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 세상의 말과는 다른 말로 적힌 책. 이런 책이 이니안의 집에는 무수히 많았다. 이니안 역시 어릴 때부터 그 문자와 뜻을 배워왔기에 그 내용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세상은 플러스 마나와 마이너스 마나 두 가지 기운으로 가득 차 있고, 지금까지 내가 수련한 마나와 마나 스피어는 플러스 마나의 그것이다. 내가 파괴한 마나 스피어 역시 플러스 마나 스피어. 그렇다면 나에게는 마이너스 마나 스피어가 남아 있는 셈. 지금부터 마이너스 마나를 수련하면 되는 것이다.’
이니안이 읽은 마령천참공이란 것이 바로 마이너스 마나를 이용한 무공이었다.
이니안은 마령천참심법(魔靈天斬心法)에 따라 호흡을 통해 대기의 기운을 흡수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흡수된 마나 중 마이너스 마나만이 이니안의 기맥을 타고 몸속을 돌기 시작했다.
그렇게 얼마나 기운을 운용했을까? 이윽고 이니안의 배꼽 아래에 새로운 마나 스피어(Mana Sphere)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마나 스피어를 형성하려면 본디 적지 않은 기간의 수련이 필요하지만 이니안은 이미 다른 기운으로 상당한 경지에 올랐던 자. 비록 기운이 다르다 하나 지난 수련의 경험으로 급속히 그 경지로 올려가고 있었다.
“응? 뭐지?”
두 눈을 감고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케라우는 벌떡 일어났다. 자신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기운이 지하 감옥의 한곳에서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 방향은 아마도 이니안이 있는 감방 근처인 것 같은데?”
케라우는 떨리는 눈으로 철창 밖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레 느껴진 기운에 그의 가슴이 답답해졌다.
점점 더 지하 감옥으로 몰아치는 기운의 크기가 거대해졌다. 그리고 그 기운은 감옥의 한곳으로 몰려갔다. 보통 사람은 결코 느낄 수 없는 기운이었다. 아니, 이 성에서라면 바실러스 자작은 이 기운을 느낄지도 모른다.
그는 분명 이 기운을 느낄 실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절묘하게도 이니안이 열심히 마이너스 마나를 모으는 이때, 그는 외부와 완전히 자신의 방을 차단한 채 칸세르 공작과 마법 통신을 하는 중이었다.
이니안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마이너스 마나를 차분히 받아들이며 호흡을 더욱 깊이 했다. 마나 스피어가 형성된 후에도 한참을 더 운기하며 마나 스피어에 마이너스 마나를 채우던 이니안이 호흡을 갈무리하고 눈을 떴다.
이제와는 다르게 이니안의 두 눈에서 안광이 뿜어져 나왔다. 마나 스피어가 다시 생기고, 그곳에 어느 정도의 마나를 쌓았다는 증거였다.
“놀랍군. 가문의 심법에 비해 마나를 쌓는 속도가 배는 빨라.”
이니안은 자신의 몸에 가득한 마나를 느끼며 가늘게 몸을 떨었다. 일반인들에게 마나로 알려진 플러스 마나를 쌓았을 때와 확연히 달랐기에 새로운 느낌도 들었다.
그리고 주변에서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생소한 기운들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마이너스 마나를 수련한 영향인 듯했다.
마령천참공의 책에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상황이 펼쳐질 거라고만 쓰여 있었지, 그 상황이 구체적으로 적혀 있지는 않았다.
지금 이니안은 그런 것에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일단 이곳에서 로즈를 데리고 빨리 빠져나가는 것이 먼저다.”
그랬기에 이니안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가 로즈를 데리고 탈출할 정도의 마나가 모였다고 생각되는 시점에서 축기를 중지했다. 일단 급한 불부터 꺼야 했기에.
덕분에 이니안은 마이너스 마나를 운용하는 마령천참공상의 무공은 하나도 익히지 않은 채 마이너스 마나를 모으기만 한 반쪽짜리 상태였다.
어두운 지하 감옥이었지만 사방의 정경이 또렷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까지는 그저 검게만 보이던 공간들이 하나하나 자세하게 보였다. 주변을 힐끗 쳐다본 이니안은 두 손으로 감방의 철창을 잡았다. 그리고 마나를 운용하여 손에 힘을 주었다.
단단하게만 보이던 철창이 너무나 간단하게 구부러졌다. 자신이 나갈 정도의 공간을 만든 후 이니안은 철창에서 손을 떼고 감방 밖으로 나왔다.
“훗, 결국 다시 마나를 사용하게 되었군. 애초의 결심은 무너지고.”
여러 가지 변명 거리로 스스로를 납득시켰지만 어쨌든 이니안은 자신의 굳은 결심을 무너뜨려야 했다.
“맹세를 깨지 않았다 했으나 깬 것은 깬 것이지. 깨었으나 깨지 않았고, 깨지 않았으나 깼다라…….”
