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42 : 갈라쇼 (4) >
순백의 드레스를 입은 그녀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저절로 탄성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바이올린의 활을 움켜 쥔 채 가만히 우에노씨의 피아노를 듣고 있던 화면 속의 카오리는 이윽고 바이올린 연주가 시작되는 부분에서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들어갔다.
관객들은 잘 모르겠지만, 사실 이 부분은 스크린 속의 캐릭터와 싱크를 맞추기 위해 우에노 씨의 피나는 노력이 빗어낸 결과물이었다.
어느새 피아노 솔로에서 바이올린의 반주곡으로 바뀐 우에노씨의 ‘사랑의 슬픔’은 카오리의 바이올린과 함께 콘서트의 분위기를 한층 끌어 올리기 시작했다.
클래식 공연이 전해주는 기분 탓일까?
극 중에서 주인공을 이끌어주는 활기한 성격의 유키노조 카오리는 갈라 콘서트 버전에서 왠지 모를 성숙한 분위기를 자아내었고, 그것은 공연들 지켜보는 관객들로 하여금 게임과는 다른 색다른 감정을 전해주었다.
“뭔가 굉장히 어른 스러운 느낌인데?”
“그러게... 내가 알고 있던 카오리랑은 조금 느낌이 달라. 뭔가 조금 세월이 흘러 그녀의 모습을 다시 보는 느낌이랄까?”
크라이슬러의 대표곡인 사랑의 기쁨과 슬픔은 분명 사랑을 노래하는 곡임에 틀림없지만, 굉장히 대조되는 곡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그중에 현재 연주되고 있는 사랑의 ‘슬픔’은 함께 발표된 사랑의 ‘기쁨’ 과는 달리 다소 무겁고 서정적인 느낌을 담고 있었다.
사랑의 기쁨이 이제 막 사랑을 키워나가는 연인들의 설레이는 감정을 담고 있다면 사랑의 슬픔은 뭐랄까... 사랑하는 연인이 떠나간 뒤 홀로 남아 그리워하는 느낌이랄까?
음악이라는 것이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 될 수도 있지만,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크라이슬러의 사랑의 슬픔은 그랬다.
그렇게 우에노씨와 카오리의 연주가 점점 하이라이트 부분으로 다가갈 때 즈음.
스크린 속의 그녀 얼굴이 클로즈업 되며 새하얀 빛에 휩싸였다.
‘나의 바이올린을 듣고 있을 당신에게...’
“어? 뭐지?”
갑자기 들려온 카오리의 목소리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우에노씨의 반주는 아직 멈추지 않았고, 콘서트는 계속 해서 진행 중이었다.
‘당신과 제가 처음으로 마주했던 그 날. 당신은 기억하고 있나요? 아주 조그만 꼬마아이가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가만히 저를 바라 보고 있었죠...’
‘수많은 악기장들의 손을 거쳐 처음으로 도쿄의 작은 악기점의 보관대에 놓여 있던 저에게... 무대에 오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던 것은 다름 아닌 당신이었습니다...’
‘달빛이 스며 들어오는 작은 방에서 당신과 함께 올려다본 밤 하늘엔 너무나 아름다운 별이 빛났고... 처음으로 무대의 스포트 라이트를 받으며 관객과 마주했을 때, 살짝 떨려오던 당신의 손 끝을 전 아직 기억하고 있어요.’
‘당신의 빛나는 재능에 기대어 나 역시 다시 한 번 빛 날 수 있었던 그 날. 그리고 지금. 바로 이 순간이 당신과 함께 할 수 있는 마지막 연주...!!!’
스크린 너머 카오리의 작별 인사와 함께, 그녀와 함께 했던 추억의 나날들이 차례차례 스쳐지났다.
그와 동시에 우에노씨의 사랑의 슬픔은 더욱 격정적으로 건반을 두드리기 시작했고, 이윽고 협주의 종반에 와서 격앙된 두 사람의 음이 동시에 끝을 맺었다..
‘안녕... 지금까지 고마웠어..’
마지막 인사말을 끝으로 스크린 속에서 새하얀 빛과 함께 산산히 흩어지는 카오리의 모습에 객석 여기저기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굳이 멀리서 훌쩍이는 사람을 찾을 것도 없이 내 옆 자리의 유키는 이미 연주의 하이라이트 부분부터 내 손을 꼭 쥔채 눈물을 쏟아내고 있었다.
