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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디언 소드-7화 (7/175)

[7]

이니안이 가문에서 얻은 지식은 상당했다. 게다가 이니안은 검법과 암기력, 이 두 가지에 있어서는 천재적인 성향을 보였다. 다른 것은 몰라도 그 두 가지만은 가문에서도 독보적이었다.

물론 검에서는 형을, 암기력에서는 누나를 이기지는 못했지만 그 두 가지가 모두 뛰어난 이는 이니안이 유일했다.

가문에서 보았던 무수한 책들이 이니안의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 있다. 너무 뛰어난 암기력에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것들이.

‘그런데 내가 지금 왜 이러지? 다시는 떠올리지 않겠다고 다짐했건만……. 겨우 3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내가 왜 이러고 있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이니안은 현재 자신의 행동에 의구심을 품었다. 전날 밤에도 여기까지 생각했다가 잠이 든 듯했다. 왜 스스로 봉인했던 가문의 기억까지 열어가며 고민을 하는지 그 원인을 찾다가.

그 순간 한 여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쉐이나…….’

머릿속에 저절로 그려진 아름다운 여인. 바닷빛 머리칼과 에메랄드빛의 눈동자. 자신을 향해 지어주던 밝은 미소. 그 모든 것들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리고 귓속을 간질이는 목소리.

‘이니안 오빠…….’

그 두 가지 위에 다시금 겹쳐지는 얼굴. 코랄 블루의 머리칼과 나뭇잎과 같은 녹색 빛의 눈동자를 간직한 여인, 그리고 그녀의 목소리.

시간이 약이라고, 지난 3년간 이니안의 마음의 상처는 제법 아물어 있었다. 아니, 아물었다기보다는 상처가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잊어가고 있었다.

그렇게 어두웠던 모습을 버리고 조금씩 예전의 밝고 쾌활한 모습을 찾아가고 있었다. 여유롭고 낙관적이며 조금은 장난기가 있었던 그 모습이 요즘 들어 조금씩이나마 돌아오고 있었다.

한데 예상치 못한 일이 연속적으로 일어나며 아픈 기억을, 상처를 건드리고 있었다.

‘젠장, 그때 트롤 따위와 싸우는 것이 아니었어.’

이니안은 11일 전의 선택을 후회했다. 아니, 좀 더 이성적이지 못했던 자신을 책망했다.

11일 전,

이니안은 바운더리 산맥의 끝자락을 이동 중이었다. 수도에서 바운더리 산맥의 끝 부분에 있는 마을로의 편지 배달 일을 끝내고 근처의 큰 영지로 다른 일거리를 찾아서 이동하는 중이었다. 그러다가 재수 없게 트롤을 만난 것이다.

보통 트롤은 주로 깊은 산중에 서식하고 이니안이 이동하던 야트막한 산 언저리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 폭설로 사냥감이 부족해져서인지 그곳에 나타난 것이다. 보통이라면 도망을 가야 했다. 그것이 트롤을 만난 일반인들의 정상적인 대응이었다.

이니안 역시 용병이라 하지만 그의 수준에서는 보통 사람과 같은 대응을 했어야 했다.

하지만 그때 그는 무엇에 씌었었는지 검을 뽑아 들고 싸웠다.

‘그때 내가 정신이 나갔지. 아무리 그놈이 지쳐 보이고 피와 가죽이 탐났다지만.’

그랬다. 그때 이니안이 만난 트롤은 굶주림에 지쳐 있었다.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랬기에 과감해진 것인지도 몰랐다. 칼을 뽑아 덤빌 정도로.

이니안은 정말 필사적으로 덤볐다. 아무리 굶주림에 지쳐 있다 하더라도 상대는 트롤이었다. 트롤을 상대하자고 마음먹은 이상 어중간한 자세로는 어림도 없다.

트롤 역시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줄 사냥감이 나타나자 필사적으로 이니안에게 달려들었다. 둘 모두 필사적이었다.

