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45 : Tokyo Game Show. (3) >
몇 번인가 주먹을 내지르며 기합을 외치던 네가타씨는 잠시 후, 자신의 덩치보다 훨씬 커다란 NEGA 새턴 콘솔 모형을 짊어진 채 모습을 드러냈다.
그 순간 조그만 부스안에 모여 있던 학생들은 사뭇 진지한 그의 표정에 풋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그럼 다녀 오겠습니다.”
“부탁 드립니다. 네가타씨!! 당신의 손에 저희 새턴의 미래가 달려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유카와씨. 맡겨 주십시오.”
네가타씨가 살짝 고개를 숙이자,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NEGA 부스 행사 담당자는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어라? 저 사람은?”
행사 담당자를 바라보며 나도 모르게 튀어 나온 한마디에 옆에 있던 스즈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선생님도 아시는 분이세요?”
“글쎄.. 개인적으로 아는 건 아니지만, 상당히 유명한 사람이지.”
“정말요?”
유카와 전무... 아니 지금은 직급이 상무쯤 되려나?
NEGA 부스에서 서로의 손을 맞잡고 있는 저 두 사람은 각각 NEGA를 대표하는 CF 스타들이었다.
등에 짊어진 새턴 모형을 보면 알겠지만, 네가타 산시로는 자신의 이름을 이용한 말장난으로...
그리고 유카와 상무는 차후 새턴의 차세대 콘솔이자, 마지막 콘솔인 ‘일루젼 캐스트’를 위해 간부직임에도 불구하고 홍보에 전면적으로 나선 사람이었다.
일루젼 캐스트의 발매 때부터 NEGA가 콘솔 사업을 포기할 때까지, 그는 NEGA를 위해 진실 되게 일한 몇 안되는 사람중에 하나였다.
네가타 산시로가 둘러맨 NEGA 새턴에 유카와씨가 전원 버튼을 눌러주자, 이제껏 모형인 줄로만 알았던 소품에서 비장한 음악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히이익... 저거 쥬크 박스였냐?’
마치 ‘진군가’ 떠올리게 하는 비장한 사운드와 함께 다소 황당 무게한 CF가 NEGA 부스에 설치된 각종 스크린에 떠올랐다.
오락의 길에 혼을 담은
한 명의 사나이가 오늘도 간다.
진지하게 플레이 하지 않는 녀석들에게
몸으로 깨달게 해주마!!
네가타 산시로~!!
네가타 산시로~!!
네가사탄 시로~!! (NEGA 새턴 해라~!!)
“히이익!! 뭐야 저게?”
“방금 날아오는 야구공을 가라데 킥으로 찬거야?”
“거기다 홈런이었어...”
약을 한 사발 들이키고 만든 CF 내용에 전문 학원의 제자들의 동공이 흔들렸다.
일본 열도의 게이머들에게 바치는 진혼곡인 ‘NEGA 새턴 해라’는 2절까지 마친 후. 이어지는 간주 부분에 네가타 산시로씨의 나레이션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이여! 진지하게 몰두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목숨을 걸로 열중하고 있는 것이 있느냐!!
NEGA 새턴을 해라.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히이익... 저 말은 굶어 죽어도 손가락이 부러질 때까지 게임이나 하라는 건가?”
... 어릴 땐 중2병 버프 덕분에 굉장히 멋지다고 느껴졌었는데, 제법 세월이 흘러 이렇게 직접 눈앞에서 보니, 엄청나게 촌스러운 멘트구나..
오글거림에 손가락이 굽어져 퇴화할 것만 같다. 하지만 나와 함께 부스에 있던 남학생들은 자신의 앞을 지나가는 네가타씨를 향해 파이팅을 외쳤다.
“네가타 산시로씨!! 힘내세요!!”
“당신은 영원한 나의 가면 라이더 입니다!!!”
그러자 입구 쪽으로 달려가던 그가 빙글 몸을 돌려 학생들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었다.
“오오~!! 그래. 나를 응원해 주는 너희도 꼭 NEGA 새턴 해라~!!!”
그리고 잠시 후. 거의 침대 매트리스만 한 두께의 NEGA 새턴 쥬크 박스를 짊어진 그가 회장 밖으로 나서자, 대기하고 있던 사람들 입에서 엄청난 함성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우왓!! 가면 라이더 1호기!!”
“억!! 저게 뭐야!?”
“너희들~!! NEGA 새턴~ 해라!!”
그는 쥬크 박스에 함께 연결 되어 있는 거대한 새턴 패드를 바닥에 내려 놓더니, 하단 지르기로 콘트롤러의 버튼을 호쾌하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에 행사장 입장만 지루하게 기다리던 이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NEGA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오오~!! 열혈이다!! 근성이 느껴져!!”
