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디언 소드-1화 (1/175)

가디언 소드 - 신가

[1]

서장.

책상 위에 곱게 놓인 한 통의 편지, 그리고 그 옆에 반듯하게 놓인 검 한 자루. 그것을 지켜보는 공작의 눈이 파르르 떨렸다. 전날 심한 언쟁을 하기는 했지만 설마 이런 일을 벌일 줄이야…….

“후우……!”

편지를 읽은 공작의 입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공작은 고개를 저으며 책상에 편지를 다시 올려놓았다. 침착하게 행동하는 듯 하나 그의 머릿속은 혼란으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심하게 떨리는 걸음걸이가 그런 공작의 마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 순간, 어디선가 작은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에 공작이 놓아둔 편지가 하늘거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떨어지는 편지 위로 언뜻 보이는 문자들의 나열.

…그래서 저는 사이몬이라는 성을 버릴 것입니다. 가문이 제게 준 모든 것들을요. 일단 그동안 쌓은 마나 스피어(Mana Sphere)의 마나를 모두 흩어버렸습니다. 소드 마스터라는 저의 경지는 가문으로부터 받은 것이나 다름없으니까요. 훗, 저는 더 이상 소드 마스터가 아닙니다. 검도 여기에 두고 갑니다. 하지만 머릿속에 든 건 어떻게 할 수가 없군요. 마법사에게 기억 소거 마법이라도 걸어달라고 해야 하는 것인지……. 하지만 가문에서 얻은 기억만을 선택적으로 지울 수는 없을 테니 그것은 그만두기로 했습니다. 그 아이와의 추억을 지울 수는 없으니까요.

그럼 안녕히 계십시오. 그리고 절 찾지 마십시오. 저는 더 이상 사이몬이 아닙니다.

열려진 창에서 불어온 바람에 바닥으로 떨어지던 편지는 잠시 공중으로 날아올랐다가 다시금 천천히 내려앉았다.

“응?”

힘겹게 걸음을 옮기던 공작이 잠시 멈춰 서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환청이었나?”

바람과 함께 공작의 귀에 울린 그 소리.

그 소리는 편지만 남겨두고 집을 떠난 무심한 아들이 기분이 좋을 때면 즐겨 부르던 휘파람 소리였다. 하지만 바람이 멈춤과 동시에 그 소리도 사라졌다.

공작이 나가자 편지와 검만이 쓸쓸히 주인 없는 방을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1장. 빵 두 조각과 차가운 우유 한 병이면 충분해

바람이 분다. 보통 바람이 아니다. 거센 바람이다. 게다가 천지를 하얗게 뒤덮고 있는 눈. 그렇다. 지금 눈보라가 치고 있는 것이다. 그 눈보라를 헤치고 걷는 인영이 있다. 로브로 온몸을 둘러싸고 힘겹게 걸음을 옮기는.

“응? 저건?”

걸음을 옮기던 인영이 무엇인가를 발견한 듯 멈춰 섰다. 얼어버린 입에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의외로 여자 아이의 미성이다.

“동굴이다.”

로브의 주인이 동굴을 발견한 것이다. 이런 눈보라 속에서 동굴을 발견했다면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동굴 속에서 몸을 쉬어가는 것은 당연한 선택이다.

이제 쉴 수 있다는 생각에 힘이 솟아난 것일까? 어느새 동굴의 입구 지척에 당도해 있었다.

푹.

그때,

그녀는 무엇엔가 걸린 듯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야야! 이런 데 돌부리가 있을 게 뭐람?”

넘어진 사이, 차가운 눈이 로브 자락을 헤치고 옷 속으로 들어왔다. 그 차가움이란……. 그녀는 자신을 눈 구덩이에 박히게 한 돌부리가 있을 법한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응?”

이상했다. 돌부리가 있는 곳치고는 눈이 쌓인 모습이 기묘했다. 이건 마치…….

그래,

사람이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몸통과 머리가 있었고, 팔과 다리로 보이는 네 개의 기다란 부분이 있었다.

“설마?”

눈이 쌓인 모양이 쓰러진 사람의 모습과 똑같다는 것을 알아차리자마자 로브의 주인은 재빠른 동작으로 그 부분의 눈을 치웠다.

