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젊고 아름다운 여자 의뢰주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지명수배지. 수법도 하나도 안 변했어.”
“대체 무슨 말이지?”
케라우의 말에 결국 이니안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이곳의 영주는 대체로 괜찮은 녀석이야. 영지민 입장에서는 말이지. 날 이곳에 가둔 그놈이라면 분명 자기 자손들도 그렇게 만들어놨을 거니까. 치밀한 녀석이거든. 하지만 예외가 존재하는데, 바로 네 경우가 거기에 속한다.”
케라우의 말에 이니안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 땅에서 영주를 하고 있는 녀석들, 대대로 색골이야. 엄청 밝히지. 어떻게 그런 기질이 피를 타고 이어져 내려가는지는 몰라도 내가 알고 있는 2대는 분명 아버지와 아들이 엄청난 색골이었어. 하지만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여전한 것 같군.”
“뭐?”
이니안의 눈에 불꽃이 튀었다.
“그렇다면 황제의 인장이 찍힌 수배지는?”
이니안이 미오나인 제국 출신은 아니지만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를 귀족들이 감히 위조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위조문서가 있다면 그것은 목숨을 내놓고 사는 뒤쪽 세계에서의 일이었다.
“그까짓 거, 위조하면 그만이야.”
“뭐? 이런 시골 영지의 영주가? 미쳤군.”
“고작 자작이라 얕보고 있군. 나도 이유는 모르지만 바실러스 집안은 상당한 실력의 마법사 집안이야. 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영지에 만족하고 웅크리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마법을 가지고 있는 제법 위험한 녀석들이지. 뭐, 그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마법 때문에 스스로를 숨기는 것인지도 모르지만. 완벽하게 인정받고 올라설 때를 기다리느라고.”
“그게 왜?”
“그들의 실력이면 황제의 인장이 찍힌 문서 따위는 진짜보다 더 진짜같이 만들 수 있어. 실제로도 이미 150년 전부터 그 수법으로 지금까지 상당한 여자들을 욕보였고. 그런 대단한 마법을 고작 그런 일에 사용한다는 것이 우습기는 하지만. 킥!”
케라우는 정말 우습다는 듯 웃었다. 그의 말속에는 바실러스 자작에 대한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자리하고 있었다.
‘원한인가?’
이니안은 그것이 원한일 거라 생각했다. 자신이 저런 모습이었던 때를 분명 기억하고 있었기에.
“아무튼 그 짓거리로 무수한 여인을 욕보이면서 동행이 있으면 모조리 이곳에 가뒀어. 그리고 죽을 때까지 방치하지. 위조한 지명수배지로 데려간 여자들은 적당히 만족할 만큼 데리고 논 다음 다른 나라로 팔아버리고.”
그리고 케라우는 입을 닫았다. 바실러스 가문에 대한 이야기를 한 것이 기분 나쁘다는 듯.
이니안에게 또 다른 고민이 찾아왔다. 케라우의 말이 진실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없었지만 어쨌든 로즈가 상당히 위험한 상황에 처한 것이다. 다시 이니안은 고민에 빠졌다.
***
“그래, 어떻게 되었나?”
바실러스 자작은 자신의 충실한 기사인 마커에게 물었다.
“자작님의 짐작대로입니다.”
마커는 자작을 향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만약 그가 조사한 것이 사실이라면 보통 일이 아니었기에 절로 목소리가 작아졌다.
“역시 그렇단 말이지? 흐음.”
마커의 보고에 자작은 입을 닫고 생각에 잠겼다. 그의 오른손이 의미 없이 턱 주변을 이리저리 움직였다.
“지금 무얼 하고 있지?”
“시녀 둘을 들여보냈습니다. 그들이 알아서 잘할 겁니다.”
“그래? 알겠네. 조금도 불편하지 않게 잘 모시도록 하게, 날이 밝는 대로 수도에 연락을 넣을 테니.”
“알겠습니다.”
“그럼 나가보도록 하게.”
자작의 말에 마커는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는 방에서 나갔다. 마커가 나가자 자작은 방 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몸을 묻었다.
“알 수 없군.”
고민에 잠긴 그의 두 눈 사이에 주름이 졌다. 이번 일은 제대로 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그의 상식선에서는 모든 것이 혼란투성이었다.