아무리 약해져 있고 지쳐 있었다 해도 트롤은 트롤이었다. 베어도 베어도 금세 아물어 버리는 재생력. 그 재생력 앞에 이니안은 점차 지쳐 갔다. 트롤에게 자잘한 상처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빠르게 접근해서 단번에 목을 자르거나 심장을 찔러야 했다.

그러나 이니안이 그러한 시도를 하기에는 트롤의 주먹이 너무나 강력했다. 단 한 방만 맞아도 온몸의 뼈가 으스러질 정도로.

일단 자잘한 공격으로 트롤의 주의를 흩어놓으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지독한 배고픔 속에서 발견한 먹잇감이기 때문인지 트롤답지 않게 고도의 집중력을 보이며 이니안에게 덤벼왔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니안은 지쳐 갔다. 그리고 결국 트롤을 잡는 것을 포기했다. 여기까지는 그래도 나았다. 멀리서 맴돌다가 재빠르게 작은 상처를 낼 정도의 공격만 했기에 이니안 자신도 별다른 상처를 입지 않았던 것이다. 그나마 불행 중 다행이라 할 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때부터였다. 도주를 결심한 이니안이 몸을 날리자마자 트롤이 쫓아왔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자신을 따르다 지쳐 나가떨어질 것이라고.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트롤보다 빨리 달릴 수 없다. 아니, 보통은 트롤보다 훨씬 느렸다. 트롤과 인간의 기본적인 덩치의 차이로 인해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가 엄청나게 차이나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니안은 보통 사람과 달랐다. 가문에서 만들어준 몸이 있었다. 가문에서 준 모든 것을 버리겠다 했지만 몸만은 어찌할 수 없었다.

몸 안 가득 채웠던 마나를 모두 흩어버렸음에도 불구하고 튼튼한 몸은 남아 있었다. 일반인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훨씬 오랜 시간을 달릴 수 있는 몸이. 그것도 모두 혹독한 수련 덕이었다.

이니안이 트롤에게 쫓긴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보통의 트롤은 뛰어난 재생력을 지닌 대신 지구력이 형편없이 약했다. 보통 30분 정도만 도망치면 트롤은 제풀에 지쳐 나가떨어졌다. 이니안은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것이 착오였다.

굶주림 속에서 발견한 이니안을 생명의 마지막 한줄기 빛이라 여긴 것일까? 트롤은 죽어라 쫓아왔다. 무려 3일을. 쉬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서. 덕분에 이니안 역시 쉬지도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쫓겼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도망 2일째 세찬 눈보라를 만나기까지 했다. 그 정도면 트롤도 나가떨어질 만도 하건만 끈질기게 쫓아왔다.

이윽고 3일째 되는 날.

결국 트롤은 쫓는 것을 멈췄다. 아니, 정확히는 굶주림과 체력 탈진으로 인해 죽어버렸다. 달리다가 갑자기 푹하고 쓰러져서는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이니안은 3일간을 달린 끝에 트롤을 지쳐 죽게 만든 것이다.

하지만 이미 이니안 역시 한계에 달해 있었다. 그 후 얼마 가지 못해 그 역시 쓰러졌으니까. 그것은 눈보라 속에서 겨우 발견한 동굴로 가던 도중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자신의 앞에 서 있던 사람이 로즈였다.

‘모든 일이 꼬인 것은 그때부터야.’

이니안은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이미 일은 벌어진 후였다. 지금 후회한다고 뭐 하나 달라질 것은 없었다.

이니안과 로즈의 관계가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다고 한다면, 그랬다. 만난 지 이제 겨우 일주일 된 의뢰주와 고용인. 그 정도였다. 물론 첫 만남이 조금 특별하기는 했지만.

‘후우, 사연이 있더라도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봤어야 했나?’

이니안 자신은 남들이 자신의 과거를 들추는 것을 싫어했기에 굳이 자신도 다른 이의 사연을 들추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은 것이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여행자를 어새신들이 추적할 리 없다. 그리고 그 비싼 스크롤 카드를 그렇게 가지고 있을 리도 없고.’

이니안은 자신의 상처 때문에 로즈가 꺼낸 스크롤 카드를 똑똑히 확인했다. 힐링 마법이 담긴 스크롤 카드는 그중에서도 특히 고가품이다.

