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41 : D-125 (1) >
“라온이 엄청 하고 싶었어요.”
구사 일생으로 살아난 아이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 덕분에 라온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를 불러 일으켰다.
‘이거 참 예상 밖의 수확인데?’
아침에 병원에서 가져다준 신문을 보며 피식 웃고 있던 중 옆에서 사과를 깎고 있던 유키가 입을 삐죽 내밀며 핀잔을 주었다.
“뭐가 그렇게 좋아요? 나는 다치고 돌아와 속상해 죽겠는데...”
오른쪽 어깨에 감은 붕대 덕분에 목에 팔걸이를 두르고 있던 나는 유키의 말에 신문을 곱게 접어 내려두었다. 이럴 때는 괜히 그녀의 신경을 건드려서 좋을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입원까지 안해도 되는데...”
“아뇨. 입원을 해야 그나마 이럴 때 좀 쉬는거죠.”
“에이... 안 그래도 설현이 출산 덕분에 한 달이나 쉬었는데...”
“흐응~ 회사만 안 나갔을 뿐이지 허구헌 날 롭이랑 첸드라에게 통화하던거 내가 모를 줄 알아요?”
“... 귀신이네..”
“진짜 옛날부터 느끼긴 했지만, 준혁씨 그정도면 일 중독인 거 알아요? 정말 누가 보면 펜타곤 대표가 카와구치씨가 아닌 당신인 줄 알겠다니까요.”
유키의 불평에 내심 속이 찔렸던 나는 헛기침을 하며 창 밖을 바라보자, 그 사이 그녀는 예쁘게 깍은 사과 조각을 접시에 올려두곤 과도를 닦아 내었다.
나는 그런 유키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살짝 미소 지으며 입을 열었다.
“컴플리트 라온을 출시하고 나면 우리 둘이서 여행이나 다녀올까? 설현이는 잠시 장모님께 맡기고...”
그러자 유키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보았다.
“웬일이에요? 먼저 여행을 가잔 소릴 다하고?”
“······.”
내가 그 동안 너무 일만 하고 살았나?
하긴 신혼 여행 이후에 후쿠오카 쪽으로 온천 한 번 다녀온게 전부 였으니...
유키의 이런 반응이 이해가 안가는 것은 아니었다.
“생각 해보니, 네 말대로 너무 일만 하고 살아온 것 같아서 이제는 조금 여유를 가져볼까 싶네...”
“흐음~ 좋은 생각이긴 한데, 그 컴플리트 라온이라는 콘솔이 출시 되면 또 엄청 바빠지는 거 아녜요?”
“뭐 펜타곤도 옛날처럼 그렇게 조그만 기업은 아냐, 나 하나 없어도 쌩쌩 잘 돌아갈테니 그런 걱정 안해도 될 걸?”
“피~ 준혁씨가 언제 일을 시켜서 했나요? 스스로 만들어서 하는 타입이지.”
“그건 그렇네...”
유키는 나를 곤란하게 만드는게 재밌는지 기분 좋게 입꼬리를 올리며 사과 한 조각을 내손에 들려 주었다. 하지만 간만에 느끼는 이런 알콩달콩한 분위기도 잠시, 어마어마한 방해꾼이 등장했으니...
“준혁아~ 몸은 좀 어떠냐?”
문병용 과일 바구니를 흔들며 나타난 녀석은 예상대로 준페이였다.
“어서오세요. 준페이씨.”
“유키씨도 계셨네요. 이 녀석 몸은 몸 어때요?”
“의사 선생님 말로는 피부가 찢어진 것 외에도 근육이 상해서 며칠 간은 쉬는 게 좋다고 하길래 강제로 입원 시켜뒀죠.”
“잘 하셨습니다. 아주 옳으신 판단입니다.”
헐... 저런 여우같은 곰을 봤나...
금세 유키의 곁에서 꼬리를 살랑 거리는 얄미운 준페이를 째려 보던 나는 툭하고 녀석에게 말을 던졌다.
“너 누구 덕분에 목숨을 건진 건지 알고는 있는 거냐?”
“아~ 그때 멋졌지... 쓰러지는 콘크리트 벽을 붙잡고 ‘준페이 위험해~!! 빨리 빠져 나와~!!’ 라고 외치던...”
“우와~ 준혁씨가 정말 그렇게 말했어요?”
... 아니 뭔가 좀 많이 미화된 것 같은데?
준페이는 유키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향해 슬쩍 윙크를 날렸다.
“그런데 여긴 무슨 일이야?”
“뭐 별일은 아니고, 너 심심할까봐 이번 달에 나온 우리 잡지 좀 가져왔지.”
“어라? 발행일은 내일 아니었나?”
