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처음 뵙겠습니다. 크리스토 바실러스 자작이라 합니다. 제가 변변치 않아 이 누추한 영지에까지 오시게 해서 대단히 송구스럽습니다.”
상대가 누구인지 알았으니 최대한 조심해야 한다. 그 옆에 서서 손을 비비며 간사한 표정을 짓고 있는 멍청한 테리신 따위의 녀석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거물인 것이다.
“페르마타 카르세온 자작이라 합니다. 칸세르 기사단의 부단장을 맡고 있습니다.”
말에서 내린 카르세온은 예의 그 딱딱한 어조로 인사를 했다. 같은 자작인 이상 어떻게 보면 상당히 무례하게 보일 수 있는 언행이었지만 바실러스 자작은 여전히 웃고 있었다.
페르마타 카르세온. 그는 이미 제국에서 유명한 인물이었다.
현재 27세로 이미 소드 마스터를 이룬 불세출의 천재.
카일로니아의 사이몬 공작가의 사람들만 아니라면 분명 대륙제일의 검의 천재라 불렸을 인물이지만 도저히 인간 같지 않은 그들 때문에 겨우 미오나인 제국제일의 검의 천재에 머무른 비운의 인물이기도 했다.
소드 마스터의 경지를 이루는 나이는 평균적으로 오십에서 육십 사이이다. 소드 마스터를 이루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일이기에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소드 마스터라는 수준 자체가 나이의 한계를 깨는 경지이지 않은가.
한데 그런 경지를 불과 25세에 이루었다면 십만 명에 한 명 있을까 말까 한 엄청난 천재라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페르마타 카르세온. 그는 거만할 자격이 있는 이였다. 하지만 바실러스 자작에게 보인 그의 행동은 절대 거만해서가 아니었다. 그의 성격이었다. 제국의 황제 앞에서도 저렇게 행동했다는 것은 더 이상 유명한 일화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알았기에 바실러스 자작은 여전히 만면에 웃음을 머금고 카르세온을 대할 수 있는 것이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가시죠.”
바실러스 자작이 몸을 옆으로 돌리며 그들을 안으로 청했다. 하지만 카르세온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럼……?”
“추적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들은 어느 쪽으로 달아났죠?”
지극히 무미건조한 사무적인 어조. 타고난 기질 때문일까? 카르세온에게는 더없이 어울렸다.
카르세온의 의사를 확인한 바실러스 자작이 눈짓을 했다. 자작의 뜻을 알아차린 마커가 앞으로 나섰다.
“부족하지만 저희 영지 기사단의 단장을 맡고 있는 마커라 합니다. 조금 전까지 그들을 추적하다가 돌아왔으니 데리고 가십시오. 길 안내 정도는 할 수 있을 겁니다.”
마커로서는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 소개였지만 어떨 수 없는 일이었다. 상대는 소드 마스터를 비롯한 소드 익스퍼트 최상급의 하이 나이트들. 자신은 이제 겨우 소드 익스퍼트 중급의 경지에 든 일반 기사다.
바실러스 자작의 말에 카르세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잠시 신세를 지겠습니다.”
“신세라니요? 당치 않은 말씀입니다. 이게 다 저의 실수에서 비롯된 일인 것을요. 마커 자네도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걸세.”
자작의 말이 맞았다. 이런 변방의 영지에서 언제 소드 마스터와 함께 일을 해보겠는가? 아니, 구경조차 할 수 없는 존재가 소드 마스터다.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일일지도 모르지만 어떻게 보면 굉장한 행운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럼 지금 출발하겠습니다.”
“부디 모든 일이 잘되길 빌겠습니다.”
카르세온이 말에 오르자 바실러스 자작은 옆으로 물러났다. 마커 역시 자신의 종자가 가지고 온 말에 올랐다.
“이럇!”
우두두두두둑!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열한 필의 말과 열한 명의 사람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저 하얗게 쌓인 눈 위에 남은 어지러운 흔적들이 그들이 떠났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이런!”
그때 멍하니 서 있던 테리신이 잊고 있었던 듯 소리를 질렀다.
“나도 따라가야 하는 것을. 아무래도 마법사가 있는 편이 추적에 더 쉬움은 말할 필요도 없는데. 자작님, 제게 말 한 필만 빌려주십시오.”
태연한 테리신의 말에 바실러스 자작은 더 이상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단지 옆에 있는 하인에게 눈짓을 했을 뿐이다.
“마법사님, 이리로 오십시오. 제가 한 필 꺼내드리겠습니다.”
하인이 테리신을 마구간으로 안내해 데리고 갔다.
‘우드득, 바실러스 자작! 건방지군!’
테리신은 자신을 무시하는 듯한 바실러스 자작의 행동에 이를 갈며 하인의 뒤를 따랐다.
“간사한 녀석 같으니라고. 상대하기도 귀찮군.”
