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31 : 새로운 바람. (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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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8년 말에 출시된 NEGA 드라이브를 시작으로 16비트 게임기 시장이 열린지 어느덧 햇수로만 5년이 흘렀다.
그리고 1992년 가을에 접어든 현재.
가정용 콘솔 산업의 주도권은 완전히 일본으로 넘어온 상태였다.
더 이상 실패의 위험 부담을 안고 새로운 게임기를 만들어 내는 해외 기업은 없었기에 현 세대의 가정용 콘솔은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와 NEGA의 NEGA 드라이브.
그리고 펜타곤의 라온. 3강 체제를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번외적 요소를 가지고 있는 콘솔 기기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SMK에서 만들어낸 ‘지오 네오’라는 이름의 초고가 콘솔이었다.
지오 네오는 1990년에 출시되어 초반에는 사업장이나 가정용 임대기기를 목적으로 콘솔 사업에 뛰어 들었으나, 용격의 권과 이리의 전설이라는 대전 격투 게임이 기대 이상의 흥행을 거두며 최근에 가정용으로도 어느 정도 수요가 생겨난 모양이었다.
16비트 모토로라 6800 CPU와 8비트 자일로그 CPU까지 두 개의 CPU도 모자라, 비디오 칩셋은 동시에 4096 색에 380개의 스프라이트를 표시할 수 있도록 설계 되었다.
거기다 한 술 더 떠서 기기에 내장된 사운드 칩은 7개의 디지털 채널까지 포함해 총 15개의 사운드 채널을 지원하는 야하마 제품을 사용하는 이 제품은 간단히 말해 슈퍼 패밀리의 약 4~5배 가량의 성능을 자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오락실 기판 자체를 거의 통째로 꽂아 넣는 시스템으로 만들어진 ‘지오 네오’는 카트리지 하나당 가격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최근에 발매 되어 호평을 받은 용격의 권 같은 경우에는 게임 카트리지 가격만 약 3만엔 정도에 달했기 때문이다.
애초에 태생 자체가 가정용으로 개발 된 기기가 아니고 업소에서 사용할 제품이었지만, 카트리지 단가를 고려하지 않았기에 지오 네오는 웬만큼 돈이 많은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고서는 가정에서 찾아보기 힘든 콘솔기기 중에 하나였다.
스트리트 파이어2를 시작으로 활짝 열린 2D 격투게임 시장의 인기를 그대로 이어 받은 SMK는 격투 게임의 명가로 인정받으며 유저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가정용 콘솔의 판매량은 너무나 비싼 카트리지 가격으로 인해 SMK에서 만든 게임만 출시되었던 비운의 게임기로 기억 되었다.
이런 시기에 가장 먼저 새로운 콘솔을 제작 중이라 밝힌 제작사는 이번에도 전과 마찬가지로 NEGA였다.
NEGA CD를 발매하며 현세대에서 조금 더 승부를 끌어볼 계획이었지만, 기대 이하로 판매량이 폭삭 망한 덕분에 아이러니하게도 신기종의 출시가 앞당겨진 사례라고 할까?
“이번에도 NEGA가 먼저 움직였군요.”
본사 근처에서 함께 식사를 나누던 중 카와구치 대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나는 따스한 엽차를 한 모금 삼킨 뒤 입을 열었다.
“새로운 기종 이름이 NEGA 새턴 이랬나요?”
“네. 그렇습니다. 현재 발표한 예상 스펙만으로는 엄청난 2D 스프라이트 성능을 자랑하는 괴물 머신이 탄생 할 것 같군요.”
카와구치의 말대로 최초 NEGA 새턴의 발매 컨셉은 최고의 2D 그래픽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NEGA 새턴의 개발이 시작된 시기에는 아직 3D 게임이 굉장히 빈약한 시기였으니까..
당시 NEGA는 점점 높아져만 가는 아케이드의 대전 격투 게임을 그대로 가정용으로 이식 할 수 있는 최강의 콘솔을 만들고 싶어 했다.
앞서 말한 SMK의 격투 게임이라던가 캡코의 게임은 꽤나 높은 2D 그래픽 성능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편협한 선택이 NEGA 새턴의 발목을 끝까지 잡게 될 줄이야...
“그뿐만 아니라 센소니 역시 최근 민텐도와 잦은 교류를 하고 있다고 합니다. 민텐도는 묵인 하고 있지만, 센소니 측에서 먼저 차세대 슈퍼 패밀리의 게임 매체는 CD 라고 발표했다더군요.”
“기어 스테이션 프로젝트인가...”
“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혼잣말입니다.”
센소니의 발표에 민텐도가 묵인 하고 있다는 것은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부터 흔들거리고 있다는 증거.
슈퍼 패밀리의 사운드 칩을 설계해주며 민텐도와 친분을 쌓은 센소니의 쿠라카기 켄타로가 최근 민텐도 본사에 자주 들락거린다는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천천히 다가오는 32비트 시대의 전조에 살며시 미소 지었다.
하지만 그런 나와는 반대로 카와구치씨는 불안한 기색을 보였다.