헉... 이제 그만, 솔직히 까놓고 말해. 그가 퍼포먼스를 진행할수록 손과 발이 퇴화하는 느낌이다. NEGA의 행사 부스에 설치된 외부 중계 카메라를 바라보던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렸을 때는 저 모습이 왜 그리 멋져 보였던 걸까...? 추억에 대한 보정 효과가 좀 심하게 들어갔었나?’
스즈코에게 컨퍼런스 스케쥴에 대해 간단히 설명을 마친 나는 잠시 예전에 재밌게 보았던 일본의 CF 몇 개를 떠올려 보았다.
“그러고 보니 환타 음료수 CF도 엄청 재밌었는데..”
한국이랑은 개그 코드가 조금 다르긴 하지만, 어린 시절에 본 CF 중에선 환타 선전이 가장 인상에 남아 있었다. 갑자기 떠오른 옛 기억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펜타곤 부스로 돌아갔다.
&
그후로 한시간 정도가 흐른 뒤.
행사장 전체에 박람회 시작을 알리는 알람이 울리자, 6개의 입구에서 관람객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펜타곤 부스는 어디냐!!”
“무슨 소리야, 컨퍼런스가 가장 먼저 열리는 곳으로 가서 자리 잡아야지!! 센소니... 센소니 부스로 빨리!!”
“우와아... 규모가 엄청나구나.. 역시 게임 전문 박람회다보니 CES랑은 차원이 다르구나~”
행사장에 들어온 관람객들은 저마다 도쿄 게임쇼의 규모에 감탄하며 행복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엑스포가 일반인들에게 인류의 미래 과학을 보여주는 박람회라면, 게임쇼는 차후에 출시될 모든 게임 정보를 가장 먼저 보여주는 게이머들의 성지와도 같은 곳이었다.
행사가 시작하기 전 한적하기만 했던 박람회장은 사방에서 몰려드는 관람객으로 인해 순식간에 발디딜 틈 조차 없을 정도로 가득 차오르기 시작했다.
‘나도 중학생 때에는 이곳 도쿄 게임쇼에 한 번이라도 와 보는게 소원이었던 적이 있었지...’
하지만 그렇게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설레었던 도쿄 게임쇼에 참가한 것도 모자라 오후에는 컨퍼런스까지 준비하고 있으니,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박람회가 열리자마자 펜타곤 소프트를 찾아온 게이머들은 컨퍼런스가 열리는 오후 1시까지 새하얀 장막으로 가려진 펜타곤 에리어를 바라보며 실망감과 기대감을 동시에 비쳐보였다.
“아, 드래곤 엠블렘 구경하러 왔는데. 아직 발표 시간 전이네...”
그때 펜타곤 부스 근처에 설치된 라온 단말기가 세워진 쪽에서 카오리와 미야자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버추어 아이돌. 도쿄 게임쇼 한정 코스튬을 원하시는 분들은 이쪽 단말기를 이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아~!! 맞다. 버추어 아이돌. 특전 의상이 있었지!?”
“컨퍼런스 시작하기 전에 미리 받아놓자. 이따가 줄이 길어 지면 엄청 오래 걸릴거야.”
아무런 행사도 시작하지 않은 펜타곤 행사장에 유저들의 행렬이 끝이지 않는 이유..
그것은 다름 아닌 버추어 아이돌 히로인들의 기간 한정 특전 의상 덕분이었다.
또한 미리 방문해준 관람객을 위해 버추어 아이돌의 굿즈 아이템 중 하나인 뱃찌를 선물해 주었는데, 4명의 히로인을 모두 얻기 위해 몇 번이나 줄을 서는 유저들도 간혹 보였다.
나는 정식 컨퍼런스 전까지 행사 진행을 돕고 있는 직원들을 잠시 바라보다가 새하얀 모자를 눌러쓰고 센소니의 부스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센소니의 부스로 향하는 동안에는 몇 개의 서드 파티 회사들이 있었는데, 잠시 둘러보려고 해도 관람객 수가 워낙에 많아 나는 센소니 부스로 향하는 사람들에게 이끌려 반쯤 떠밀리듯 행사장으로 다가갔다.
“우와~!! 아이언 피스트2 다!!”
막강한 3D 그래픽으로 게이머들에게 호평을 받고있는 기어 스테이션의 대표 게임은 당연히 ‘아이언 피스트’ 였다.
초기 발매 당시 리얼 파이터의 아류작이라는 평가를 받아왔지만, 두 번째 시리즈를 거듭하며 아이언 피스트는 자신만의 독특한 시스템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호쾌한 공중 콤보를 비롯해 초보자도 순서대로 버튼만 입력하면 사용할 수 있는 10단 콤보. 리얼파이터와 비교해 약 2배 가량 되어 보이는 개성 넘치는 캐릭터들까지...
비록 전체적인 그래픽은 리얼파이터보다 떨어지는 감이 없지 않았지만, 이번에 기어 스테이션으로 이식 된 ‘아이언 피스트 2’에는 가희 초월 이식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다양한 모드가 탑재 되어 있었다.
