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40 : 사회적 활동. (1) >
한창 달콤한 잠에 취해 있던 새벽 5시 무렵..
나는 마치 꿈속에서 들려오는 듯한 유키의 다급한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준혁씨~!! 준혁씨!!”
“으음...?”
“빨리 일어나봐요..!!”
“뭐야? 왜 그래?”
“방금 집 전체가 쿵하고 울렸는데, 아무 것도 못 느꼈어요?”
이렇게 푹신한 침대 위에서 진동을 느낀 네가 대단하다는 건 알겠는데...?
어느새 설현이를 품에 안은 채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키를 위해 나는 피곤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리모콘을 찾았다.
침대 옆 작은 탁자에 놓여진 TV 리모콘에 손을 옮기려던 그 순간..
우우웅...
탁자 위에 리모콘이 파르르 떨리며 내 손에서 멀어졌다.
“방금 또 그런 거 맞죠?”
“침착해. 이런 지진 한 두 번 겪어본 거 아니잖아...”
“그래도 오전에 있었던 지진이 거의 30년만에 발생한 직하형이었다고 하니까, 왠지 불안해서...”
여전히 불안에 떨고 있는 유키를 안심시키기 위해 나는 TV 리모콘의 전원 버튼을 눌렀다.
틱하는 소리와 함께 TV 화면에 어스름하게 불이 들어온 순간.
나와 유키는 침대에 몸을 뉘인채 그대로 몸이 굳어버렸다.
“뭐...야? 저긴 어디지?”
“아와지라면 고베시 근처인데?”
고베라는 말에 퍼뜩 정신이 든 나의 머릿 속에 한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고베 대지진!? 설마 이렇게 갑작스럽게?
TV 화면 너머의 재난 현장은 이미 진도 7.2의 직하형 지진이 모든 것을 휩쓸고 지나간 직후였다.
지진 당시 상황을 촬영한 방송국 내부의 CCTV가 심하게 흔들림과 동시에 사무실 내부에 있전 가재도구들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기 까지 불과 수초에 지나지 않았다.
멍하니 TV를 바라보고 있는데, 유키의 떨리는 손이 내 손을 꼭 쥐는게 느껴졌다.
“어떡해요. 저 사람들...”
곧이어 방송국이 아닌 사람들이 살고 있는 주택가를 비춰준 현장의 모습은 더욱 참혹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 시간. 주택가를 강타한 지진 덕분에 미쳐 피할 틈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그대로 집더미에 생매장 당해버렸기 때문이다.
거기다 업친대 덥친 격으로 집안에 설치된 가스 배관이 끊어지며 가스가 새어 나왔고, 주변에 쓰러진 전봇대에서 일어난 스파크로 주택 단지는 불바다가 되어 있었다.
방송용 핼기가 날아오르며 재난 지역을 비춰주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스팩터클 한 재난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듯했다.
그중에서도 나의 눈길을 끌었던 것은 기둥만 해도 어마어마한 두께로 설계된 고가 도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져 쓰러져 있는 모습이었다.
“세상에...”
방송국 핼기는 검게 피어오르는 화재 연기 속에서 더 이상 비행이 불가능했는지, 리포터가 창백한 표정으로 마이크를 입에 대었다.
“더이상 촬영이 불가능 하기에 자세한 사고 소식은 오전에 이어서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현재 한신, 아와지, 고베 지역은 보시다시피 끔찍한 지진 피해로 아직도 도시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고 있습니다. 현재 사고 지역을 비롯해 오사카, 나라, 교토 지역의 소방관들까지 재난 피해 지점으로 속속들이 모여들고 있다는 소식들 전하며 이상으로 긴급 보도를 마치겠습니다.”
사고 현장 소식을 전해준 리포터의 보도는 끝이 났지만, TV에선 계속해서 피해 지역 당시의 CCTV와 핼기에서 촬영된 영상을 번갈아 보여주고 있었다.
한동안 유키와 재난 방송을 지켜보던 나는 고개를 들어 벽에 걸린 시계를 바라보았다.
오전 6시 10분.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전화기를 들고 곧장 카와구치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잠시 신호음이 울리고, 수화기 너머로 약간 당황한 듯한 카와구치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와구치씨 혹시 방송 보셨어요”
“네. 방금 일어나 뉴스를 보던 참입니다. 세상에 하루 아침에 이게 무슨 일인지...”
“우선 비상 연락망을 이용해 일반 사원들에게 임시 휴무를 알리고, 팀장급 이상 중에 가능 한 인원만 오전 10시까지 회의실로 모이죠.”
“네. 알겠습니다. 안 그래도 고베 지역에 가족이 있는 사원들도 있기에 휴무를 건의 드리려던 참인데 잘됐네요.
“그럼 회의실에서 뵙겠습니다.”
그때 방문이 열리며 유키가 설현이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준혁씨도... 가봐야 하는 거죠?”
