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72화 (172/252)

< EP. 30 : 드래곤 마운틴. (5) >

“현시간부로 더 이상. 나진 터널 상가에 라온에 관련한 모든 제품을 일체 유통시키지 않겠습니다.”

“어억!!”

“뭐라고!!!”

이것이 바로 나진 상가 업주들 사이에서 떠돌던 흉흉한 소문의 전조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유저들 사이에 끼어 있는 업주들에게서 즉각적으로 나타났다.

“우리한테 물건 아예 안주겠다고!?”

“나 참 어이가 없네. 아예 물건 팔 생각이 없구만.”

그 순간 생각 없이 말을 내뱉은 업주들에게 유저들의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바보가 따로 없군. 여기서 저런 소리를 내뱉었다는 건 자폭이나 마찬가지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한 채 다시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러분이 용산 전자 상가를 이용하는 이유는 뭘까요? 여러분이 사는 동네에 게임 샵이 없어서? 아니죠. 있습니다. 지방이라면 몰라도 서울 근교에 거주 하신다면 요즘 같은 시기에 PC 판매점 한 두 군데쯤 없을 리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곳에서도 분명 게임을 팔고 있습니다. 그것이 불법 소프트웨어든 아니면 정품 소프트웨어든 말이죠.”

“하지만, 그럼에도 여러분이 서울의 중심가에 위치한 이 용산을 찾는 이유는 게임 타이틀의 다양성과 더불어 조금이라도 더 싸게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서겠죠. 물론 그렇습니다. 현재 한국을 대표하는 게임 상가는 이곳 용산과 청계천 세운상가뿐이니까요.”

행사장에 모인 유저들은 내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하자, 인파속에 섞여 있던 업주들이 붉어진 얼굴로 슬금슬금 자리를 피하기 시작했다.

나는 그들이 모두 밖으로 빠져 나가기 전에 서둘러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용산은 변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그러진 않았죠. 하지만 게임이란 시장이 점점 더 커지며 유저들에게 못 된 상술을 부리는 매장이 점차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러자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던 한 유저가 번쩍 손을 들며 질문을 걸어왔다.

“그래도 드래곤 워리어 5 같은 일본에서만 발매된 게임들을 구하려면 결국 나진 상가를 이용할 수밖에 없잖아요.”

“하긴, 그건 그래. 달리 구할 곳이 없으니.”

나는 유저들의 목소리에 짧게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아직 우리나라는 일본과의 정식 수입이 가능한 협상 품목에 게임과 애니메이션이 빠져 있지요. 그렇기에 여기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님은 유저분들을 위해 지난 한 달간 직접 직원들과 용산 전자상가를 돌며 양심적인 가게와 비양심적인 가게를 분류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내용은 이 달 말에 만트라에서 발간하는 게임 월드에 사례를 기재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더불어 여러분께 한 가지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소비자의 권리는 소비자가 찾아야합니다. 지난 달 제가 용산을 방문했을 때, 여러 매장에서 드래곤 워리어 5의 예약을 받고 있더군요. 일본에서도 큰 인기를 끌고 있는 시리즈이고, 슈퍼 패밀리의 카트리지 단가가 워낙에 비싸다 보니 9200엔이라는 다소 높은 가격에 출시될 예정입니다. 현재 환율로 약 73000원 가량 나오는 금액이죠.”

“하지만 제가 알아본 바로는 용산에서 이 소프트의 구매 가격은 18만원이었습니다. 최근엔 거의 20만원까지도 받고 있더군요. 물론 그 분들이 일본에서 들여오는 노고를 무시하자는 뜻은 아닙니다. 하지만 두 배 이상의 금액을 받는 것은 명백한 폭리죠. 그래서 여러분께 소비자의 권리에 대해 더더욱 강조해 말씀 드리는 겁니다.

‘비싼 건 비싸다.’, ‘이 가격엔 구매할 수 없다.’ 왜 말을 못합니까? 좋아하는 게임을 조금이라도 빨리 즐기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판매자의 편을 들어주다보면 끝도 없을 것입니다.”

나의 말에 방금 전 질문을 걸어온 유저가 또 다른 질문을 걸어왔다.

“그럼 대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무조건 하면 안 된다고 하기 보단 방법을 알려주셔야죠.”

“네.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부터 여러분께 그 방법을 알려드리도록 하죠. 방금 전에 말했다 시피 이 달 말에 발행되는 ‘게임 월드’에 용산 게임 상가에 대한 새로운 코너가 게시될 예정입니다. 첫 달은 만트라의 직원분들이 직접 발로 뛰어 다니며 수고해주셨지만, 아마 몇 번 더 순회를 돌고 나면 직원들의 정체가 드러나겠지요. 그래서 이제부턴 여러분들께 부탁드립니다. 여러분이 다녀간 매장의 친절도와 판매되는 게임의 가격이 적절한지에 대해 잡지사에 투고해 주세요.”