이니안은 힘없이 선 채 공허한 눈으로 감옥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시 찾은 마나로 인해 온몸에 힘이 넘치고 두 눈은 안광으로 번쩍였지만 그것과는 달리 그는 허탈했다.
“하긴… 3년의 세월은 짧은 시간이 아니야. 내가 물러질 만도 하지.”
이니안은 가슴이 뚫린 쉐이나의 시신 앞에서 맹세했다. 앞으로는 절대 약해지지 않겠다고. 강하게 살겠다고.
그는 그것이 차가운 마음에 독심을 품는 것이라 생각했다. 안이하게 생각하고, 모든 것을 즐겁게 생각하고, 따뜻하게 세상을 보았기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라 여겼다.
그때부터였다, 이니안이 말이 없어지고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은 것은.
본디 그는 장난치기 좋아하고 쾌활한 보통의 아이였다. 귀족가의 자제라고는 믿을 수 없는 행동을 곧잘 하는 장난꾸러기. 그것이 이니안이었다. 그런 그의 성정은 나이를 먹어도 변하지 않았다. 성년식을 치른 18세의 생일에도 그 모습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그 일을 겪은 것이다. 성년을 맞은 여름방학에 휴양 차 갔던 곳에서 수상한 이들을 보았음에도 대수롭지 않게 넘겨 버린 그 무른 성격이 모든 일의 원인이었다.
이니안은 그렇게 스스로를 자책했다.
가문을 탓하고 가율을 들먹인 것은 그런 자신의 잘못을 가문에 떠넘기려는 못난 행동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을 이니안은 알고 있었다. 그랬기에 더욱 가문을 거부한 것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지은 원죄라 생각되는 것을 억지로 떠넘겼기에.
그래서 이니안은 차가워졌다. 냉정해졌다.
스스로를 만년의 얼음 굴에 가뒀다.
자신의 못난 성격이 자신을 약하게 만들었기에 강해지기 위해서 차가워졌다. 비록 마나 스피어를 파괴하고 마나를 잃어 육체적으로는 약해졌을지 몰라도 이니안은 스스로 강함을 추구한다 생각했다.
차가웠기에, 냉정했기에, 강한 마음을 가지려 했기에 그는 강해지고 있다 생각했다.
하지만 3년이라는 세월은 그런 이니안의 차가운 마음을 조금씩 녹이고 있었다. 이니안도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래서다.
그래서 이런 어처구니없는 꼴을 당한 것이다. 자신답지 못한 일이다.
자신에게 따뜻함은 어울리지 않았다.
3년이 지나면서 살짝 녹아내린 마음을 다시 얼리기로 마음먹었다. 지금 같은 상태로는 자신은 더욱 약해질 뿐이다. 마나를 다시 찾았다 해도 마음이 이러면 결국은 약해지고, 다시 같은 잘못을 반복하게 된다.
차가워져야 했다.
다시는 그런 악몽과 같은 일을 겪을 수는 없다.
차가워져야 한다.
차가워지자.
만년의 얼음을 가슴에 품어야 한다.
아니, 나 자신이 만년의 얼음보다도 더 차가워져야 한다.
이니안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감방을 빠져나온 이니안은 자신 가득한 걸음걸이로 거침없이 지하 감옥의 깊숙한 곳으로 이동했다. 로즈를 구하기 위해 한시라도 서둘러야 할 상황에서 차갑게 굳은 이니안의 얼굴에는 그것과는 다른 여유가 자리하고 있었다. 되찾은 마나로 인해 그간 잊고 지냈던 여유와 자신감 역시 다시 돌아온 것이다.
“네가 케라우로군.”
차가운 목소리가 이니안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의 결심이 행동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니안은 자신의 성격을 깊숙한 곳에 숨겨놓고 대신 만년의 얼음으로 만들어진 가면을 썼다.
“응? 네놈이 이니안이야? 어째 다른 것 같은데? 일단 말투부터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녀석이 아닌걸?”
케라우는 눈앞에 나타난 이니안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변화였기에.
“네 녀석, 인간이 아니군. 150년간 이곳에 있었다는 것이 사실이었어.”
“키힛, 알아봤나? 대단하군, 한눈에 알아보다니. 나도 이젠 내가 그저 오래 사는 인간이라 생각할 정도인데.”
케라우는 이니안의 말에 자조의 빛을 띠며 웃었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영지로군. 지하 감옥에 뱀파이어를 가둬놓다니.”
“킥킥킥, 그렇지? 이게 다 바실러스 남작 그 죽일 놈의 자식 때문이라고.”
케라우의 입에서 깊은 분노가 흘러나왔다.
“날 이렇게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꼴로 만들어놓다니!”
맹수가 으르렁거리는 듯한 말투. 그 속에는 스산한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한데 말랐군. 피를 못 빨아서 그런가?”