“뭐 그렇긴 한데, 마땅히 들고 올게 없어서~ 발행 하루 전에 슬쩍 들고 나왔지.”
“어이구, 자랑이다.”
꽤나 두꺼운 잡지 한권을 나에게 넘겨주는 준페이에게 유키는 미리 깍아 놓은 사과를 그에게 권했다.
“아이쿠, 이거 잘 먹겠습니다.”
준페이는 마침 배가 고팠는지, 유키가 건넨 사과 한 조각을 입에 털어 넣으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때 잡지를 살펴보던 내가 그에게 물었다.
“지진 이후에 업계 상황은 좀 어때?”
“뭐 난리도 아니지. 지진 피해가 교토까지 이어져서 민텐도도 생산 라인에 문제가 터졌다고 하더라. 그 와중에 펜타곤이 선봉으로 구호활동에 나섰으니, 가만 있을 수도 없을테고... 이래저래 미움 많이 사겠다. 너...”
“원래 인생이란게 타이밍이거든?”
“그래. 바로 그 타이밍 덕분에 너랑 나랑은 뉴스에도 나오고, 아주 요 근래 겪은 일중 가장 버라이어티 했지.”
“하지만 덕분에 미사토씨 연락처까지 땄으니, 너한텐 좋은 거 아냐?”
“헉.. 그걸 네가 어떻게?”
“어머, 준페이씨 미사토씨랑 연락처 교환하셨어요?”
“아, 그게 어쩌다보니..”
피해지역에 자원 봉사를 갔던 그 날.
얼떨결에 구조 대원들과 함께 아이를 구출한 나와 준페이는 그날 밤 9시 뉴스의 대미를 장식한 화제의 인물이 되었다.
덕분에 TV로 소식을 접한 유키가 깜짝 놀라 내가 있는 곳으로 당장 오겠다는 통에 난리도 아니었지만...
하지만 그때 난 분명히 보았다.
그 사건을 계기로 미사토씨와 대화를 나누던 중. 은근슬쩍 그녀와 연락처를 주고 받던 녀석의 모습을...
“우와... 그때 그걸 봤어?”
“차라리 귀신을 속이지? 감히 연락처만 받고 나한테는 시치미 뚝 떼더라?”
“너한테는 유키씨가 있잖냐...”
묘한 뉘앙스가 풍기는 녀석의 발언에 유키의 의심스러운 시선이 스르륵 내 쪽을 향했다.
“... 야. 거기서 유키가 왜 나와? 그냥 방송 관계자니까 친해두면 좋을 것 같으니 그랬지.”
“흐응~ 그거 진짜예요?”
이럴땐 오히려 당당해야 뒷탈이 없다는 걸 알고 있던 나는 유키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당연하지.”
&
고베 대지진 이후. 일본의 경제 상황은 극심한 타격을 입게 되었다. 안 그래도 90년대부터 이어지던 경기 불황에 재난 피해까지 더해지자, 사태는 더욱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특히나 고베 지역에 생산 공장을 두고 있던 일부 기업은 지진으로 공장 가동이 중지 되면서 어마어마한 적자를 보았다.
지진 피해 지역과 가장 가까운 곳에 위치한 민텐도는 이재민들을 위해 3억엔의 기부금을 전달하였고, 센소니와 NEGA 역시 적지 않은 기부금을 꺼내어 펜타곤 소프트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펜타곤은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피해 지역을 찾아 봉사활동을 멈추지 않았고, 또한 게임 샵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의 희망에 따라 일부 재고 금액을 환불해 주거나, 새로운 샵을 열 때 보조금을 지원해 주었다.
-펜타곤 소프트. 피해 지역 자영업자들의 희망이 되다.-
오늘 아침 마이니찌 신문의 1면을 장식한 기사문을 보며 카와구치 대표는 흡족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대표실에 마주 앉아 사유리씨가 준비해준 커피를 한모금 삼킨 나는 그런 그의 반응을 즐기며 소파에 몸을 기대었다.
“기사들 마다 굉장히 호의적인 내용들 뿐이군요.”
“그야 당연하죠. 일반 자영업자 같은 경우엔 저희가 제시한 정책 자체가 굉장히 큰 도움이 될테니까요.”
뉴스 기사만 살펴본다면 펜타곤에서 게임 샵을 운영하던 자영업자들에게 어마어마한 지원금을 쏟아내고 있다고 생각하겠지만, 실상 따지고 보면 그렇게까지 큰 금액은 아니었다.
왜냐고? 그야 지진으로 피해를 입은 지역을 따져보다면 굉장히 넓지만, 그중에 게임 샵을 운영하던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특히나 재난이 일어난 지역은 일반 주택가 단지였기에 게임을 구입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오사카의 덴덴타운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그렇기에 우리가 제시한 피해 반경에는 소규모 중고 상점을 포함해 현재까지 정식으로 지원 요청서를 제출한 게임 샵은 총 8군데 정도 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두 군데는 펜타곤 제품의 환불을 요청했기에 우리가 새로운 가게 오픈을 도와 줄 곳은 단 6곳에 불과했다.
