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69화 (169/252)

< EP. 30 : 드래곤 마운틴. (2) >

“선금은 5만원입니다. 예약하시겠어요?”

“됐습니다.”

“어차피 다른 가게 가보셔도 다 마찬가지에요. 물건도 손님들 서비스 차원으로 한 두 개 겨우 떼어 오는 거라. 사실 저희도 남는 게 없어요.”

하~ 구라도 어느 정도껏 쳐야 미끼를 물지. 9200엔을 현재 원화로 바꾸면 약 73,000원 정도다. 그런데 18만원이라니, 2.5배를 더 받아먹으면서 남는 게 없다니 말이 되나?

나는 기가 차서 가게 앞에 걸린 슈퍼 패밀리 가격표를 힐끗 바라보며 말했다.

“게임 하나 가격이 콘솔 한 대랑 똑같네요?”

“아유~ 이것도 미래상사에서 국내 정식 발매해서 싸진 거지, 작년만 해도 38만원이었어요.”

자랑이다. 이 자식아.

나는 속으로 욕을 날려주곤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소연씨는 내 곁에 바싹 붙어 따라왔다.

“원래 게임 가게가 이렇게 불친절한가요?”

“저건 빙산의 일각일 뿐입니다.”

나는 다음으로 터널 상가에서 제법 규모가 큰 매장을 들렀다.

그러자 풍채 좋은 아저씨가 가게 안에서 부채질을 하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서옵쇼. 아이구~ 연인끼리 게임 사러 오셨구만, 여기선 참 드문 일인데. 아가씨 게임 좋아해요?”

“아, 네. 좋아합니다.”

가게주인은 소연씨의 대답에 껄껄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펄럭 거렸다.

이렇게 일상적인 대화로 자신에 대한 경계심을 낮추면 아무래도 판매가 용이하다보니, 어느 정도 판매 경력을 가진 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방법 중에 하나였다.

주인은 다음으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젊은이는 무얼 찾나? 물어보는 게 더 빠르니까. 어여 물어 봐.”

“라온을 좀 구입하려고 왔는데요.”

“새 걸로 찾나? 중고로 찾나?”

“새 건 얼마고 중고는 얼마입니까?”

“얼마까지 알아 봤는데?”

“······.”

이 사람들이 진짜...

나는 순간 울컥했지만, 최대한 평온한 표정으로 답했다.

“가게 앞에는 19만원이라고 쓰여 있던데, 아닌가요?”

“맞아 19만원.”

주인은 비좁은 카운터 안쪽을 뒤적거리다가 라온의 패키지 박스를 꺼내어 진열대에 올려 두었다. 그리고 나는 그 부분에서 다시 할 말을 잃었다.

내 앞에 놓여진 박스는 제대로 보관이 안되어 여기저기 긁히고 구겨진 박스였기 때문이다.

“저는 새 걸로 말씀 드린 건데요?”

“그거 새 거 맞아. 열어서 확인해보게.”

주인은 좁은 카운터 안에서 땀을 뻘뻘 흘리며 연신 부채질을 해대었다.

결국 나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패키지 상자를 열기 전에 개봉 부분을 살펴보았다. 역시 당연하게도 ‘밀봉씰’이 손상 되어 있었다.

하마터면 급한 마음에 밀봉씰을 뜯어내기라도 했다면, 그대로 덤태기를 쓸뻔 했군.

칼로 잘라낸 것은 아니지만, 조심스레 스티커를 제거 한 흔적을 발견한 내가 주인을 바라보자, 그는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얼버무렸다.

“원래 제품을 인도 받을 때 안에 내용물이 잘 들어 있나, 우리 소매점에서 확인을 해보게 되어 있어. 혹시나 팔았는데, 손님이 내용물이 안 들어 있다고 우기면 우린 방법이 없으니까.”

장사를 하는 사람이 물건의 하자보다 손님을 먼저 의심하다니, 점점 기가 막히는구만..

그때 보다 못했는지, 소연씨가 주인아저씨에게 따지듯 물었다.

“그러면 판매하실 때 직접 개봉해서 손님이랑 같이 확인 하면 되잖아요.”

“어허~ 아가씨가 어려서 뭘 모르나 본데, 그 순간에 이 제품은 곧바로 중고가 되는 거야. 만약에 손님이 변심하면 못 파는 물건이 된다고.”

전형적인 꼰대 마인드로 무장한 이 사람에게는 어떤 말도 통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아저씨가 한 말을 그대로 이용하기로 했다.

“그럼 일단 이 제품은 아저씨께서 한번 열어 봤다는 뜻이네요?”

“그렇지. 내용물에 하자가 없는지 확인해야하니까.”

“전 아저씨가 확인한 제품은 필요 없습니다. 새 상품을 열어서 꺼내 봤다는 것은 이미 그 시점에서 중고나 다름없으니까요.”