“이런 날씨에 이런 곳에 쓰러져 있다가는 죽는다고.”

목소리는 다급했다. 눈을 치울 때마다 드러나는 형태가 사람이 쓰러져 있음을 확신케 했기 때문이다.

“역시…….”

머리 부분을 먼저 치운 덕에 금세 사람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엎드려 있는 듯 머리가 옆으로 돌아가 있었다.

“사, 살아 있을까?”

이미 죽어있는 거라면 이 사람이 시체라는 생각에서였을까? 여자 아이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이, 이봐요?”

막상 사람의 얼굴이 드러나자 더 이상 어찌할 줄을 모르고 조심스레 쓰러진 사람을 불러본다. 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려 있었고, 입술 역시 새파랬다.

“이봐요?”

이번에는 조금 전보다 좀 더 큰 소리로 부른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미동도 없다.

“주, 죽었나?”

시체라 생각되자 자신도 모르게 목소리가 떨려 나온다.

들썩.

그때였다. 팔이라 생각되는 부분이 살짝 움직였다.

“방금… 분명 움직였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에 자신 없이 중얼거린다. 그래도 조금 더 얼굴 가까이 다가가 손가락으로 쿡쿡 찔러본다.

“이봐요, 살아 있으면 반응을 보여봐요.”

꿈틀.

얼굴을 찌른 것에 반응한 것일까? 안면의 근육이 살짝 움직였다. 그 모습에 로브의 주인이 천천히 오른손을 정체불명의 남자의 코끝으로 가져간다. 이미 동상에 걸리기 직전의 손이라 감각이 무뎠지만 분명히 숨결이 느껴졌다. 아주 미약해 곧 죽을 사람의 그것 같기는 했지만 말이다.

“확실히 살아 있어!”

살아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시체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자 용기가 생긴 것일까? 그녀는 주위의 눈을 재빠르게 치우고 양다리를 잡아서 질질 끌었다.

그녀의 체격과 체력으로는 남자를 안고 가기는커녕 이렇게 끌고 가는 것도 버거웠다. 곧 그녀의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얼었던 몸도 녹았다. 혼자 걷기도 힘든 눈길을 사내를 끌고 가려니 무척이나 힘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굴하지 않고 계속 걸음을 옮겼다.

동굴 입구의 지척에서 이 사람을 발견한 것 같은데 좀처럼 동굴에 도착할 수가 없었다. 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힘겹게 움직여 그녀는 겨우겨우 동굴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동굴 내부는 그리 크지도 깊지도 않았다. 사람 대여섯 명이 들어서 앉으면 꽉 찰 정도였다.

그것이 오히려 그녀에게는 다행이었다. 짐승들이 거처로 삼기에는 작았기에 동굴에는 어떠한 흔적도 없었다. 그리고 눈과 바람을 피하기에는 충분한 크기였다.

“휴우, 겨우 다 왔네.”

로브에 달린 후드를 벗고 이마의 땀을 닦는 그녀의 얼굴은 땀범벅이 되어 있었다. 소녀보다는 성숙했지만 여인이라 불리기에는 어딘가 어린 감이 있는 외모다.

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칼이 묘한 매력을 풍겼다. 새하얀 얼굴로 살짝 흘러내린 푸른빛 머리카락. 푸른빛은 푸른빛이되 어딘가 좀 더 신비스러운 빛깔이었다. 바닷속에 있는 산호 같은. 굳이 말하자면 코랄 블루(Coral Blue), 그러니까 산호빛이 나는 푸른색의 머리칼이라고 할까?

그리고 커다란 눈과 그 가운데의 녹색 눈동자는 머리칼과 절묘한 조화를 이루며 소녀의 얼굴을 아름답게 만들어주었다. 거기에 오뚝한 코와 도톰하면서도 크지도 작지도 않은 붉은 입술은 계란형의 얼굴과 부드럽고도 갸름한 턱 선과 너무도 잘 어울렸다.

