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95화 (195/252)

< EP. 36 : 싱어송라이터.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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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도 없는 집에 돌아와 쇼핑백에서 꺼내든 ‘신의 선물’은 구성품이 굉장히 단촐했다.

밀봉 패키지의 씰을 뜯어 내고 종이 박스를 열어 젖히자, 매뉴얼 하나와 게임 카트리지가 내부 플라스틱 케이스에 담겨 있었다.

게임을 실행하기 전에 도톰한 두께의 매뉴얼을 팔락거리며 살펴 보니, 신의 선물을 프롤로그 만으로도 이제까지 내가 알고 있던 기존 게임의 틀을 확실하게 넘어서는 뛰어난 스토리 라인을 가지고 있었다. 과연 그래픽 노블이라는 장르명이 실감되는 순간이랄까?

이어서 4명의 히로인이 소개 된 페이지를 넘기니 게임의 간단한 조작법이 쓰여 있었다. 그리고 매뉴얼의 마지막 페이지에는 메인 테마곡의 악보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나카무라군이 알려준대로 라온 본체에 건전지 2개를 넣은 뒤 전원 스위치를 올렸다.

이윽고 화면 한 가운데 RAON이라는 귀여운 문구가 떠오르며 초기 설정 페이지가 떠올랐다.

십자키를 움직여 날짜와 시간을 맞추고, 이후에 게임을 다운 받을 수 있는 단말기에서 사용할 ID와 패스워드를 입력하고 나니 메인 화면이 눈에 들어왔다.

-게임 카트리지를 슬롯에 넣어 주세요.-

상단에 표시된 문구에 따라 게임 카트리지를 꽂아 넣고 선택 버튼을 누르자, 제작사의 로고가 뜨기 전 메시지 창 하나가 떠올랐다.

-신의 선물의 음악을 보다 선명하게 듣기 위해선 내부 스피커 보다 이어폰 사용을 추천합니다. 스테레오 사운드를 원하시면 이어폰을 꽂은 상태에서 YES 버튼을 눌러주세요.-

나는 책상 서랍에서 워크맨에 사용하던 이어폰을 꺼내어 라온의 하단부에 이어폰 잭을 연결 하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잠시 후 아름다운 피아노의 선율과 함께 ‘신의 선물’이라는 타이틀 화면이 떠올랐다.

바람에 살랑이는 커튼과 그 옆에 자리한 그랜드 피아노는 바라보는 이로 하여금 굉장히 아련한 느낌을 전해주었다.

이렇게 신의 선물의 메인 테마곡인 ‘러브 레터’을 들으며 가만히 타이틀 화면을 보고 있자니, 괜스레 가슴이 먹먹해져오는 느낌 마저 들었다.

-NEW GAME-

-PRACTICE MODE-

-OPTION-

세가지 메뉴에서 나는 가장 위에 있는 뉴 게임에 커서를 두고 확인 버튼을 눌렀다.

페이드 아웃으로 타이틀 화면은 천천히 어두워지고, 이윽고 화면 한가운데에 스포트 라이트가 켜지며 게임이 시작되었다.

어느 피아노 콩쿨의 갈라쇼에서 주인공을 천천히 무대에 올라 피아노 건반위에 가볍게 손을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Elohim Essaim, Elohim Essaim... 모든 것은 나의 바램대로 이루어 지리라.-

그리고 이어지는 독주(獨奏) 파트에서 나는 상단에서 내려오는 리듬 바를 타이밍에 맞춰 피아노 연주를 시작했다.

‘신의 선물의 첫곡은 쇼팽의 녹턴 op.9 No.1...’

창틀 사이로 비쳐 들어오는 달빛을 맞으며 홀로 피아노를 친다면 이런 느낌일까?

굉장히 서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는 이 곡은 그 음색이 지나칠 정도로 아름답다는 세간의 평가와 함께 쇼팽하면 떠오르는 명곡 중에 하나였다.

‘설마 게임을 통해 클래식 음악을 접하게 될 줄이야...’

이윽고 나는 점점 격해지는 피아노의 선율에 집중하며 모든 리듬 바를 정확한 타이밍에 맞춰 쳐내기 시작했다.

약 6분 30초에 달하는 연주곡은 고도의 집중력을 요했기에 콤보수가 180까지 차오르자 점점 손가락이 굳어져가는게 느껴졌다.

쇼팽의 피아노 곡은 중간중간 끊어 치는 부분이 많았는데, 이 부분은 마치 사랑하는 연인에게 하고 싶은 말을 차마 전하지 못해 말문을 닫아 버리는 그의 성격과 매우 닮아 있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나도 모르게 주인공의 독주에 흠뻑 취해 손가락을 움직이다 보니, 주인공의 첫곡을 풀 콤보로 완성하며 S 랭크를 획득했다.

평소에 클래식을 좋아하고 기타 연주를 즐겨한 탓에서 일까? 손가락 끝이 조금 뻐근하긴 하지만, 너무나 감동적인 피아노 연주에 그 성취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했다.

이렇게 조그만 카트리지 하나에 쇼팽의 감성을 그대로 옮겨 담았다는 것 자체 만으로도 이 게임을 구입한 금액이 조금도 아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잠시 후. 객석에서 들려오는 힘찬 박수 소리와 함께 신의 선물의 본격적인 스토리가 시작되었다.

쇼팽의 아름다운 피아노 선율 만큼이나 즐겁고 행복한 이야기가 될거라는 상상을 잠시나마 떠올렸지만, 그런 나의 예감은 게임 속 주인공의 사고 장면과 함께 산산히 부서져 내렸다.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구급차의 싸이렌 소리와 도와 달라는 한 여자의 외침.

응급실에 실려 빠르게 스쳐 지나는 전등 불빛 속에서 한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신이시여. 이대로 그를 데려가지 말아주세요.”

청하하게 울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네 명의 히로인 중 누구의 것인지 분간 할 수 없도록 희미하게 반복 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그녀의 간절한 바램 속에 누군가의 목소리가 섞여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과연 신의 응답이었는지... 악마의 꼬임이었는지는 이 게임을 클리어 해야만 알수 있는 부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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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돌려 사고가 일어나기 1년 전으로 돌아온 주인공에게는 총 4명의 여주인공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나는 카오리라는 이름의 생기발랄한 바이올리스트가 마음에 들었다.

그녀는 동갑내기 임에도 주인공의 우유부단한 성격을 확실히 이끌어 주는 누나 같은 면이 있었다.

주인공은 1년이란 시간 안에 자신을 위해 기도해 주었던 히로인이 누구였는지를 떠올려야 했는데, 피아노를 연주 할 때에만 그녀에 대한 기억이 단편식으로 떠오르기에 피아노를 연주하는 파트에서는 최대한 미스를 내지 않게 노력해야만 했다.

특히나 두 번째 챕터에서 카오리와의 협주 중에 떠올리는 그녀와의 추억은 카오리가 사고 당시 주인공을 구해준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아련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주인공을 구해준 히로인이었으면 좋겠다...’

기억을 잃었어도 자신을 위해 기도해준 그녀를 찾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는 주인공..

자신에 대한 기억을 모두 잃는다 하여도 주인공을 살리고 싶었던 그녀의 간절한 바램..

이 둘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안데르센의 동화 인어공주가 떠올랐다.

그리고 동시에 그 슬펐던 결말도 함께 떠올랐다.

‘결국 왕자의 사랑을 얻지 못한 인어 공주는 물거품이 되어 사라졌습니다...’

< EP. 36 : 싱어송라이터.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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