터 제법 멀어져 있었기에 서서히 속도를 늦추고 있었다. 그의 몸에 마나가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점차 지쳐 가고 있었다.
“이쯤에서 내려가는 게 어때? 너도 지쳐 보이고, 또 그놈들이 여기까지 쫓아올 리도 없으니까.”
이니안의 기색을 눈치챈 케라우가 말했다.
“이니안 오빠…….”
케라우의 말에 그제야 이니안의 상태를 알아챈 로즈가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또…….’
다시 한 번 쉐이나의 모습이 로즈의 모습 위로 떠올랐다.
이니안은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케라우의 말마따나 자신은 많이 지쳐 있었다.
‘일단은 운공을 해야 한다.’
나무 아래로 내려온 이니안은 적당한 곳에 로즈를 내려놓고는 나무 아래에 정좌를 하고 앉았다. 이미 한 번 본 모습이었기에 로즈는 가만히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저 자세에 무슨 비밀이 있는 것일까? 저 녀석, 저러고 앉아 무서운 속도로 어둠의 힘을 흡수한다.’
케라우가 눈을 빛내며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 서서히 이니안의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하는 어둠의 힘이 보였다.
‘부럽군. 어둠의 일족인 내가 이제는 쓰고 싶어도 쓸 수 없는 힘을 일개 인간이 아무렇지도 않게 흡수하다니…….’
한참을 감고 있던 이니안의 눈이 뜨였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형형한 안광이 이니안의 까만 눈동자를 더욱더욱 신비스럽게 만들어주었다.
‘예쁘다…….’
로즈는 이니안의 검은 눈동자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운공으로 어느 정도 기력과 마나를 회복한 이니안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말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 모습에 깜짝 놀란 로즈가 얼른 일어나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바실러스 자작의 저택에서 호사스러운 드레스를 입고 있었던지라 산길을 걷기에는 많이 불편했다. 지금까지 이니안에게 업히고 안겨서 이동해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하지만 이니안은 그런 로즈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다. 그저 걸음을 조금 늦춘 정도? 그것도 이니안의 입장에서는 상당한 배려였다. 예전의 그라면 그렇지 않았겠지만 그는 자신의 맹세를 깨면서부터 냉혹해지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지금 그렇게 행동하고 있었다.
“내참, 냉정한 녀석. 이렇게 아름다운 숙녀 분이 힘겹게 걷고 있는데 넌 그게 뭐냐? 안고 가지는 않더라도 하다못해 기다려 주는 정도의 예의는 보여야 할 것 아니야?”
케라우의 핀잔에도 이니안은 여전했다.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전 케라우 드로 라토시스라고 합니다. 어둠의 귀족인 뱀파이어죠. 잘 부탁드립니다, 레이디.”
케라우는 로즈가 자신을 의아한 눈으로 쳐다보자 잔뜩 멋을 부리며 예의를 차려 인사를 했다. 감옥에 갇히기 전 많이 해보았는지 매우 익숙한 동작이었다.
“뱀파이어요?”
의외의 말에 로즈는 이니안을 쫓아가는 것도 잊고 멍하니 케라우를 바라보았다.
“네.”
“그런데 어떻게 지금 이렇게 있을 수 있는 거죠?”
“그건 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해…….”
케라우가 쓸쓸한 얼굴로 말끝을 흐리자 로즈는 더 이상 묻지 않았다. 다만 그가 뱀파이어라고 하자 아까 전 보았던 그의 손톱이 수긍이 갔다.
“그런데 왜 우리 뒤를 따라오시는 거죠? 아까 이니안 오빠와 그렇게 싸우기도 하시고. 설마……?”
“그건 말이죠, 재미있어서 말입니다. 저 녀석과는 바실러스 녀석의 지하 감옥에서 만났는데요, 제법 재미있는 녀석이더라구요. 하하하! 레이디께서 걱정하시는 그런 일이 아니니 안심하세요.”
케라우는 크게 웃는 가운데 한쪽 눈을 찡긋하며 윙크를 하는 여유까지 보이며 로즈를 안심시켰다. 그는 그녀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너무나 잘 알았기에.