“이렇게 된다면 저희 펜타곤도 나름의 준비를 해야 하지 않을까요? 미국의 롭군이나 엘리스에게선 아직 아무 연락이 없나요?”
“너무 걱정 하지 마세요. 라온은 태어난지 이제 갓 1년을 넘긴 신출내기지만, 1989년 슈퍼 패밀리의 런칭 때와 비교하면 거의 동급의 속도로 판매량이 오르고 있으니까요. 현재는 라온의 마케팅이나 게임 발매에 더욱 주력하는 게 좋을 듯합니다.”
“하긴 차세대 전쟁은 아직 시작 단계일 뿐이니, 너무 깊게 생각하지 않는 편이 좋겠군요.”
카와구치씨는 이제야 한시름 놓이는 표정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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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라 디렉터가 만들어 낸 신검전설 2는 카와구치씨의 우려와는 달리 이듬 해 8월 굉장히 빼어난 퀄리티로 완성 되었다.
특히나 라온의 데이터 케이블을 이용해 3명이서 함께 게임을 즐기는 협동 플레이 모드가 굉장히 인기를 끌었는데, RPG 게임을 친구와 함께 즐길 수 있다는 그의 발상이 라온의 컨셉과 제대로 맞아 떨어지며 적지 않은 인기를 불러일으키기 시작했다.
“준혁씨 이 게임 진짜 재밌는 것 같아요.”
RPG 게임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유키는 주말이면 이미 한번 클리어 한 신검전설 2를 시간이 날 때마다 함께 플레이하자고 조르곤 했다.
‘음... 작년에 드래곤 워리어 5랑 파이널 프론티어 5가 거의 연달아 발매했을 때는 몇 달 동안 조용하더니, 이젠 신검전설이냐...’
사실 이 시기의 게임은 나에게 있어선 영 감흥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과거에 즐겨본 작품들을 이제와 다시 플레이한다고 해도 초반의 향수를 자극 하는 것 말고는 딱히 즐겁다는 생각을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지금에 와서는 80년대 게임보다 그 향수가 더욱 옅게만 느껴진 달까?
우리는 가끔 주말마다 데이트를 겸해서 함께 아키바에서 게임 가게를 둘러보거나 도쿄의 맛집을 찾아다니곤 했는데, 유키는 항상 아키바에 올 때마다 뭐가 그리 신기한지 가게를 둘러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아!! 우치무라씨가 만든 피규어 가격이 또 올랐어요~!!”
“그래? 이번엔 얼만데?”
“19만엔이요.”
“······.”
이미 저쪽 업계에선 알아주는 인사(人士)니까···.
아무리 해마다 계속되는 불황이라고 메스컴이 떠들어 대어도 고가의 피규어가 판매되는 걸 보면 참 신기 하단 말야...
편의점에서 음료수를 사오는 동안 잠시 피규어 매장을 구경하고 온 미유키는 서둘러 내 쪽으로 달려오더니 나에게 물었다.
“우리집 거실에 있는 미유키 기모노 버전은 여기에 올리면 얼마에 팔릴까요?”
“그게 한때 입찰가가 80만엔까지 갈 뻔했었지.”
“지금도 그 정도 가격이 나올까요?”
“뭐, 그때는 좀 미묘한 경쟁이 붙어서 그랬지만, 지금 내놔도 한 30만엔이상은 받지 않을까? 최근에는 미연시물이 많이 등장해서 내가 없는 거리의 인기가 좀 사그라 든 느낌이 들긴 하지만...”
“하긴 그러고 보면 내가 없는 거리도 발매 된지 벌써 3년이나 지났네요. 그런 의미에서 혹시 내가 없는 거리의 후속작을 만들 계획은 없나요? 강준혁 디렉터님.”
그녀는 마치 인터뷰를 하듯이 나에게 주먹을 가져다 대며 빙긋 웃어 보였다.
“그건 곤란해. 솔직히 전편 이상의 감동을 줄 자신도 없고, 지금은 미연시 게임의 추세가 조금 묘하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아~!! 저도 알아요. 소문의 동급!! 읍!! 으읍!!!”
“야, 주변에 사람들도 있는데...”
잠시 후 자리를 옮겨 예전에 첸드라가 일했던 작업장 쪽으로 걸어온 우리는 밝은 햇살아래 높이 서 있는 빌딩을 바라보며 감탄했다.
“여기에 빌딩이 들어섰구나. 예전엔 첸드라가 패밀리용 복사팩을 만들던 작업장 골목이었는데...”
“어머, 첸드라씨가 그런 일도 했었어요?”
“어라? 내가 말 안했었나?”
“네. 처음 들어요.”
나는 잠시 길가에 서서 목을 축이며 첸드라를 처음 만났던 날에 대해 유키에게 이야기 해주었다.
“와~ 결국엔 거기서 꼬투리가 잡혀서 지금의 인연이 된 거네요.”
“뭐, 첸드라에게도 나에게도 당시엔 서로 윈 윈 할 수 있었지.”
“그렇게 드래곤 엠블렘이 만들어져서 저는 준혁씨를 만난거구요.”