멀어지는 하인과 테리신의 뒷모습을 보며 작게 중얼거린 바실러스 자작은 몸을 돌렸다.
***
휘익휘익.
차가운 공기가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어느새 로즈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하지만 이니안은 신경 쓰지 않고 그저 신중하게 가지와 가지를 밟으며 뛸 뿐이었다.
지금 이니안은 단 두 가지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는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가능한 빠르게 이동해서 추적대와의 거리를 벌리는 것, 다른 하나는 마령천참공의 무공이었다.
‘더 이상 내가 아는 마나 운용법은 사용할 수 없다. 그렇게 했다가는 마이너스 마나와의 충돌로 기혈이 엉켜 내상을 입을 뿐이니까. 뭐, 어차피 가문의 무공은 모두 쓸 생각이 없긴 했지만 마나를 다시 운용하니 몸이 기억한 길로 마나가 움직여서 문제야. 어서 빨리 마령천참공에 익숙해져야 해.’
절대로 가문의 무공은 사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이니안에게 있어 마나의 운용은 숨을 쉬는 것과 다름없는 행위였다.
마나가 없을 때는 몰랐지만 다시 마나를 가지게 되자 몸은 예전의 기억대로 마나를 움직이려 했다. 신경을 써 마나를 운용하지 않으면 마이너스 마나가 몸의 기억에 이끌려 플러스 마나의 운용로를 따라 움직였다. 바실러스 자작의 성에서도 그 때문에 내상을 입었고.
현재 이니안에게 한시라도 급한 것은 마령천참공에 익숙해져서 마이너스 마나의 운용을 능숙하게 하는 것이었다.
‘일단은 마령보(魔靈步)부터다. 마침 열심히 달려야 하니까.’
마령보는 마령천참공상의 신법이자 보법이다.
빠르게 달려야 할 때는 바람같이 달릴 수 있는 신법으로도, 전투 중의 움직임에서는 신출귀몰하게 몸을 움직이는 보법으로도 사용할 수 있는 행신법이었다.
특히 귀신이 움직이는 것처럼 은밀하기도 하여 때에 따라서는 은신술로도 사용할 수 있었다.
이니안은 머릿속으로 마령보의 구결을 떠올리며 마나를 운용하고, 조금씩 그 변화에 따라 몸을 움직이며 발을 놀리기 시작했다.
‘응? 저 녀석 움직임이 조금씩 달라지고 있는데? 게다가 몸에서 흘러나오는 어둠의 힘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어.’
이니안의 옆에서 유유히 날고 있던 케라우는 이니안의 몸에서 일어나는 변화를 눈치챘다. 어둠의 일족인 뱀파이어였기에 이니안이 운용하는 마이너스 마나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더군다나 케리우의 신경은 항시 이니안이 가진 어둠의 힘에 쏠려 있었으니.
이니안의 뒤에서 소리 없이 날아가는 케라우의 눈이 빛났다.
케라우의 기색이 조금 달라진 것을 이니안은 느낄 수 있었으나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현재 자신은 자신의 일에만 충실하면 되었다.
지금은 한시라도 빨리 플러스 마나의 기억을 지우고 마이너스 마나의 운용을 몸에 익게 만들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 어떻게 몸이 상할지 알 수 없었다.
정말로 위급할 때 자신도 모르는 사이 플러스 마나의 운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기에.
“마령보라… 생각보다 어렵군. 뭐, 그만큼 뛰어나다는 것이겠지만.”
“네?”
이니안의 중얼거림에 로즈가 이니안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그러나 이니안은 조금 전에 아무 말도 안 했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발을 놀리는 데만 신경 쓸 뿐이었다. 그런 이니안의 모습에 로즈의 얼굴이 어둡게 변했다.
***
“이곳입니다.”
이니안이 마령보를 수련하며 이동하기 시작할 때쯤 마커는 카르세온과 하이 나이트들을 데리고 자신이 용병의 종적을 놓친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 자리에 도착한 하이 나이트들은 각자 흩어져 주변을 살폈고, 카르세온은 가만히 말에 탄 상태로 있었다.
주변을 뒤지는 하이 나이트들은 말에서 내려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는데 그들 뒤로는 발자국이 없었다. 단지 무언가가 지나간 듯한 희미한 흔적만이 있을 뿐이었다.
‘저것이 최상급의 소드 익스퍼트란 말인가?’
그 모습에 마커는 침을 꿀꺽 삼켰다. 자신이 꿈에도 그리는 경지를 눈앞에서 보았기에.
“이곳에서 그 적도의 흔적을 놓쳤단 말인가?”
“네.”
카르세온의 물음에 마커가 황급히 대답했다.
“그래, 조사는 마쳤는가?”
“네, 부단장님. 다행히 눈이 내리지 않아 시간이 제법 지났는데도 흔적들이 온전히 남아 있었습니다.”
아홉의 하이 나이트 중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이가 앞으로 나와 보고했다.
“어떻게 되었나?”