“어허... 젊은 사람이 말귀를 잘 못 알아듣는군.”

대체 누가 누구에게 하는 소리인지 모르겠네. 이 사람 새 것과 중고의 차이를 모르나?

그때 주인장이 불쾌한 표정과 함께 다시 허리를 숙여 선반 아래에서 새로운 라온을 꺼내 들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법 상태가 온전한 녀석이 튀어 나왔다.

“22만원이네.”

“네? 아까는 새 거가 19만원이라고...”

“그저께 새로 들어온 물건이야. 밀봉씰에 손상이 없는 완전한 신품은 22만원이네.”

어차피 똑같은 기기인데 매장에 들어온 기간이 무슨 소용이지? 이 아저씨랑 계속 말을 섞다보니, 굉장히 헷갈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 후로 게임 소프트에 관해서도 물어보았지만, 게임 역시 이런저런 말도 안되는 이유로 정가보다 조금씩 더 붙여 팔고 있었다.

결국 안되겠다 싶어 구매를 포기하고 가게 밖에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대놓고 들으라는 듯이 아저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날도 더운데, 별 미친년 놈들이 찾아와서 귀찮게 하네. 아~ 짜증나.”

그 이후 몇 군데 매장을 좀 더 둘러보았지만, 다른 곳 역시 단가는 거의 비슷비슷했다.

때때로 가게 주인은 우리가 아닌 건너편 매장의 업주와 눈빛을 교환하며 사인을 주고받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결국 다시 처음의 터널 상가의 입구로 돌아온 나는 푹푹 찌는 더위 속에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한 패스트 푸드 점을 찾았다.

“일단 저기에 들러서 목이라도 좀 축이죠.”

“네...”

소연씨는 처음 느껴본 소매 현장에 대해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나 역시 마찬 가지였다.

다음 차세대기의 매체가 CD로 접어들게 되면 이곳 용산은 복제 CD의 총본산지가 될 터였다.

MOD 칩이라는 개조용 칩을 들여와 정품을 구매하러 온 유저를 꼬드겨 기기를 개조 시키고, 그 과정에서 렌즈나 부품을 바꿔치기하는 악덕 업주가 늘어나며 용산은 국내 최고의 전자상가에서 비도덕적인 상인들이 모인 상가로 이미지가 추락하게 된다.

비단 게임뿐만 아니라 CD 플레이어, 카메라, PC 부품 역시도 조금만 방심하면 소비자를 호구 취급하며 바가지를 씌웠으니, 망해도 이상할 게 없지...

하지만 지금은 1992년.

적어도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는 2000년대 초반까지는 최신 게임이나 PC 부품을 구하기 위해선 울며 겨자먹기로 용산을 찾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전 정말 이해가 안돼요. 어떻게 제품이 들어온 시기에 따라 돈을 더 받을 수 있죠? 거기다 밀봉 스티커를 소매점에서 일일이 뜯어 내용물을 미리 확인하다니, 물론 공장에서 출하할 때 미스로 인해 불량인 제품도 있긴 하지만, 이건 명백히 공공 거래에 어긋난 행동이라구요.”

나는 불 같이 화를 내는 소연씨를 진정 시키며 입을 열었다.

“아마 밀봉씰이 뜯어져 있던 것은 반품 제품일 겁니다.”

“반품이요?”

“손님의 단순 변심이거나, 아님 기기에 이상이 있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진열대에 있던 제품이겠죠.”

“어떻게 그런걸 알고 계세요?”

“우선은 박스의 구김 상태죠. 딱 봐도 그 박스는 빈 박스로 상당히 오랫동안 보존 되었을 거예요. 안에 내용물이 들어 있었다면, 절대 그런 식으로 구겨지진 않았을 겁니다. 흔히들 하는 수법이에요. 소비자들에게 실물을 보여주기 위해서 진열품은 필수니까요.”

“그럴리가요. 저희 만트라에서는 분명 손님들에게 보여드릴 진열용 데모킷을 드리고 있는데...”

“그것마저 팔아 버리는 겁니다. 그리고 새 상품을 꺼내 손님들에게 보여주고, 너무 오래됐다 싶으면 잘 닦아서 패키지 상자에 다시 넣어 두는 거죠. 그리고 정상가에 팔고 나서 다른 새 상품을 진열합니다.”

나 역시 이 수법에 한 번 속아 고등학교 때 매장에 진열된 MD플레이어를 비싼 가격에 산 기억이 있었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음료수를 삼키고 있는 그녀에게 물었다.

“많이 놀랐어요?”

“놀라기 보단 굉장히 실망했어요. 소매점에서 이런 식으로 나오면 우리가 아무리 열심히 노력해도 결국 소비자들이 피해를 볼 수밖에 없잖아요.”