또한 아케이드 버전에서는 다소 빈약하게 느껴졌던 스토리 모드를 보완해 무려 전 캐릭터의 프롤로그와 엔딩 동영상을 집어 넣어 유저들의 환호성을 불러 일으켰다.
“최고다!!”
“풍신권 겁나 멋지지 않냐? 나는 리얼 파이터보다 아이언 피스트가 더 쉽고 재밌더라.”
“그렇지? 나도 공중 콤보 제대로 한세트 넣을때의 쾌감이 장난 아니니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호평에 나는 턱을 쓰다듬으며 생각에 잠겼다.
역시나 RPG라던가 미소녀 게임도 좋지만, 친구가 놀러왔을 때 접대하기에는 격투 게임 만한게 없긴 하지...
그 때 나의 등뒤로 약간 짜증이 묻어난 유저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기 왜 앞으로 안가요?”
“네?”
“빨리 빨리 좀 갑시다.”
응? 뭐지?
사람들의 불만에 고개를 돌려 보니, 어느새 사람들에게 밀려 나는 시연용 기기 앞에 서있었다. 옆자리에서 회색 패드를 들고 있는 학생과 눈이 마주친 나는 하는 수 없이 내 앞에 놓인 패드를 손에 들었다.
‘잠깐만 놀아줄까?’
양손으로 패드를 감싸쥔 채 화면을 응시하자, 수많은 격투가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내 옆의 학생은 캐릭터 화면이 등장하자마자 주인공인 카즈야를 선택했고, 나는 잠시 옛 기억 속의 주력 캐릭터를 떠올리다가 한국인 캐릭터인 ‘백두산’을 선택했다.
“라운드 1 파이트!!”
퍼억!!!
시작부터 풍신권으로 호쾌하게 파고들어오는 카즈카의 일격을 막아내며 거리를 둔 나는 횡 이동으로 상대방과 거리를 재며 간격을 벌렸다.
태권도 기술을 사용하는 백두산은 비록 아이언 피스트 시리즈에서 강한 축에 속하진 않지만, 상대방을 교란하는 이지선다와 플라맹고라는 화려한 태권도 스탭이 일품인 캐릭터였다.
‘헌데 오랜만에 해서 일까? 왜 이렇게 플레이가 힘이 들지?’
마치 엄지 손가락이 딱딱하게 굳은 느낌이다.
그래도 예전에 오락실에서 한가닥 했던 실력인데, 이렇게 무너지는 건가?
집요하게도록 파고 들어오는 카즈먀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1라운드를 넘겨준 나는 이어지는 2라운드에서 내 플레이의 문제점을 발견했다.
‘아, 맞다. 플레이는 이렇게 플레이하는 게임이 아니었지.’
그 순간 패드를 감싸쥐고 있던 나의 오른손이 마치 초밥을 만드는 장인처럼 두 손가락을 버튼 위에 살포시 포개었다.
“어라? 저사람 패드 쥐는 법이 좀 독특한데?”
뒤에서 들려오는 유저들의 목소리에 아랑곳 하지 많고 나는 두 손가락을 이용해 능숙하게 플레이를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잊어버렸던 기술이 떠오르고 횡이동 중에 플라맹고를 더하는 축이동까지 떠올린 나는 이후 두판 연속을 내리 이겨 승리를 따냈다.
‘화랑이었다면 더 손쉽게 밟아 주었을텐데..’
나는 분해하는 상대편의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던지곤 시연장을 빠져 나왔다.
그 순간 때마침 기어 스테이션용 신작을 발표하는 외침과 함께 부스 안에 마련된 거대한 스크린 속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표현된 아름다운 여성이 떠올랐다.
그리고 이어 지는 강렬한 브레이킹 사운드.
끼이이이이익!!
거대한 헤어핀 코너를 아웃 코스로부터 미끄러지듯 치고 들어가는 스포츠 차의 모습에 센소니 부스 앞에 모여 있던 유저들은 멍한 표정으로 스크린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이 시기의 게임에선 부족한 폴리곤 표현을 보완하기 위해 CG 동영상을 제법 많이 사용했었는데, 지금 화면속에 등장하는 아름다운 미모의 여성 역시 폴리곤이 아닌 CG 영상이었다.
마치 모터쇼에나 나올 법한 레이싱걸 복장으로 유저들의 시선을 사로 잡은 그녀의 이름은 ‘나가세 레이코’ 기어 스테이션으로 출시된 수많은 게임들 중에 역대급 오프닝이라 칭송 받는 ‘레이지 레이서 4’ 호쾌한 드리프트의 향연에 센소니 부스에 모여 있는 유저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 나오기 시작했다.
‘캬.. 저 오프닝을 이렇게 다시 보다니. 추억이로구나..’
< EP. 45 : Tokyo Game Show. (3) > 끝
ⓒ 손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