‘하지만… 솔직히 동하기는 하는군. 이렇게 아름다울 줄이야……. 그 피는 또 얼마나 맛있을까?’
잠시 로즈의 목을 물고 마음껏 그 피를 빠는 상상을 하던 케라우는 얼른 고개를 세차게 흔들어 잡념을 쫓아냈다. 정말 그런 일이 있으면 큰일이었기에.
케라우의 행동에서 무언가 불길함을 느낀 로즈는 몸을 떨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정신을 차린 케라우의 눈에 그런 로즈의 행동이 확연히 들어왔다.
‘아차! 내가 무슨 실수를…….’
그제야 자신의 행동을 로즈가 모조리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케라우가 얼른 신색을 고쳤지만 이미 늦었다.
그의 미간에서 섬뜩한 검날이 하얀 빛을 뿌리고 있었다. 어느새 이니안이 돌아온 것이다.
“아니… 이봐. 이보라고. 이건 그러니까… 실수야. 그러니까 이 무서운 녀석 좀 치워주면 안 될까? 하하하하!”
케라우가 어설프게 웃으며 더듬더듬 말했다.
“네놈.”
“으, 응.”
“한 번만 더 그딴 상상을 했다가는 정말로 목을 따버린다.”
“으응, 앞으로는 조심할게.”
이니안의 살기 넘치는 말에 케라우는 세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 대답을 듣고서야 검을 검집에 넣은 이니안은 몸을 돌려 다시 걸음을 옮겼다.
“푸훗.”
멀뚱히 두 사람의 모습을 지켜보던 로즈는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어휴, 녀석. 살벌하기는. 뭐, 그래도 레이디께서 웃으시니 다행이네요.”
이마의 땀을 닦은 케라우는 로즈를 보며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그래요? 저는 로즈라고 해요. 잘 부탁해요.”
친근한 모습에 긴장을 푼 로즈가 손을 내밀며 웃었다.
“기꺼이.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케라우는 한쪽 무릎을 꿇으며 로즈의 손등에 살짝 입을 맞췄다.
“호호홋.”
케라우의 행동에 기분이 좋은지 지금의 상황도 잊고 로즈가 맑게 웃었다. 로즈가 웃자 자신도 기분이 좋은지 케라우도 빙긋 웃었다.
“그런데 이니안 오빠는 참 대단한 것 같아요. 전 케라우 씨 표정이 너무 징그러워서 뒤로 물러났던 건데.”
“하아, 제가 징그러운 표정을 지었나요? 하하하하, 앞으로는 조심하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표정만 보고 그런 건데 이니안 오빠는 케라우 씨가 어떤 상상을 했는지도 알고 있는 것 같더라구요.”
“그러게요. 그 녀석, 제가 상상한 것을 어쩌면 그렇게 딱 알아가지고. 하하하하! 엉? 잠깐!”
크게 웃으며 로즈에게 보조를 맞춰 걷던 케라우가 우뚝 멈춰 섰다.
“뭐야? 이니안 저 녀석, 내 상상을 읽었다는 거야? 그럼? 어이, 이니안! 어떻게 된 거야?”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케라우가 이니안을 불렀지만 이니안은 조용히 자신의 길을 갈 뿐이었다.
사실 이니안 자신도 많이 놀란 상태였다. 케라우가 머릿속에 떠올린 기분 나쁘고 진득한 상상이 자신의 머릿속에 저절로 흘러들어 왔으니까.
‘마령천참공 때문인가, 뱀파이어의 생각이 저절로 내 머리에 흘러들어 온 것은? 그러고 보니 마이너스 마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군. 앞으로 연구해야 할 과제인가? 누구도 익힌 적이 없는 것이니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 수가 없어. 재미있군.’
이니안은 피식 웃었다. 이제 자신은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넌 셈이었으니.
뒤에서 케라우가 고래고래 지르는 고함 소리가 들렸으나 이니안에게 있어서 그 정도를 무시하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천천히 서쪽으로 이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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