계약서에 사인을 마친 그들은 이제 곧 피해 지역을 떠나 새로운 도시로 이주하여 게임 샵을 운영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한가지 보통 게임 샵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들이 취급하는 게임 자체가 전부 펜타곤에서 출시한 게임이라는 것이지...
이미 6곳의 매장에 대해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한 터이기에 업주들은 순순히 우리의 의견을 따르기로 한 상태였다.
그들에게 제시한 ‘전폭적인 지원’ 그것은 차후에 컴플리트 라온이 출시할 당시 타 지역 보다 일주일 먼저 제품을 판매할 수 있는 권리였다.
물론 이에 대해 펜타곤 내부에서도 너무나 편파적인 기기 공급이라는 말이 나왔지만, 피해 지역의 이재민들의 재기(再起)를 위해 단 1주일도 참지 못하고 불만을 토로하는 기업이나 업주가 있다면 그들과의 계약을 다시 재 검토해 볼 필요가 있다는 나의 말에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지난 회의에는 이번 지진을 계기로 펜타곤이라는 브랜드 네임이 일본 내에서 굉장한 신뢰를 쌓아가고 있는 중이었기에 이 흐름을 타고 단번에 ‘컴플리트 라온’을 출시하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나는 묵묵히 고개를 내저었다.
“여러분이 뭔가 착각하시는 모양인데, 한가지 정확하게 짚고 넘어가자면 컴플리트 라온은 게임기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재난 지역에 사회 봉사를 한 것과는 전혀 별개라는 말입니다. 이번 센소니에서 난코를 끌어들여 기어 스테이션용 ‘아이언 피스트’를 발매하고, ‘레이지 레이서’가 큰 호평을 받고 있는 것은 그들이 만든 콘솔의 완성도가 그만큼 훌륭하고 그것을 받쳐 주는 소프트 웨어가 준비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에 반해 우리 컴플리트 라온은 아직 코어 유저와 라이트 유저를 끌어들일 만한 컨텐츠가 부족하다고 볼 수 있죠. 이런 상황에서 단지 기업의 이미지만을 앞세우고 신형 콘솔을 발매한다면 큰 참패를 맛보게 될 것입니다.”
“그럼.. 대체 펜타곤의 신형 콘솔 발매는 언제쯤으로 생각하고 계시는 건가요?”
회의실에 울리는 한 주주의 질문에 나는 잠시 지그시 그를 바라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번에 나오는 컴플리트 라온의 마케팅은 콘솔보다 소프트 웨어를 중심으로 홍보할 예정입니다.”
“음? 소프트 웨어라면 컴플리트 라온으로 출시 할 차세대 게임을 말하는 겁니까?”
“아직 그것까진 자세히 말씀 드리기가 어렵네요...”
프리젠테이션 용 레이저 포인터의 스위치를 내린 나는 살작 입꼬리를 올린채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1995년 벚꽃이 만개한 4월의 어느 봄 날...
재난 피해 지역과 오사카 게임 샵들을 위주로 홍보용 컨텐츠 하나가 배포 되었다.
펜타곤 소프트 로고가 박혀 있는 CD 안에는 실루엣으로 표현된 기타를 치고 있는 소녀의 영상과 함께 그녀가 부르는 노래 한곡이 흘러나왔다.
-응원가- 라는 제목의 노래는 특유의 음색과 가사의 전달력으로 거리를 지나던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 시작했다.
그대여~ 너무나 힘든 하루였죠.
마음먹은 일 하나도 되지 않는 그런 하루.
그대의 슬픈 마음 알아요..
그대여~ 너무 바쁜 하루였죠.
마음 편히 숨 돌릴 여유 조차 없는 그런 하루.
그대의 그런 마음 이해해요~
꿈꿔왔던 미래와 많이 다른 현실에
점점 지쳐가고, 많이 실망했지만..
그래도 언젠가 이루게될 그대의 세상.
나 항상 그대를 응원할게요.
“뭐지...? 누구 노래야?”
통기타 하나와 목소리 만으로 사람들의 귀를 사로 잡은 그 영상의 끝에는 아무런 추가 설명 없이 단 한 줄의 문구만 적혀 있었다.
[전격 데뷔 D-125.]
혹시 눈치가 빠른 사람은 바로 알아 차렸을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데뷔하는 바로 그 날이 ‘컴플리트 라온’의 출시일이었다.
< EP. 41 : D-125 (1) > 끝
ⓒ 손인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