“어라, 그게 또 그렇게 흘러가나?”
나는 첸드라의 작업장 위로 우뚝 솟은 빌딩을 바라보며 빙긋 웃음 지었다.
‘설마 이 자리에 게임 소프트웨어를 전문으로 판매하는 소프맵 건물이 세워질 줄이야...’
일본 게임 유통 산업을 대표하는 소프맵은 1층부터 5층까지 한 건물을 통째로 게임이란 컨텐츠를 판매하는 매장이었다.
보통 1층 같은 경우엔 현 세대에서 가장 인기가 좋은 기종을 전문으로 판매하였기에 현재 신규 오픈한 소프맵의 1층은 민텐도의 슈퍼 패밀리가 차지하고 있었다.
“와, 매장이 엄청 크네요. 펜타곤 샵 말고도 이런 전문 매장이 들어설 줄이야...”
“그러게, 최근에 오픈 했나 본데 한번 들어가 볼까?”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유키는 고개를 끄덕여보였다. 슬쩍 가게 안으로 걸음을 옮겨 내부를 둘러보니 새로 만들어진 매장답게 진열이 굉장히 깔끔해 보였다.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게임 가게라 치면 비좁은 가게 안에 게임 카트리지가 잔뜩 쌓여 있는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이곳은 마치 백화점처럼 종류 별로 모든 카테고리가 나뉘어져 있었다.
또한 자체적으로 인기 순위 집계와 더불어 기대작 순위까지 걸어 놓고 예약을 받고 있는 터라 뭔가 전문적인 느낌이 물씬 풍겼다.
매장 안의 이미지는 간판과 더불어 파란색으로 통일하여 일체감을 주었는데, 아무래도 큰매장이다 보니 가게 안에는 수많은 인파들로 북적거렸다.
“1층은 민텐도 뿐이네요. 라온은 어딨지...?”
그러자 옆에 지나가던 사원이 유키의 혼잣말에 친절히 대답해 주었다.
“손님. 펜타곤에서 출시한 라온 관련 제품은 2층에 준비 되어있습니다. 저쪽에 보이시는 에스컬레이터를 이용하시거나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시면 됩니다.
“아, 네. 감사합니다.”
“즐거운 쇼핑 되세요.”
“준혁씨 여기 마치 게임을 전문으로 판매하는 백화점 같아요. 에스컬레이터도 있고, 직원 분들도 친절하시고...”
유키는 처음 방문한 소프맵이 굉장히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잠시 후. 유키와 함께 2층에 도착하자 라온 전용 플로어라는 느낌이 물씬 들 정도로 곳곳에 체험용 라온 기기들이 많이 보였다.
그중엔 현재 최고의 인기를 달리고 있는 신검전설 2를 즐기고 있는 유저들이 많이 보였다.
아무래도 함께 할 수 있는 RPG 게임이다 보니 라온 유저들 사이에서 신검전설 2는 스파2와 같이 라온 유저라면 반드시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 소양 아이템이 되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확실히 재미는 있지만 한편으론 씁쓸하네...’
유키와 함께 2층 라온 플로어를 둘러보던 나는 쓰게 입맛을 다시며 게임들을 둘러보았다.
‘라온의 출시로 분명히 내가 알던 과거는 바뀌었을 텐데...’
응당 그에 따른 게임 시장의 변화가 미묘하다.
모든 게임은 내가 알던 시기와 거의 비슷하게 출시가 되었고, 게임의 내용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사실 이번엔 노무라에게 신검 전설 2의 제작을 맡긴 것도 라온이란 플렛폼을 이용해 기존에 내가 알던 게임에서 조금 달라지는 점이 있을까 기대했지만, 결과는 멀티 시스템이 조금 더 편리해졌을 뿐 딱히 달라진 점은 없었다.
보통 하나의 훌륭한 게임이 만들어지면 그에 대한 시너지 효과로 인해 새로운 게임이 파생되기 마련인데, 아직까지 내 가슴을 뛰게 해줄 색다른 게임은 단 한 번도 출시되지 않았다.
‘내 자극이 부족했던 걸까? 그게 아니면 현 시대의 게임 컨텐츠를 확 끌어 올려줄 인재가 부족한 걸까?’
고심 중에 바닥만 살피며 걸음을 옮기던 중 내 옆에서 팔짱을 끼고 걷고 있던 유키의 발걸음이 한 대형 TV 앞에 멈춰 섰다.
“응? 갑자기 왜 그래?”
“준혁씨... 저 게임은 무슨 게임이에요?”
유키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자, TV 화면에는 왠지 으스스한 느낌이 드는 다크 판타지의 세계가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단번에 내 시선을 사로 잡아버렸다.
‘어라? 폭스 소프트의 악마성? 아닌데... 뭐지?’
-깨어진 관 틈으로 붉은 달빛이 스며들 때. 백성을 제물로 바친 타락한 왕이 깨어날지니...-
“······.”
뭐지 오프닝부터 심장을 콱 움켜쥐는 듯 한 이 느낌은...
< EP. 31 : 새로운 바람. (2)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