“맞아요. 그래서 올바른 유통 라인을 구축하는 것이 중요한 겁니다. 또한 그것을 알리는 마케팅도 중요하죠.”

“하지만 저희 회사에는 아직 그런 부서가 없어요.”

만트라의 직원은 70명이나 되지만, 굉장히 여러 가지 일을 하는 회사였다.

콘솔 전문 잡지를 만드는 편집부와 게임을 퍼블리싱 하는 영업부가 나뉘어 있어 마케팅 쪽은 매달 발간되는 잡지에 실어 나르는 것으로 최소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90년대 초반에는 중소기업뿐만 아니라 대 기업 조차도 제품을 홍보하는 것에는 그렇게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을 때니까...

“곧 만들어질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소연씨는 중요한 역할을 맡아 주셔야 하구요.”

소연씨는 내 말에 고개를 갸웃 거리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나는 대답 대신 그저 웃어 보이며 테이블 위에 놓인 탄산음료를 들이켰다.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양심적인 가게가 한 두 개 쯤을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어떻게 죄다 똑같은 사람들만 모여 있지? 분명 내가 어릴 때 만해도 구석진 곳에 잘만 찾아다니면 괜찮은 매장이 몇 군데 있었던 것 같은데...’

가만, 구석진 곳이라고?

그러고 보면 그들은 왜 장사 목이 좋은 터널 상가가 아니고, 일부러 찾지 않으면 절대 모를 깊숙한 골목에 있었을까?

어쩌면 그들에게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던 것이 아닐까?

&

잠시간의 휴식을 취한 후 나와 소연씨는 이번에는 게임 가게가 모여 있는 터널 상가가 아닌 외진 곳을 위주로 찾아 다녔다.

주고 전기 배선를 다루고 있는 가게들이 모여 있는 곳에서도 간간히 게임 가게가 한 두 개씩 보였는데, 그곳은 그래도 비교적 정상적인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왜 터널 상가 쪽이랑 여기랑 가격 차이가 나는 거죠?”

나의 질문에 40대 초반으로 보이는 가게 주인이 한숨을 내쉬며 대답했다.

“일단 게임을 사러오는 사람들은 매장이 다 그쪽에 몰려 있으니, 용산에 오면 보통 그쪽을 찾아갑니다. 그러나 보니 유동인구부터 차이가 꽤 나죠. 그쪽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따로 따로 매장을 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한 사람이 여러 개의 매장을 가지고 있어요. 업주처럼 보여도 실상은 대부분이 월급을 받는 바지 사장입니다.”

“아...”

“가게를 관리하는 업주들은 한 달에 한 두 번 씩 일본에 넘어가서 게임을 사오는데, 세관만 잘 통과하면 엄청난 이득을 볼 수 있어요. 그렇게 들여온 게임은 초반엔 부르는 게 값입니다. 업주들은 자신이 관리하는 바지 사장들에게 2배가량의 금액으로 판매가를 제시해주고, 바지사장들은 거기서 0.5%의 이득을 취해 자기 월급을 챙겨가는 형태지요.”

허... 무슨 단란주점 운영하는 조폭들도 아니고, 이 무슨 거지같은 유통 방식이냐.

설명을 듣고 나니 정말로 기가 차는 행태가 아닐 수 없었다.

이러니 소비자 가격이 정해져 있는 라온은 뒷전으로 밀리고, 슈퍼 패밀리용 게임들이 치고 들어올 수밖에...

그날 저녁. 강남에 위치한 요정에서 나는 만트라의 김한석 대표와 따로 자리를 가졌다.

“한국에 들어 오시자마자 숨 돌릴 틈이 없으시군요. 소연양에게 들어보니 오늘은 용산 전자 상가에 방문 하셨다고 하던데, 어떠셨나요?”

“한마디로 엉망이었습니다.”

“그렇죠. 저 역시 4년 전에 PC 게임 소매점을 운영해보았지만, 만만치가 않더군요. 양심적으로 장사해서는 성공하기 어려운 사업입니다.”

“일단. 내일 부터는 저 역시 솜노리 소프트의 이원승 대표와 약속을 잡아 두었기에 바빠질 듯하군요. 애초에 제가 한국에 온 목적은 솜노리 쪽과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서 였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시장 형태라면 솜노리와 원만하게 이야기가 진행되더라도 라온의 부진은 계속 될 것입니다.”

“하아..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아뇨. 대표님. 아직은 도저히 손을 써보지 못할 만큼 늦지는 않았으니까. 괜찮습니다.”

“무슨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신 건가요?”

“좋은 방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저 똑같은 방식으로 되갚아 주는거죠.”

< EP. 30 : 드래곤 마운틴. (2)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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