사내를 끌고 오느라 힘을 써 전신이 땀범벅이었지만 그녀는 로브를 벗는 어리석은 짓을 하지는 않았다. 체온의 상승은 과한 에너지를 쓴 것에 따른 일시적인 작용일 뿐이다. 땀이 식으면 체온 역시 급격히 식을 터, 지금은 오히려 몸속의 열이 달아나지 않도록 잡아두는 것이 중요했다.

그녀는 동굴 주변을 훑어보았지만 아무것도 없었다. 사람이 거주한 적이 없던 곳이니 쓸 만한 것이 있을 리 없었다.

“어쩌지? 이대로 있다간 나도 이 사람도 얼어 죽을 텐데…….”

바람은 들어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차가운 공기는 쉬지 않고 동굴 입구로 들어왔다. 살을 에는 바람은 없었지만 몸을 떨게 만드는 추위는 여전했다.

“어쩔 수 없어.”

그녀는 로브를 벗어 동굴 입구를 막았다. 동굴 크기에 비해 입구가 작아 한 사람이 겨우 드나들 정도였기에 그녀의 로브로도 충분히 막을 수 있었다. 일단 입구를 막은 후 그녀는 등에 메고 있던 가방에서 작은 카드를 꺼냈다.

그 카드를 보는 그녀의 눈동자에 진한 갈등이 어렸다.

“이게 마지막 불꽃 카드인데…….”

어찌할지 결정하지 못한 망설임이 가득한 음성. 하지만 이내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지. 지금 죽어가는 사람이 눈앞에 있는걸. 일단 살리고 봐야지. 앞으로는 어떻게든 된다고 믿고.”

그녀는 아쉬운 눈으로 카드를 잠시 바라보더니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카드를 북 찢었다.

“불꽃.”

그녀의 작은 중얼거림과 함께 찢어진 카드는 제법 커다란 불꽃으로 화해 동굴 한가운데에서 훈훈한 열기를 뿌리기 시작했다.

“동굴이 작으니까 금방 따뜻해지겠지. 앞으로 다섯 시간은 지속될 테니까.”

그녀가 찢은 것은 마법 아이템이었다. 스크롤 카드라 불리는 것으로, 종류가 무척이나 다양하다. 그중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여행자용 불꽃 카드로 난로 대용이었다.

지금과 같이 몸을 녹여야 하는데 주위에 아무것도 없을 때 응급 대책으로 사용하도록 만들어진 카드였다.

과연 그녀의 말대로 동굴의 공간이 작은 덕인지 금세 동굴 안이 훈훈해졌다. 입구를 막은 두꺼운 로브가 열기가 밖으로 달아나는 것을 막는 동시에 외부의 한기가 침습하는 것을 막았기에 효과는 더욱 빨리 나타났다.

“이 사람, 왜 그렇게 쓰러져 있었을까?”

그녀는 그제야 자신이 끌고 온 남자를 자세히 바라보았다.

얼굴은 한마디로 잘생겼다. 제법 고생을 한 듯 지저분하기는 했지만 그것이 본디 타고난 얼굴을 가리지는 못했다.

반듯한 이마에 적당한 높이의 코, 하얀 얼굴, 짙은 눈썹, 거기에 검은 머리카락까지 모두가 잘 어울렸다. 어느 것 하나만 달라졌어도 못생겼다는 생각이 들 수 있는 얼굴이었는데, 절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그도 여행자인지 몸에 로브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춤에는 낡은 검이 하나 매달려 있었다.

“기사인가?”

검을 발견한 그녀가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기사라고 하기에는 그의 행색이 너무나 남루했기 때문이다.

“용병이겠지?”

곧이어 확신하는 듯한 어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남루한 행색에 검을 찬 여행자라면 용병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위험하지는 않겠지?”

용병들의 거친 성격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다. 게다가 좁은 동굴에 자신은 여인의 몸. 낯선 사내, 그것도 용병으로 보이는 사내와 이 좁은 동굴에 같이 있게 되다니…….

다급한 마음에 무작정 이 사람을 끌고 올 때는 생각하지 못했던 것들이 하나둘 걱정이 되어 그녀의 머릿속에 피어올랐다.

“으으…….”

그런 복잡한 마음으로 낯선 사내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때 그의 입에서 신음 소리가 흘러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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