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31 : 새로운 바람.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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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온의 1주년 행사가 끝나고 한 달이 지난 뒤. 용산역과 바로 이어지는 터미널 상가 3층에는 만트라가 직접 운영하는 게임 샵이 새로 생겨났다.
소연씨는 새로 오픈한 매장의 사진을 찍어 국제 우편으로 나에게 보내주었다.
그중엔 만트라 소속 직원들도 몇몇 보였는데, 이렇게 사진으로 다시 보니 참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일본의 펜타곤 샵과 비슷하게 꾸며진 만트라 샵은 오픈 첫날이라 그런지 수많은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사진으로만 보아도 당일 현장의 분위기가 어땠을지 생생하게 느껴진 달까?
한국에서 라온 전용샵을 오픈하기에는 시장 규모가 너무 작았던 탓에 만트라는 PC쪽 타이틀도 함께 운영하는 게임 전용 멀티샵이 되어있었다. (물론 국내 정식 발매 타이틀 위주긴 했지만...)
소연씨가 보내온 사진을 한 장씩 넘기다 보니, 자연스레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그때 하야시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한국에서 온 사진들입니까?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좋은 인연을 많이 만났으니까.”
“한국에는 미인이 많다던데, 유키씨네 어머님도 한국인이라면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부장님 한국 갈 때 저도 같이 따라가는 거였는데, 괜히 아쉽네요.”
그러자 반대편 책상에 앉아 있던 모리타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하야시에게 물었다.
“디자인 팀의 카오리씨랑 잘 되가는 거 아녔어?”
“카오리는 마냥 여동생 같은 느낌이라.. 영...”
“저 역시 팀장님 같은 오빠 둔 적 없는데요~”
노크도 없이 개발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디자인팀 소속의 카오리는 하야시 쪽으론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를 향해 살포시 웃어 보였다. 그러자 곧이어 그녀 뒤로 하야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니 무슨 육백만불의 사나이에 나오는 소머즈도 아니고, 우리 사무실 방음이 이렇게 취약했나?”
“제가 청력이 좀 좋거든요. 강준혁 부장님. 회의 참석 하실 시간입니다.”
“아,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그런데 왜 카오리 네가 왜 여기에?”
“글쎄요.. 카와구치 대표님께서 새로운 신작의 몬스터 디자인에 저를 비롯해 타마고 몬스터 팀 몇몇을 포함 시켜 주셨던데요?”
“그래?”
“아마도 이번에 대표님께서 기획 중인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는 조금 특별할 것 같아요.”
카오리의 기대에 찬 목소리에 제 2 개발실 팀원들은 고개를 갸웃 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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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한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는 차기작인 5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었다.
사실 이 이야기를 하자면 작년 라온과 함께 동시 발매된 파이널 프론티어 4로 이야기가 돌아가게 되는데, 당시 새로운 차세대 기종으로 파이널 프론티어 4의 기획 단계에서 제 1 개발팀 내에서 의견이 엇갈린 적이 있었다.
기존에 파이널 프론티어가 가지고 있는 RPG 형식을 유지하자는 보수적인 의견과 새로운 차세대 기종의 출시에 맞춰 모든 걸 새롭게 만들어 보자는 진보적인 의견이 양립하던 시기.
메인 디렉터인 카와구치씨는 기존의 파이널 프론티어가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JRPG의 진행 방식에 손을 들어 주었고, 그렇게 탄생한 작품이 용기사의 이야기를 다루는 파이널 프론티어 4였다.
하지만, 이렇게 따로 회의까지 하는 걸 보면 그 역시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안이 굉장히 아쉽긴 했던 모양이다.
“오늘 회의 내용은 전에 말씀 드린 대로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의 파생 작에 대한 안건입니다.”
회의실에 모인 인원은 나를 포함해 제 1 개발팀에서 최초 안건을 내었던 직원들로 구성 되어 있었다.
카와구치 대표는 잠시 나와 눈을 마주 친 뒤, 프로젝터의 스위치를 눌러 새하얀 스크린에 기획안을 투영시켰다.