“응. 그래야 할 거 같아. 혹시 모르니까 며칠간 설현이랑 같이 친가에 가있는게 어때?”
본래 내가 알고 있던 과거와 상황이 같다면 도쿄는 안전 하겠지만, 오늘 일어난 대지진은 내가 알던 과거의 사건보다 시간 축이 한 달 정도 늦어졌다.
그래서 일까? 도쿄가 안전 할거라는 절대적인 확신을 내릴 수가 없었다.
장모님댁은 개인 주택이기에 맨션보다 상대적으로 대피하기가 쉽고, 혹시나 집이 무너진다 하여도 목재 건물이기에 매몰된다 하여도 근처에 사람만 있으면 쉽게 빠져 나올수가 있다.
하지만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고층 맨션 같은 경우에는 직하형 지진 한방에 건물 전체가 와르르 무너져 버린다면 어마어마한 인명 피해를 입을 수도 있었다.
방금 TV에서 거대한 고가도로가 무너져 내린 것처럼 말이지...
“알았어요. 그럼 오늘 하루만 부모님 집에 가있을게요.”
“별일 없을거야. 너무 걱정하지마.”
잠시 후. 나는 유키와 함께 조금 이른 아침 식사를 마친 뒤, 그녀를 처가 집까지 바래다주었다.
유키가 도착하자마자 놀란 얼굴로 뛰쳐나온 장모님은 안그래도 불안했는데, 잘 왔다며 유키와 설현이를 데리고 안으로 들어가셨다.
장인 어른 역시 오늘은 임시 휴무로 지정 되었는지, 출근을 하지 않고 자택에 대기하신 모양이었다.
“오늘도 출근인가?”
“일반 직원들은 임시 휴무일로 돌렸지만, 임원진은 대책 회의가 있어서요.”
“대책 회의? 게임 만드는 회사에서 지진 피해에 대해 무슨 대책 회의를 한단 말인가?”
장인 어른의 물음에 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떼었다.
“피해 지역에서 필요한 구호 물품에 대한 것도 미리 선점해야하고, 어느정도 안정화 시기가 되면 봉사 활동에 대해서도 검토를 해봐야해서요.”
“아, 하긴 그것도 그렇군. 지금 당장은 전기도 수도도 쓸수가 없을테니, 피해 지역에 많은 도움이 필요할 거야. 생각이 참 기특하군... 그래, 바쁠텐데 어서 가보게나.”
“저녁 때까지 상황을 보고 유키를 데리러 오겠습니다.”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어 보이는 장인 어른에게 인사를 드린 뒤, 서둘러 차에 올랐다.
그와 동시에 차안에 놓여져 있던 전화기에서 다소 촌스럽게 느껴지는 벨소리가 울리자, 나는 차에 시동을 넣으며 휴대폰에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이사님. 저 하야시입니다.”
“어, 무슨 일이야?”
“그게, 회의 소집에 대해선 이야기를 들었는데...”
평소와 달리 가늘게 떨리는 하야시의 목소리에 불안한 느낌이 들었다.
“너 설마...?”
“네. 본가가 아와지에 있는데, 현재 연락이 닿지 않아요. 잠시 본가에 좀 다녀와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 맞아 하야시 너 원래 관서 사람이었지, 알았어. 대표님에게는 내가 따로 이야기 할테니까. 다녀오도록 해.
“네... 감사합니다.”
“별일 없을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운전 조심해서 가.”
“네. 알겠습니다. 도착해서 연락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하야시와 통화를 끊은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곤 곧장 회사로 차를 몰았다.
라디오에서는 모든 채널에서 고베 대지진의 피해 규모와 사상자에 대해 이야기 중이었고, 그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늘어 나고 있었다.
워낙에 피해 지역이 안좋았던 터라 처음 뉴스를 접했을 때와 달리 사상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있었다.
신호 대기 중이던 나는 초조함에 손 끝을 깨물며 하야시의 부모님에게 별일이 없기를 바랬다.
고베 대지진은 분명 수많은 사상자를 낸 희대의 재앙으로 피해 지역 주민들에게 어마어마한 절망감을 안겨주었다. 또한 그곳에 거주하는 한국인 역시 다수 존재했기에 여러모로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내가 알고 있는 일본 정부는 고베 대지진이라는 위기를 오히려 경제 활성화의 기회로 삼았다.
모든 것이 피폐하게 무너진 도심을 재건축 하기 위해 수많은 일거리가 생겨 났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것에 대한 낙수 효과를 노리고 일본에 내로라 하는 기업들이 대거 일어섰다.
그중엔 민텐도와 센소니. 그리고 NEGA도 포함 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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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베 지진 때문일까? 오늘 따라 유난히 휑 한 신주쿠의 중앙로를 지나 회사 주차장에 차를 세워둔 나는 곧장 엘리베이터를 타고 본사의 회의실로 향했다.
그때 방금 회사에 도착했는지 서둘러 회의실로 향하고 있는 모리타가 보였다.