“이곳 용산에도 분명 좋은 가격에 친절한 매장이 다수 존재합니다. 하지만, 대형 업주의 횡포에 밀려 구석진 자리로 밀려나 있지요.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다른 전자 제품에도 이러한 형태의 횡포가 만연하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가장 큰 힘은 매장을 선택할 수 있다는 점입니다. 부당하다 느끼는 가격에 억지로 구입하기 보단 정보 공유를 통해 올바른 소비를 해주길 부탁드립니다. 이상입니다.”

“······.”

짝... 짝짝..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 된 박수 소리가 조금씩 넓게 퍼지며 금세 터미널 상가 1층을 가득 메우기 시작했다.

“와아... 진짜 속이 다 시원하다!!”

“이번 달에 게임 월드 발매하면 꼭 사야하지. 거기 기재된 매장만 갈 거야.”

“아오, 젠장. 듣고 보니 내가 겁나 호구였네. 당장 취소하러 가야겠다.”

“진즉에 누가 이런 것 좀 해줬으면 좀 좋아...”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이 여기저기서 들려오자, 아직 행사장에 남아 있던 업주들은 굉장히 곤란한 표정을 지어보였다.

‘이걸로 얼마나 용산이 바뀔지 모르지만, 일단 최소한의 고삐하나는 걸어둔 셈이네...’

나는 마이크를 쥔 손에 힘을 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여기까지가 저희 펜타곤과 만트라의 대책입니다. 하지만 사태가 이렇게까지 흘러간 것에 대한 것은 관리가 미흡했던 저희의 책임도 분명히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번에는 여러분께 그 보상에 대해 알려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보상? 뭐가 또 있는 건가?”

보상이라는 말에 시끌벅적하던 행사장이 일순간에 고요해졌다.

그 순간 내 등 뒤에 있던 스크린에서 말을 타고 다리를 건너는 기사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한 게임의 오프닝 영상이 재생되기 시작했다.

“어? 뭐지? 라온의 새로운 게임인가?”

나는 스크린이 가려지지 않도록 무대 가장자리로 물러서서 유저들과 함께 새로운 게임의 오프닝을 감상했다.

기사가 말을 타고 지나간 다리 위로 찬란한 태양이 비치고 푸른 하늘에 그려진 타이틀은 ‘어크토니시아 스토리’였다.

모리타가 있었다면 좀 더 근사한 오프닝을 만들 수도 있었지만, 순수하게 국내 개발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국산 RPG라는 타이틀이 가져오는 효과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대신 오프닝은 게임의 초반 이벤트 장면을 짜깁기 하여 조금 더 분량을 늘려 놓았는데, 이게 생각보다 반응이 상당히 괜찮았다.

“국산 RPG?”

“오? 뭐지. 느낌은 상당히 괜찮은데?”

특히나 카이난의 지팡이의 호송식 장면에서는 그 엄숙한 분위기에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본래라면 조금 허전 했을지 모르는 호송식 이벤트에서 스프라이트 효과를 더하니 제법 괜찮은 그림이 그려졌다.

그리고 이어지는 전투 씬에서 행사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의 표정에 경악이 스쳤다.

“저건 드래곤 엠블렘 2에서 나온 전투 방식이잖아!?”

그렇다. 기존에 밋밋했던 SRPG의 전투 방식을 개선해 좁은 맵에서 전술적인 행동이 가능한 택틱컬 형식을 도입시키자, 게임성이 180도 다르게 느껴졌다.

“우와아... 국산 RPG가 이 정도 퀄리티까지 발전한 건가?”

어딘가에서 드래곤 엠블렘의 레이드 방식을 따라했다는 비난이 들려왔지만, 곧이어 배틀 시스템 디렉터에 내 이름이 떠오르자, 유저의 일갈(一喝)은 곧장 환호로 바뀌었다.

“오오!!! 드래곤 엠블렘의 제작자가 참여했어!?”

“대박이다!! 그럼 이 게임은 펜타곤과 합작이라도 봐도 되는 건가!?”

짧은 오프닝 영상은 마지막에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라는 타이틀을 다시 한 번 유저들에게 각인 시켜주며 끝을 맺었다.

나는 새로운 게임의 소개로 멍한 표정을 짓고 있는 유저들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입을 열었다.