“일단 그녀가 왜 수배자가 되어야 하지? 적어도 제국 내에서 그녀를 어찌할 수 있는 사람은 단둘뿐이야. 그런데 떡하니 수배가 되다니. 그 두 사람 중 한 사람에 의해서 말이지. 아니, 그전에 어떻게 수도에 있어야 할 사람이 이런 시골 영지에 나타날 수 있는 것인지……. 수배지가 배포될 때부터 믿지 않았건만. 게다가 가명을 사용하다니……. 으음.”
자작의 독백 속에서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대답을 구할 수 없는 의문들. 수도에서 멀리 떨어진 이런 시골에서는 수도 상층부의 정보를 제대로 알 수 없었기에 더 더욱 혼란은 컸다.
분명 자신과는 다른 세상에 있어야 할 인물이 같은 세상으로 왔다. 그것도 초라한 B급 용병을 옆에 달고, 자신은 견습 용병이라는 신분으로. 자신이 우려했던 꽤나 거친 대접을 받으며.
처음 경비대장으로부터 그 소식을 접하자마자 황급히 마커를 내려 보내기는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병사들이 어찌했을지는 안 봐도 뻔했다. 수도에서 온 지명수배지에 그녀의 본명과 신분 따위는 표시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상세한 용모파기와 황제의 인장이 찍힌 ‘지명수배’라는 네 글자가 전부였다.
사실 그 와중에 훌륭히 수배지에 그려진 그녀의 용모파기를 기억해 체포한 성문 경비 병사들에게 상을 줘야 할 판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자작은 마커가 가지고 온 보고서를 천천히 읽으며 다시 한 번 의아함을 감출 수 없었다. 자신이 알고 있는 그녀의 정보와는 제법 다른 부분이 보였기에. 하지만 분명 그녀가 확실했다.
“아무래도 지명 수배를 한 이유는 이것 때문인 것 같군. 아무튼 수도의 녀석들이란……. 뭐, 나에게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지. 확실히 수도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려 하는 모양이니까. 오랜 세월 기다려 오기만 한 나에게는 이것이 하나의 기회가 될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렇게 말하는 바실러스 자작의 입가에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욕망이라는 이름을 가진 추악함이 잔뜩 물든 미소가.
***
간밤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모른다는 듯 바실러스 영지에 아침이 밝았다. 찬연한 태양 빛은 어제와 조금도 다름이 없었다. 이 영지에서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지하 감옥의 이니안 혼자였다.
“아함, 벌써 아침인가? 역시 아침의 상쾌한 공기는 기분이 좋군. 이봐, 이니안. 그만 일어나는 게 어때? 아침이야. 계속 그렇게 차가운 바닥에 누워서 자면 입 돌아간다.”
이니안은 옆방에서 들려온 케라우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내가 잠이 들었었나?”
간밤에 케라우에게 들은 여러 가지 사실들에 대해 고민하다가 자신도 모르게 잠이 든 듯했다. 아침이라는 케라우의 소리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여전히 주위는 어두컴컴했다. 창문 하나 없는 지하 감옥이니 당연한 일이다.
“아침이라고? 외부와는 완전히 단절된 곳에서 어떻게 알 수 있지?”
이니안이 몸을 일으키며 물었다. 그의 목소리는 한없이 늘어져 있었다. 앞으로의 일에 대한 고민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으윽, 냉기가 뼛속까지 스며들었어. 하긴 이렇게 얇은 옷을 입고 이런 곳에 방치되었으니까.’
겨우 하룻밤 이곳에 있었을 뿐인데 차가운 냉기에 뼛속까지 시려옴을 느낄 수 있었다. 현재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지만 이렇게 약해진 것은 자신이 선택한 길이다. 받아들여야 했다.
‘후우, 성의 지하 감옥이라니……. 어머니께서 아시면 기절하시겠군.’
잠시 어머니를 떠올린 이니안은 자조의 미소를 지었다.
“외부와 단절된 지하 감옥임은 맞지만 내 방은 특수해서 말이야. 이미 150년이나 갇혀 있었지만 이런 나를 가두려면 특별한 배려가 필요하지. 크크크.”
또다시 들려온 말도 안 되는 소리에 이니안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케라우의 어조는 그런 이니안의 귀를 잡아끌었다.
‘뭘까?’
케라우의 목소리에는 깊은 분노가 잠재해 있었다. 그 대상이 바실러스 자작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대체 어떻게 하면 저토록 깊고도 어두운 분노를 키워낼 수 있는지 이니안은 알 수 없었다.
이니안이 좌절에 빠지고 분노를 느꼈던 것은 스스로의 무능함이 원인이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타인에 대해 저런 분노를 가진 자를 만난 적이 없었기에 잠시 케라우라는 자의 사정에 대한 호기심이 피어올랐다.