이니안의 눈은 앙상하게 뼈만 남은 케라우의 팔을 향해 있었다.
“설마. 그래도 배려해 주는지 매일 이곳에 들어오는 식사에는 적지만 동물들의 피도 섞여 있다고. 지랄 같은 맛이지만 그래도 덕분에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거지.”
그의 말에 이니안은 얼굴을 찡그렸다. 그 식사를 자신도 역시 먹었기에.
“그럼 왜 그렇게 마른 것이지?”
“왜냐고? 큭큭큭, 왜냐고? 크하하하하!”
이니안의 물음에 케라우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어댔다. 그 웃음에는 깊은 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원한도 분노도 아닌 스스로의 처지와 몰골에 대해 맺힌 한. 그것이 자리하고 있었다.
“왜긴 왜야? 크크크크크, 이게 모두 이 빌어먹을 놈의 저주 때문이란 말이다!”
저주를 외치는 케라우의 얼굴에는 사나운 분노가 자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니안의 냉막한 얼굴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는 상관없는 거리의 사람을 바라보듯 무심한 눈으로 케라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떤 저주일 것 같아? 뱀파이어인 내가 이 어두운 곳에서 이렇게 앙상하게 말라 있다니!”
그간의 한과 분노가 터져 나와서인가? 케라우는 이니안이 묻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많은 말을 쏟아내고 있었다. 이니안은 그런 케라우를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었다.
“갈아 마셔도 시원찮을 코쿠스 녀석이 내 몸에 리버스 스테이트(Reverse State)라는 같잖지도 않은 저주를 걸었어. 뱀파이어인 내가 어둠 속에서는 힘을 잃고 빛 속에서 힘을 얻게 되다니, 이 무슨 말도 안 되는 일이야? 응? 우습지? 우습지 않아? 나는 어둠의 귀족이라는 뱀파이어야. 그런데 지난 150년간 어둠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다고. 세상에 신의 섭리를 거스르는 그런 빌어먹을 저주가 존재하는지는 몰랐어. 몸의 상태를 임의적으로 정반대로 바꿔 버리다니. 나는 하필이면 그게 빛과 어둠에 대한 몸의 상성이 정반대로 바뀌어 버렸어.”
케라우의 두 눈은 살기와 광기로 번들거렸다.
“저기 저 창이 보이나? 응?”
케라우가 손으로 가리키는 곳에서는 가늘지만 한줄기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었다.
“코쿠스 녀석이 무슨 수를 썼는지 몰라도 저곳에서 해가 떠 있는 동안은 쉬지 않고 빛이 들어와. 아주 작은 양이지만. 덕분에 나는 죽지 않고 이렇게 살 수 있었어. 크흐흐흐, 그 빌어먹을 자식이 나를 살지도 죽지도 못하게 만들었다고. 차라리 어둠 속에서 말라죽게 내버려 둘 것이지. 푸하하하하! 왜 저따위 빛을 들어오게 만들어서는 생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악착같이 살게 만드느냐 말이야! 크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
케라우는 광소를 터뜨렸다.
“이곳에서 나가고 싶나?”
뚝.
이니안의 물음에 케라우는 거짓말같이 광소를 멈추고 이니안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꺼내줄 수 있어?”
“난 내가 갇힌 감방에서 나왔다.”
케라우는 가만히 이니안을 바라보았다.
“왜 날 꺼내주려 하는 거지?”
지금까지 보였던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의 케라우. 검게 번들거리는 두 눈동자가 깊이 가라앉아 있었다.
“보답이다. 한 가지에 대해서는 내가 후회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다른 한 가지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게 해주었기에. 내가 버리고 새로 택한 삶에 후회를 남길지도 모를 일을 막을 수 있게 해주었기에.”
말을 좀 길게 했다 생각했는지 이니안은 곧 입을 닫고 여전히 차가운 두 눈동자로 케라우를 바라보았다.
“그럼 꺼내줘. 이 빌어먹을 몸으로는 절대 죽을 수 없어. 난 반드시 자랑스러운 뱀파이어의 몸으로 돌아갈 거야.”
케라우의 대답에 이니안은 케라우가 갇혀 있는 감방의 철창을 좌우로 벌렸다. 케라우는 이니안이 만들어준 공간을 통해 감방 밖으로 나왔다. 몸을 일으킨 케라우는 이니안보다 조금 더 컸다.
“고맙군.”
케라우가 이니안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난 받은 것을 돌려줬을 뿐.”
그 말을 마지막으로 이니안은 몸을 돌렸다. 그리고 케라우의 눈에서 사라졌다. 온 힘을 다해 달리기 시작한 것이다.
“크크크, 이니안이라……. 재미있는 녀석이군. 인간이 어둠의 힘을 품고 있다니. 나와는 또 다른 의미에서 별종인 녀석이야. 재미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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