“어크토니시아 스토리는 한국의 솜노리라는 인디 게임 개발 업체에서 만든 순수 국산 게임입니다. 보시다시피 저는 어크토니시아에서 전투 시스템을 파트를 맡아 작업을 도와드렸습니다.”

한국에서도 제법 내 이름이 먹히는 터라 그런지, 유저들은 환호성과 함께 큰 박수를 보내주었다. 왠지 이대로는 솜노리의 이원승 대표의 공을 가로채는 느낌이 들어 나는 서둘러 그를 무대 위로 불러들였다.

나에게서 마이크를 넘겨받은 이원승 대표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관심 속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유저들에게 첫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방금 봐 주신 어크토니시아 스토리의 메인 디렉터인 이원승이라고 합니다. 게임을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서 재미로 시작한 어크토니시아 스토리가 이렇게 콘솔용 게임으로 발매 된다고 생각하니 굉장히 뿌듯하고 설레이기도 합니다. 아직 국내 게임 개발은 일본이나 미국에 비해 미흡한 점이 많지만, 강준혁씨와의 인연으로 이렇게 훌륭한 게임을 만들게 되어 굉장히 기분이 좋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여러분께 한 가지 말씀을 올리자면 저희 솜노리 소프트는 이번 어크토니시아를 시작으로 한국 게임의 건승을 위해 노력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아, 드디어 우리나라에도 콘솔 게임 전문 개발 업체가 탄생하는 건가!?”

“감동이다. 파이널 프론티어나 드래곤 엠블렘이 한글화 됐을 때랑은 또 다른 느낌이야...”

“응원합니다~!! 좋은 게임 많이 만들어 주세요!!”

유저들의 응원에 이원승 대표는 가슴이 벅차오르는지,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나 역시 한국 유저들의 응원에 가슴이 뭉클 해지는 순간이었다.

이원승 대표에게서 마이크를 다시 넘겨받은 나는 살짝 미소 지으며 어크토에 대한 추가 설명을 덧붙였다.

“어크토니시아는 현재 올 겨울 발매를 목표로 열심히 작업 중에 있습니다. 더불어 이 게임은 라온 1주년 발매 기념과 그동안 라온을 사랑해 주신 유저 여러분들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잠시 후. 내가 발표를 마치고 무대를 내려오자, 어마어마한 함성과 박수 소리가 1층 홀을 가득 메웠다.

&

라온의 1주년 기념행사가 끝난 후.

나는 김한석 대표와 함께 일전에 만난 요정에서 조졸한 술자리를 가졌다.

“아무리 그래도 어크토니시아 스토리 번들 패키지 발표와 무료 배포는 저희도 깜짝 놀랐습니다. 미리 말씀 좀 해주시지...”

“사전에 이야기 못 드려서 죄송해요. 그저께까지 솜노리에서 작업에 열중하느라, 미리 말씀을 못드렸네요.”

“하지만, 반응은 엄청 좋았습니다. 한시적 배포니 플래시 카트리지의 판매도 더 늘어나겠지요?”

“미리 시장 조사 완료하셔서 펜타곤 쪽에 수주해 주세요. 아마 소연씨에게 시키면 잘해낼 겁니다.”

“네. 그렇게 하도록 하겠습니다.”

“아직 나이가 어리지만, 소연씨는 경영 쪽에 남다른 재능이 있더군요. 일반적인 사무 보조 보단 김대표님의 비서로 두시는 편이 더 유용할 거라 생각합니다.”

“확실히 지난 한 달간 준혁씨에게 많은 걸 배운 모양이더군요. 앞으로가 기대되는 사원입니다. 말씀하신대로 시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아, 그리고 한 가지만 더 부탁 드려도 될까요?”

“네? 어떤 부탁을...”

김대표에게 차후 라온의 생산 라인에 대한 내 생각을 전해주자 그는 놀란 토끼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준혁씨. 그 곳에는 정말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황무지일 뿐이에요. 그런 곳에 생산 공장을 만드신다니, 저는 이해할 수가 없네요.”

“어차피 10년 정도를 바라보는 일시적인 생산 공장일 뿐입니다. 차후에는 다른 나라로 생산 라인이 변동 될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그 땅의 부지를 전부 매입해둘 생각입니다.”

“허어... 뭐 저야 상관없지만, 괜히 헛돈을 쓰시는 게 아닌지 걱정이 되는군요..”

김대표는 나의 선택이 영 마음에 걸리는지 술잔을 비우며 혼잣말을 되뇌었다.

“분당의 판교라. 그곳에 뭐가 있다고... 허~ 참...”

< EP. 30 : 드래곤 마운틴. (5)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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