‘분명 무언가 있는 아이가 분명해. 그렇다고 지명수배를 당할 만한 일을 저지른 아이 같지는 않았는데…….’

그러기에는 로즈의 두 눈이 너무나 맑았다. 용병 생활을 하며 온갖 사람들을 만나보았기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절대 남을 해할 만한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고 있었다.

‘정말로 이곳의 영주가 흑심을 품고 그런 것인가? 하긴, 그때 경비병 녀석들의 행동이 수상쩍긴 했지. 너무 피곤한 나머지 무슨 일이 있을까 싶어서 무시했었는데… 어리석었어.’

후회와 후회, 반성과 반성이 이어지고 있었다. 자신의 부주의로 인해 이런 궁지에까지 몰린 것이 너무나 한심했기 때문이다.

이미 이니안은 거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다. 그 결론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지금도 눈을 감으면 이니안의 눈앞에 나타나는 한 여인이었다.

아니, 여인이라기에는 풋풋하고 소녀라기에는 성숙한 외모를 지닌 아이 쉐이나.

이니안의 가슴에 커다란 아픔으로 자리하고 있는 그 아이가 지금 살풋 미소 지으며 이니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지금 내가 이 감옥을 벗어나는 것은 불가능해. 당연히 로즈도 구할 수 없지. 하지만 잃어버린 마나만 되찾는다면 그 정도 일은 우습다. 내가 스스로 마나의 저장고인 마나 스피어를 파괴해서 이제 다시는 마나를 모을 수 없는 몸이지만 그래도 하려고 한다면 방법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야.’

이니안의 두 눈이 빛났다. 확고한 결심에 찬 눈이다.

“너도 내가 그러기를 바라는 거야, 쉐이나?”

낮게 중얼거리는 혼잣말.

하지만 이니안은 분명 그 혼잣말에 대한 대답을 들었다.

‘헤헤헤, 이니안 오빠.’

아직은 이니안 자신이 어린 나이이던 열다섯에 보았던 쉐이나의 천진난만한 웃음소리가 귀에 울렸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쉐이나의 환영. 그 환영에 겹쳐져 자신을 애처로이 바라보던 로즈의 얼굴.

“그래, 다시 한 번 같은 후회를 할 수는 없지. 지킬 수 있었음에도 내가 결단을 내리지 못해 지키지 못한 것은 한 번이면 족해.”

이니안은 결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방법이 있으면 실행해야지. 나의 알량한 자존심 따위, 생각할 것이 못 돼. 3년 전에도 알량한 가율 따위에 얽매여서 소중한 사람을 잃었으니까.”

이니안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머릿속에 잠자고 있던 봉인된 기억을 깨웠다.

마나 스피어(Mana Sphere).

모든 사람이 단 하나 가지고 있는 마나의 저장소이다. 사실 이런 것이 인간의 몸에 있다는 사실을 대륙 대부분의 인간들은 몰랐다. 오직 이니안의 가문에서만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니안은 그런 마나 스피어를 스스로 파괴했다. 자신이 알고 있는 한 어떠한 방법으로도 이제 자신은 마나를 모을 수 없다. 마나 스피어에 마나를 모으지 못한다면 자신 역시 보통의 평범한 용병에 불과할 뿐이다.

하지만 이니안은 방법이 있었다. 자신이 집 안 모처에서 발견한 책. 그 책은 인간의 몸에는 두 개의 마나 스피어가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가문의 서고에는 없던 책이다. 어떤 연유로 그 책이 그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이니안은 그 책을 얻었고, 그 내용도 숙지하고 있다.

가문의 그 누구도 생각할 수 없는 놀라운 내용을 담고 있는 책.

마나 스피어. 그것은 이니안 가문의 상징이었다. 그랬기에 그것을 흩어버렸고, 다시 만들 방법이 있음에도 만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니안은 결심했다. 로즈를 구하기 위해 또 하나의 마나 스피어를 자신의 몸에 만들기로.

‘마령천참공(魔靈天斬功), 그것이라면 가능하다.’

이니안의 두 눈이 어둠 속에서 반짝 빛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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