“우선 이 안건은 작년에 올라왔던 새로운 파이널 프론티어에 대한 기획서를 토대로 만들어 졌음을 알립니다. 당시 제 1 개발팀 소속이었던 노무라 디렉터는 캐릭터 자체를 움직여 필드에서 싸워나가는 액션 RPG 기획안을 발표 했었는데, 당시에는 파이널 프론티어 특유의 분위기를 해친다는 이유로 이견(異見)이 엇갈렸던 작품 중에 하나였습니다. 하지만 파이널 프론티어 라는 제목을 제쳐두고 생각한다면 노무라가 기획한 이 게임은 상당히 독특한 방식의 게임성을 지니고 있어. 이대로 두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새로운 게임의 기획서를 펼쳐 보았다.
그리고 첫 장에 들어난 게임의 제목을 바라본 나는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을 흘렸다.
‘혹시나 했었는데, 역시 이거였나?’
파이널 프론티어 시리즈와 더불어 내가 알고 있던 과거에서 참 재미있게 즐겼던 게임 중에 하나였지...
“일단은 계속해서 파이널 프론티어라는 가칭을 사용할 수 없기에 따로 타이틀을 붙여 보았습니다. 새로운 프로젝트의 제목은 ‘신검 전설2 ?시크릿 오브 마나-’입니다.”
그러자 내 옆에 있던 카오리가 손을 번쩍 들며 입을 열었다.
“어라? 2라구요? 그럼 1은 뭔가요. 대표님?”
“카오리씨는 잘 모르겠지만, 사실 저희 펜타곤에서 액션 RPG 게임을 하나 만든 적이 있습니다.”
“정말요? 라온으로 나왔나요?”
카오리의 질문에 옆에 있던 내가 입을 열었다.
“민텐도의 휴대용 겜보이 용으로 만들었던 신검전설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네, 그렇습니다. 당시 RPG가 부족했던 휴대용 겜보이에서 나름 성공한 IP중에 하나였죠. 아이러니하게도 그 작품 역시 최초 파이널 프론티어의 기획안으로 파생 되었던 작품이기에 나름 인연이 있다고 볼 수 있지요. 그래서 새로운 게임의 제목을 신검 전설2로 정했습니다.”
회의실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카와구치씨의 자세한 설명에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했다.
최근 일본의 RPG 게임 시장은 조금 미묘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기존의 드래곤 워리어 라던가 파이널 프론티어 같은 정통 RPG 와는 다르게 액션이 가미된 새로운 RPG 게임이 기대 순위에 올라와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탑 클래스를 달리고 있는 작품은 트라이포스에서 제작 중인 ‘테일즈 오브 일루션’ 이라는 게임이었다.
NEGA의 제작 발표회에서 굉장한 반응을 이끌어낸 이 작품은 최근 NEGA 드라이브용 플렛폼으로의 개발을 포기했다는 발표가 있었다.
개발 취소의 이유로는 추가적인 그래픽 향상을 이루기 위해 NEGA 드라이브 성능이 부족하다고 개재되어 있었으나, 사실 그것은 누가 봐도 핑계에 불과 했다.
작년 크리스마스 시즌 이후로 NEGA 드라이브의 보급률이 확실히 늘어났지만, 그것이 자연스럽게 NEGA CD의 구매로 연결이 되지는 않았다.
겨우 콘솔 시장에서 흑자 반열에 올라섰던 NEGA는 시대를 너무 앞서간 NEGA CD로 인해 굉장히 힘겨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이 사건을 계기로 민텐도는 자신 만의 고집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는데, NEGA CD의 실패를 똑똑히 지켜본 민텐도의 카마우치 사장은 카트리지 시스템이야 말로 가정용 콘솔기기에 가장 적합한 매체라고 발표하며 완전히 ‘롬 카트리지 신봉자’가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뭐 민텐도 입장에서야 카트리지 생산을 포기할 이유가 없지. 그로인해 받고 있는 로열티가 어마어마하니까.
아무튼 트라이포스는 그렇게 NEGA를 떠나 현재 발매 기종 ‘미정’인 상태로 돌아왔고, 기기 보급률과 판매량 고려해 민텐도 쪽과 이야기를 진행 중이라는 소문이 업계에 돌고 있었다.
사실 이 만큼 신규 게임이 인기가 오른 것에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테일즈 오브 일루션은 지금까지 RPG 게임을 즐겨 해온 플레이어라면 누구나 한번 쯤 꿈꿔왔을 이상향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지...