“와... 나는 그냥 신의 선물에 나왔던 곡을 위주로 한 클래식 콘서트인 줄만 알고 찾아왔는데... 이건 마치 엔딩 이후의 또 다른 엔딩이잖아...”
뒤에서 들려오는 누군가의 감상평에 나는 어느 때보다 뿌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의 말대로 이번 갈라 콘서트는 각 히로인과의 작별을 주제로 하고 있었다.
본래 고베 대지진으로 일정이 취소 되었던 갈라 콘서트는 방금 유저의 말대로 게임에 등장했던 곡을 위주로한 평범한 콘서트로 계획 되어 있었다.
하지만 콘서트 예정 날짜가 무기한으로 연장된 탓에 나는 천천히 유저들의 피드백을 확인하며 신의 선물의 마지막 씬을 조금 손 봐야할 필요성을 느꼈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지...
삐........ 삐빗... 삐빗...
게임의 마지막 엔딩에서 주인공의 죽음을 뜻했던 비트음이 콘서트의 스피커를 통해 다시 규칙적으로 들려오자, 객석에 앉아 있던 사람들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아아... 그렇구나 이야기는 아직 끝난게 아니었어!!”
“우와아아!! 대박...”
현실과 게임 세계관의 공유.
이번 갈라 콘서트를 기획하며 내가 생각했던 이상향과 딱 들어 맞았다.
아직 신의 선물의 마지막 씬을 기억하고 있던 유저들에게 오늘의 공연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추억을 안겨 주었다.
무대 위의 우에노씨 역시 박수와 환호를 보내는 객석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였다.
&
신의 선물에 등장했던 4명의 히로인들과 차례로 작별의 시간을 가진 갈라 콘서트는 약 한 시간동안 객석을 눈물 바다로 만들었다.
특히나 마지막까지 주인공을 삶으로 이끌어 주었던 카오리와의 바이올린 협주는 콘서트가 끝난 후에도 많은 이들에게 감동을 전해주었다.
공연의 1부 주제였던 신의 선물의 피날레 공연이 끝난 뒤. 약 15분 간의 휴식시간이 진행 되었다.
“아... 진짜 공연 내내 너무 울었나 봐요.”
잠시 바람을 쐬기 위해 밖으로 나온 유키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며 나에게 다가 왔다.
“엔딩은 마음에 들었어?”
“응.. 매우..”
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는 유키는 나를 바라보며 잔잔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때 그녀의 곁에 있던 유코씨가 나에게 물었다.
“그런데, 오늘 공연을 못본 사람들은 어떡해요? 뭔가 스토리랑 이어지는 듯한 느낌이라 굉장히 서운해 할 것 같은데...”
“음~ 오늘 공연을 마치면 따로 공연 실황을 비디오나 VCD로 제작해 판매할 생각입니다.”
“아~ 출시 되면 저도 한 장 사야겠네요.”
“그래주시면 고맙구요. 공연 실황 VCD의 수익금은 재난 피해 지역에 기부할 예정이니 될 수 있으면 많이 파는게 좋겠죠?”
그러자 유코씨는 여기 저기서 들려오는 사람들의 찬사에 웃으며 대답했다.
“흠~ 오늘 공연 보고 간 사람들의 입소문을 듣는다면, 아마 신의 선물을 플레이 해 본 사람들 전부 한 장씩은 살 것 같은데요?”
“뭐 꼭 입 소문을 통하지 않아도 이런 행사에 좋은 기사를 써 줄 친구가 하나 있긴 하죠.”
그 순간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내 등 뒤에서 녀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야~ 공연 잘 봤다. 역시 멀리까지 온 보람이 있네~!!”
익숙한 준페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녀석의 곁에 지진 사건 이 후.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 서있었다.
숏컷 헤어 때문일까? 예전에 만났을 때보다 조금 더 보이쉬해진 느낌이 드는 미사토씨는 나와 눈이 마주치자, 친근하게 인사를 건네왔다.
“잘 지냈어요?”
“아~ 미사토씨. 오랜만이네요. 공연은 마음에 드셨나요?”