철컹!
그때 지하 감옥 철문의 빗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벅거리는 발자국 소리와 함께 병사 하나가 양손에 무언가를 들고 내려왔다.
“아침이다.”
냉막한 한마디 말과 함께 찌그러진 금속 그릇 하나가 철창 사이로 쑥 들어왔다. 그는 이니안의 철창에 그릇을 넣어준 후 곧장 다른 곳으로 향했다. 아마도 케라우가 있는 감방으로 가는 것이리라.
“내 말이 맞지?”
옆방에서 케라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아무런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의 확인일 뿐이다.
“대체 네 방은 무엇이 다른 거지?”
“직접 내 입으로 말해주기는 싫어. 네가 혹시라도 직접 내 방을 보게 된다면 알게 될 거다. 찢어 죽여도 시원치 않을 코쿠스 바실러스 녀석이 저지른 지독한 짓을.”
케라우는 거기까지 이야기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다는 기운이 벽을 넘어 이니안에게도 전해졌다. 이니안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조금 전 철창을 넘어 들어온 아침 식사에 눈을 돌렸다.
“이걸 먹으라는 건가?”
그릇에 담긴 음식을 보는 순간 이니안의 얼굴이 확 일그러졌다. 용병 생활을 하다 보면 항상 좋은 것만 먹고 지낼 수는 없다. 아니, 제대로 된 음식을 먹지 못할 때가 더 많았다.
그런 용병들 사이에 오크 죽이라 불리는 음식이 있다. 보통 사람이라면 절대 먹지 못할 그런 잡탕 죽이었다. 끓이는 용병조차 그 재료가 무엇인지 모르는 그런 음식이다.
그런 것도 먹으며 지냈던 이니안이건만 이건 도무지 아니었다. 대체 이걸 사람이 먹으라고 만든 음식이란 말인가? 정체를 알 수 없는 음식은 지독한 악취를 풍기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먹는 음식에서 악취라니? 보통 악취라 하면 사람이 먹다 버린 음식이 며칠간 방치된 후에야 나는 냄새를 칭한다.
“젠장, 그 말이 이런 뜻이었군.”
이니안은 전날 밤 자신의 손을 묶은 밧줄을 잘라주던 병사의 말을 떠올리며 욕지기를 삼켰다.
“그래도 살려면 잘 먹어두라고. 이곳에선 그것도 감지덕지니까. 하긴, 끝내 음식에 적응 못하고 굶어 죽은 멍청한 놈들도 한두 녀석 있었지. 후루룩.”
케라우는 보지 않아도 이니안의 심정을 아는 듯 말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 150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오래 이곳에 있었음이 분명했다.
‘후우, 먹긴 해야겠지?’
케라우의 말이 사실이었기에 이니안은 힘겹게 그릇 한 켠에 아무렇게나 꽂혀 있는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한 술 떠서 두 눈을 꽉 감고 입 안으로 가져갔다.
‘젠장, 지독하군.’
음식이라고 그릇에 담겨온 것을 입에 넣자 그 지독한 악취가 목구멍을 타고 코로 올라왔다. 마치 자신의 몸속에서 그런 악취가 나는 듯한 끔찍한 느낌이 머리를 꿰뚫고 지나갔다. 혀는 이미 마비된 지 오래였다.
“크윽!”
“푸하하하! 그거 먹는다고 죽지는 않아! 오히려 먹어야 살지! 그러니까 그런 끔찍한 소리 내지 말고 먹어두라고! 쩝쩝!”
케라우가 내는 요란한 소리에 구역질이 치밀어 올랐다. 아니, 어떻게 이따위 것을 쩝쩝거리면 먹을 수 있단 말인가? 억지로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이니안은 곧 그 동작을 멈췄다.
잠시 잊고 있었던 전날의 고민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이니안은 손에 들고 있던 것을 바닥에 내려놓고 감방의 벽에 등을 기댔다. 거의 절반 정도의 결론은 나와 있는 고민이다. 그럼에도 이니안은 그 결론을 무시하고 다시 고민에 휩싸였다.
‘어찌해야 할까? 어떻게?’
이니안의 머리에 무수한 상념들이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동시에 그가 알고 있는 무수한 지식들 역시 머리에 한 번씩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가문의 기억까지도.
‘방법은 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내 머릿속에 분명 이 상황을 벗어날 방법이 존재하고 있다.’
이미 전날 떠올렸던 결론. 그것을 다시 한 번 떠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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