카르세온은 보고를 하는 기사에게 심유한 눈빛을 던지며 물었다. 그의 눈은 이미 어떻게 되었는지 다 알고 있다고 말하는 듯했다.
“일단 그 적도는 그분을 업고 이곳까지 달려온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에서 그분을 내려놓고 잠시 앉아 있었습니다. 눈밭 위에 그대로요. 아마 이 부근일 겁니다.”
기사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은 눈이 전체적으로 푹 꺼져 있었다.
“그리고 잠시 후 이곳에서 누군가와 싸운 듯합니다.”
기사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은 이니안과 케라우가 전투를 벌이며 발자국을 어지러이 찍어놓은 곳이었다. 그 말에 마커는 낮게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이다.
“한데 이상한 것이…….”
“말해라.”
“이곳으로 온 발자국은 하나뿐이라는 겁니다. 누군가와 싸웠다면 그 상대의 발자국도 있어야 하는데 하늘에서 떨어진 듯 이곳에 갑자기 나타났습니다.”
기사의 말에 카르세온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지금 우리가 찾아야 하는 것은 그놈의 행방이니까.”
“네. 여기까지는 무작정 빨리 도망치기 위해 흔적을 남긴 듯합니다만 이후에는 흔적이 사라졌습니다. 적도는 상당히 머리가 돌아가는 녀석인 듯합니다.”
카르세온은 기사를 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흔적을 놓쳤다는 것인가, 마이어?”
“그렇지 않습니다.”
카르세온의 물음에 지금까지 보고를 하던 하이 나이트 마이어는 자신에 찬 눈으로 대답했다.
“이곳에서 종적이 사라진 듯합니다만 무언가 이상한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뭔가?”
“몇몇 나무 아래에 있는 새로 쌓인 듯한 눈입니다. 나무 아래에만 조금 있으니 아마도 나뭇가지에 쌓였던 눈들이 떨어진 것이겠지요.”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려 떨어진 것이겠지.”
하지만 카르세온은 그의 말과는 다르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이곳에 전체적으로 눈이 떨어져 있어야 합니다. 그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면 이 근처의 나무 대부분을 흔들었을 테니까요. 하지만 몇몇 나무에만, 그것도 제법 거리가 떨어진 나무에서만 이런 것들이 보입니다. 그래서 두세 명을 나무 위로 올라가게 해서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래서?’
그렇지 않아도 마커는 세 명의 하이 나이트가 나무 위로 훌쩍 뛰어오르는 모습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었다. 도망친 용병 녀석의 흔적을 찾는데 왜 나무 위에 오르는지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랬더니 과연 나뭇가지 위에 누군가가 눈을 밟고 지나간 흔적이 있었습니다. 나뭇가지에서 나뭇가지로 건너뛰면서 이동을 한 듯합니다. 게다가 그 행동에 익숙해져서 나뭇가지 아래로 눈을 떨어뜨리지 않을 정도가 될 때까지 이 주변을 돌면서 연습을 하다가 완벽하다 생각되었을 때 이동했습니다. 그래서 이 주변을 벗어나면 더 이상 그렇게 눈이 떨어진 흔적은 없습니다. 다만 나뭇가지의 눈들에는 발자국이 남아 있습니다.”
보고를 마친 마이어는 카르세온을 올려다보며 그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훌륭하다.”
그의 말에 마이어의 얼굴이 밝아졌다. 그 변화가 미미하기는 했지만 못 알아볼 정도는 아니었다. 카르세온은 말 위에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대강의 정황을 알아차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하의 보고를 받은 것은 자신의 부하들의 능력을 시험한 것이다. 그리고 마이어는 그 시험에서 훌륭하다는 말을 들었다.
기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하이 나이트라 하더라도 그 칭찬을 한 사람은 소드 마스터였으니까.
게다가 그 소드 마스터는 그저 집 안에서 검만 휘둘러서 경지를 이룬 샌님이 아니었다. 자신들과 같이 현장과 전장을 돌며 경험을 쌓고 하이 나이트의 칭호를 얻은 후에 깨달음을 얻어 소드 마스터가 된 이였다.
그들에게는 존경과 선망의 대상인 것이다. 그런 카르세온에게 칭찬을 들었으니 자부심 가득한 하이 나이트들도 얼굴에 변화를 보이며 기뻐한 것이다.
“그 용병 녀석, 제법 경험이 있는지 상당히 용의주도하군. 이런 방법으로 도주를 하다니 말이야. 그럼 계속 쫓아야겠지? 한 명이 나무 위로 올라가 흔적을 찾는다! 그리고 우리는 그 뒤를 따른다!”
“넷!”
명령이 떨어지자 우렁찬 대답과 함께 여덟의 하이 나이트가 말에 올랐고, 나머지 하나는 곧장 나무 위로 몸을 날렸다. 가지와 가지를 밟아 위로 뛰어오르는 그 모습은 흡사 한 마리 비조와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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