“네. 아주 즐거웠어요. 안 그래도 준페이씨가 공연을 보러 오기전에 꼭 해보는게 좋다고 신의 선물과 라온을 빌려줬었거든요.”
게임 전문 리뷰어와 방송 기자의 만남이라...
흔치 않은 조합이긴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나도 유키랑은 전혀 상관 없는 직장이었으니, 부디 잘 이어 나가길 바래야지..
그때 건물 외부에 설치된 스피커를 통해 방송 안내가 들려왔다.
-잠시 후. 휴식 시간이 종료되고 2부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자리에 착석해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잠시 후....-
“아, 2부 공연 시작되려나 보네. 이제 그만 들어 갈까?”
“그럼 준혁씨. 나중에 공연 끝나고 봬요.”
“네. 그래요. 즐거운 관람 되시길 바랍니다.”
&
삐~~~
2부 공연의 시작을 알리는 벨소리와 함께 커튼이 걷히자, 무대 정중앙에서 대기하고 있던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우에노씨 덕분에 1부에서는 유키와 함께 편안히 콘서트를 관람하면 되었지만, 2부에서는 내가 진행을 맡아야 했다.
기대에 찬 눈으로 무대를 바라보는 유저들과 잠시 눈을 마주친 나는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 2부 진행을 맡게 된 펜타곤 소프트의 강준혁 이사입니다.”
“우와아아아~~”
객석에서 들려오는 어마어마한 함성에 온몸이 저릿할 정도로 진동이 느껴졌다.
성난 야수의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그들의 눈빛이 무엇을 바라고 있는지, 너무나 절실하게 느껴져 하마터면 실소가 새어 나올뻔 했다.
이번 신의 선물의 갈라 콘서트는 신의 선물이라는 컨텐츠 자체 만으로도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지만, 사실 바로 이 두 번째 순서를 위해 콘서트 티켓을 바랬던 유저들도 결코 적지 않았던 모양이네...
첫 번째 당신을 위한 응원가가 발표된 이 후. 두 번째 곡인 Beating Heart의 인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즈음. 이미 일본 내에서 버추어 아이돌은 발매 이전부터 엄청난 화제 거리가 되어 가고 있었다.
지난 달 두 번째 캐릭터의 모습이 공개됨과 동시에 이제 껏 한마음 한 뜻으로 버추어 아이돌의 발매를 기다리던 유저들은 에리카 파와 셰릴 파로 나뉘어 졌다.
청순한 이미지의 에리카야 말로 버추어 아이돌의 메인이 되는 캐릭터라고 그녀를 지지하는 팬층이 생겨 나자, 곧바로 셰릴의 육감적인 바디라인과 섹시한 목소리를 무기로 에리카 파에 반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하지만 셰릴의 모습이 공개 되었다는 것은 바로 3번째 캐릭터가 비공개고 모습을 드러냈다는 걸 의미 했는데, 바로 오늘이 지난 달 잡지에 예고 한 3번째 캐릭터의 모습을 공개 하는 날이었다.
사람들은 벌써부터 세 번째로 등장하는 캐릭터에 대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보이고 있었는데, 그 이유는 3번째 캐릭터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물론 청순하고 맑은 에리카의 음색과 당차고 매혹 적인 셰릴의 목소리도 나쁘지 않았지만, 세 번째 캐릭터의 목소리에는 특유의 애교가 섞여 있었다.
-첫 번째는 청순. 두 번째는 섹시... 그렇다면 남은 것은 귀여움 뿐이다!!-
라는 멘트가 벌써부터 PC통신 커뮤니티 사이에서 쇄도 하고 있었기에 그녀의 공개를 기다리는 팬들이 벌써부터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가려진 공개된 실루엣을 토대로 상상도를 그려 이미지 루머를 퍼뜨렸을 정도니까...
더이상 뜸을 들였다 간 폭동이라도 일어날 분위기에 나는 한 걸음 뒤로 물어 나며 마이크를 입에 가져다 대었다.
“자, 그럼 2부의 시작을 알리며 여러분께서 기다리셨던 버추어 아이돌의 세 번째 캐릭터 콘노 아즈사양을 소개 하겠습니다.”
< EP. 42 : 갈라쇼 (4) > 끝
ⓒ 손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