‘전투가 재미있는 RPG 게임.’
이것이 현재 RPG 게임의 트렌드였다.
슈퍼 패밀리와 라온에 비해 상대적으로 RPG 게임이 부족한 NEGA 에서는 이번에 ‘테일즈 오브 일루션’을 잃고 나서 새로운 액션 RPG 게임 하나를 발표했는데, 그것이 바로 NEGA 드라이브용 게임 중에서 최고의 명작이라 일컬어지는 ‘스토리 오브 토르’ 였다.
이미 다양한 RPG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민텐도와 복수심에 불타 새로운 액션 RPG를 제작 중인 NEGA.
그러한 RPG의 홍수 속에서 우리 펜타곤 역시 가만히 지켜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궁금한 점이 있었다.
‘왜 나는 여기에 있는가?’
새로운 IP인 신검전설은 제 2 개발팀 부장인 내가 관여할 사항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나의 이런 궁금증은 카와구치씨의 말 한마디에 말끔히 풀려 버렸다.
“저는 이 새로운 액션 RPG 게임에 조금 새로운 시도를 해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선 준혁씨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걸 느꼈습니다.”
음? 설마 카와구치씨 당신...?
불길한 느낌에 카와구치씨를 향해 입을 열려던 순간. 그는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띄우며 먼저 운을 떼었다.
“저는 신검 전설의 메인 디렉터를 준혁씨가 맡아 주셨으면 합니다.”
그 순간 회의실에 모여 있던 제 1 개발팀 인원들의 표정이 동시에 싸늘하게 굳어 버렸다.
하하... 이 사람들 내가 데리고 있는 팀원들에게 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나보군. 사람들의 반응에 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카와구치 대표에게 물었다.
“왜 굳이 저를 선택 하신 거죠? 이 자리에는 최초 기획자인 노무라씨가 있는데, 그를 선택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 까요?”
“사실 이것은 노무라 개인의 부탁이었습니다. 준혁씨 밑에서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싶다고 하더군요.”
“네?”
내가 앉은 테이블의 맞은편에 앉아 있던 노무라는 나와 눈을 마주치자,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부장님. 저 역시 부탁드립니다.”
흐음.. 새로운 신검전설이라.
나 역시 어릴 시절 굉장히 좋아했던 게임인 신검 전설 시리즈는 당시 액션 RPG에서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최고의 재미를 느끼게 해주었다.
특히나 차후에 발매될 3 같은 경우는 슈퍼 패밀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에 꼽을 수 있는 최고의 명작이라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런 게임을 내 손으로 직접 만들 수 있는 기회라 이거지...’
물끄러미 회의실 안에 모인 개발팀 직원들의 표정을 살핀 나는 웃으며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대표님. 신검전설의 메인 디렉터 자리는 제가 맡기 어려울 것 같네요. 노무라씨 역시 이미 펜타곤에서 잔뼈가 굵은 기획자이고, 이번 프로젝트는 그가 메인이 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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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노무라씨를 메인으로 새로운 프로젝트의 개발팀이 열리는 것으로 회의를 끝낸 나는 대표실에서 카와구치 대표와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다.
“내 눈에 노무라는 메인 디렉터로서 아직 부족해 보여 준혁씨가 맡아 주셨으면 했는데, 혹시 따로 준비하고 계시는 프로젝트라도 있으신가요?”
카와구치씨의 물음에 나는 입가에 커피 잔을 옮기며 대답했다.
“최근에 민텐도와 센소니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더군요. 그리고 NEGA 역시 주변기기로 발매되었던 NEGA CD를 기반으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한다는 소문이 있구요.”
“콘솔 기업들의 새로운 움직임이라니, 설마...?”
“대표님이라면 대충 눈치 채셨겠지요. 새로운 콘솔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 지는 것도 아니니까요. 어쩌면 벌써 시작된 걸지도 모르죠.”
나는 테이블 위에 커피 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 붙였다.
“차세대 콘솔의 스펙과 사용될 매체에 대한 기업들의 눈에 보이지 않는 신경전이...”
< EP. 31 : 새로운 바람. (1)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