“어이, 모리타.”
“아, 이사님. 좋은... 아침이라고는 못하겠네요. 사실 하야시가...”
“응. 나도 오면서 들었어. 그런데 모리타 너는 괜찮은거야? 너도 관서 쪽에 본가가 있잖아.”
“저는 괜찮습니다. 본가는 오사카에 있는데, 오전에 통화하니 별일 없으시다고 하셔서...”
“그래. 다행이다. 하야시는 도착하면 연락주기로 했으니, 기다려보자.”
“디자인 부서의 카오리도 함께 갔으니, 별일 없을 거예요.”
“카오리도? 맨날 하야시를 놀려대지만, 걔도 이럴땐 참 싹싹하네.”
“그러게 말입니다.”
모리타와 대화를 나누며 회의실로 들어서자, 몇몇 팀장급 인원들이 나에게 인사를 건네었다.
“혹시 본가가 사고 지역에 있는 분들은 가보셔도 괜찮습니다. 회의 내용이 가족보다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러자 나와 함께 ‘신의 선물’을 기획 했던 우에노씨가 대답했다.
“안그래도 오전에 미리 연락 드리고 나왔습니다. 괜찮다고 하시더군요.”
“다행이네요. 그렇다면 현재 팀장급 이상중에선 하야시 팀장을 제외하고 다들 괜찮은 것으로 알겠습니다.”
“카와구치 대표님. 오십니다.”
비서인 사유리씨의 말에 회의실에 모여 있던 직원 전원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와구치 대표는 회의실에 들어옴과 동시에 직원들에게 편히 앉으라는 말을 전한 뒤 나를 향해 살짝 눈인사를 보내었다.
“우선 이 자리에 계신 직원분들은 지진으로 피해 입은 가족이 없다니 다행입니다. 부디 제 2 개발팀의 하야시 팀장에게도 별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카와구치 대표의 짧은 인사말과 함께 긴급 소집 회의가 그 시작을 알렸다.
회의의 안건은 피해 지역에서 필요한 구호 물품 목록에 대해 토의하고, 어느 기업에게 수주를 넣을 것인지에 대한 것이었다.
일단 전기와 가스가 막혔으니 물과 식량같은 생필품이 우선적인 구호 물품으로 배정되었고, 그 외로 담요라던가 침낭. 옷가지 등등 다양한 의견이 쏟아져 나왔다.
모두가 진심으로 피해지역 주민들을 걱정하고 있었기에 가능한 그들이 말한 모든 구호 물품을 선정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때 카와구치 대표가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께서는 혹시 다른 의견이 없으십니까?”
그의 물음에 나는 볼펜 끝을 책상에 톡톡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생필품에 대해선 이미 좋은 의견이 너무 많이 나와 딱히 이견은 없습니다. 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을 제안하고 싶은게 있네요.”
“어떤 부분입니까?”
“가령... 이번에 피해 입은 지역 주민을 상대로 부서진 라온과 게임 카트리지를 가져올 경우 무상 A/S를 해드린다던가?”
“네? 설마 지진 피해로 부서진 콘솔을 무상으로 교환해드리자는 말입니까?”
당황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는 카와구치 대표를 향해 나는 한쪽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웃어보였다.
“피해 입은 지역에도 분명 저희가 만든 게임을 좋아하는 유저분들이 있겠지요.
기업이란 그런 고객들 한분 한분의 도움으로 유지가 되는 것입니다. 과거 파이널 프론티어 1, 2로 회사가 힘들었을 때 유저분들께서 저희 펜타곤 게임을 믿고 구입해 주셨듯이... 이번엔 저희 펜타곤이 그런 유저분들을 도와줄 때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응당 기업이 취해야 할 사회적 행동이라 생각합니다.”
회의실에 모인 직원들은 나의 말에 어리벙벙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그러던 중 모리타가 나를 향해 천천히 박수를 보내자, 직원들 하나 둘 그를 따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맞습니다. 구호물품도 물품이지만, 저희는 게임 회사이지 않습니까? 더구나 휴대용인 라온 같은 경우는 피해 지역 아이들을 위해서 좋은 놀이가 될 것 같습니다.”
“오오.. 그거 좋네요. 지진이 일어난 지역을 돌아다니는 것은 위험하다고 하니, 차라리 대피소에 아이들을 위한 놀이 공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요?”
다소 딱딱하게 진행되던 회의 분위기는 나의 말 한마디에 급반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나는 의자에 기댄채 직원들의 입에서 쏟아지는 아이디어를 들으며 빙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러자 내 근처에 앉아 있던 카와구치 대표가 나에게 물었다.
“준혁씨 말대로 진행 된다면 추진 액수가 상당할거 같은데, 괜찮을까요?”
“상관없습니다. 차후에 발매 될 컴플리트 라온의 홍보비라고 생각해두죠...”
< EP. 40 : 사회적 활동.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