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게임마켓 1983-168화 (168/252)

< EP. 30 : 드래곤 마운틴.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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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로 몇 시간 호텔의 비즈니스 룸에서 그녀와 단둘이 대화를 나눠본 결과.

그녀는 기대 이상으로 회사 경영에 대해 탁월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K대 총학생회 부회장 출신인 그녀는 아마 남자로 태어났다면, 분명 회장 자리를 탐하고도 남았을 정도로 생각이 깊고, 두뇌 회전이 빨랐다.

거기다 외모 역시 시원시원한 콧대와 눈매로 약간 서구적인 느낌이 드는 미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나이에 이 정도의 사업수완을 가지고 있는 거지?’

그녀가 말한 OEM 판매 방식에서 한국은 지금 시기에 있어 가장 최선의 선택이었다.

좀 더 미래를 바라본다면 중국이나 동남아 쪽에 공장을 두는 게 현명해 보일지 몰라도, OEM 제조 역시 어느 정도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최근에 한창 기술력이 성장하고 있는 추세라 그녀의 주장은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민텐도와 센소니, 파라소닉, 니코르 같은 눈치 빠른 대 기업들 역시 장기전을 바라보고 태국 쪽으로 손을 뻗어가고 있던 시기었기에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릴 적 기억에 똑같은 민텐도에서 출시한 슈퍼 패밀리였음에도 불구하고, 한 친구네 집에는 made in japan. 이라고 적혀 있던 것에 반해, 한 친구네는 made in thailand. 라고 적혀 있어 짝퉁이다 아니다.로 실갱이를 벌인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서 일부러 made in japan인 물건을 소매점에서 더 비싸게 올려 팔기도 했었지.’

나는 만트라에서 들고 나온 서류를 직접 정리하며, 커피를 마시고 있던 소연씨에게 말했다.

“내일부터 소연씨는 여기 호텔 비즈니스 룸으로 출근하세요.”

“네? 여기로요?”

“불행히도 저에게 시간이 많지 않아 단기 속성 반으로 운영할 테니, 단단히 각오 하세요. 아, 그리고 혹시 외국어 좀 할 줄 알아요?”

“영어는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가능하면 일본어도 배워두세요. 앞으로 소연씨는 펜타곤 측과 이야기 할게 많아 질 수도 있으니까요.”

“네. 알겠습니다.”

그녀의 대답에 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서류를 챙겨 들었다.

“그럼 수고했어요. 퇴근하세요.”

“네? 벌써요? 아직 오후 4시 밖에 안됐는데...”

“소연씨가 오늘 할 일은 다 끝났습니다. 돌아가서 푹 쉬시고, 내일 오전 9시에 여기서 다시 보죠.”

“네. 알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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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그녀는 9시 10분 전에 정확히 호텔로비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전 일과로 비즈니스 룸에서 라온에 대한 한국 유저들의 반응을 소연씨에게 전해들은 나는 생각보다 심각한 국내 시장의 상황에 고개를 갸웃 거렸다.

“한국 콘솔 시장이 그렇게 크지 않다는 것은 저 역시 인지하고 있었지만, 이건 좀 문제가 심각한데요?”

소연씨의 말대로 라면 현재 라온은 한국에서는 거의 죽어가는 분위기나 마찬가지였다.

일본과 미국에서는 없어서 못 파는 기기가 한국에서는 초반 런칭 때를 제외하고는 빠른 속도로 판매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사태가 발생 하게 된 것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는데, 그 첫 번째 이유는 전용 소프트의 부재(不在)였다.

현재 일본과 미국에서 라온 전용으로 발매된 소프트는 약 23가지. 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10개 소프트뿐이었다. 그것도 런칭과 동시에 발매된 스파2, 슬램덩크, 파이널 프론티어4를 제외하면 1년 동안 발매된 정발 게임이 고작 7개뿐이었다.

그와 반대로 겨우 올해 초에 정식 출시된 슈퍼 패밀리 같은 경우에는 이미 한국 시장에 나온 정식 유통 게임만 14가지가 넘었다.

민텐도와 정식으로 슈퍼 패밀리의 판매 계약을 체결한 ‘미래상사’는 빠른 보급화를 위해 일본에서 들여온 게임들의 케이스에 국내 정식 판이라는 스티커만 붙여서 판매했을 뿐. 게임 자체에 한글화를 추진하진 않았다.

그들은 일부러 한글화가 필요 없는 액션 위주의 타이틀을 주력으로 들여왔기에 한글화가 아니더라도 판매에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하지만, 라온은 퍼스트 파티인 펜타곤을 제외하면 한글화를 추진하는 서드 파티는 거의 전무한 실정이었다. 아무리 퍼스트 업체인 펜타곤이라고 해도 다른 서드 파티 회사에게 한글화를 강제할 수는 없었기에 나 역시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이었다.

‘이런 젠장.. 이래놓고 뭐가 ’무적‘입니까. 김대표님.. 까딱하다간 숨넘어가는 판국이었구만...’

그리고 두 번째. 한국 시장의 여건상 전국적으로 대형 샵을 내기가 굉장히 애매했다.

현재 라온의 보급률은 국민 학교 한 반에서 1~2명 있을까 말까한 수준이다. 말 그대로 부잣집 아이들이나 즐기는 초호화 게임기 중에 하나랄까?

기기의 보급률이 저조하면 대형 매장을 낸다 하더라도 내방객 역시 저조할 것이 분명하다.

김한석 대표는 보급률이 늘어 날 때까지 라온 프리미엄 매장 오픈을 차일피일 미루고 있는 상태라고 했다.

‘그래. 헛돈을 공중에 뿌리느니, 그게 안전하긴 하지만... 적어도 보급률을 늘리기 위해 마케팅에 대한 노력은 했어야지...’

긴 한숨과 함께 지끈거리는 이마를 움켜쥔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생각을 정리했다.

김한석 대표는 일본에서 발매하는 인기 게임을 컨텍 하는 퍼블리셔의 재능은 있다. 좋은 게임을 골라 국내에 정식 유통 하는 것에는 나 역시 아무 불만이 없지만, 사업적 수완에서 보면 이대로 김 대표의 말을 믿고 계속 기다려 줄수는 없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시장 상황을 살펴봐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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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오후. 호텔에서 나와 함께 식사를 마친 소연씨가 화장실을 다녀오는 사이.

나는 호텔 방에서 옷을 갈아입고 내려왔다. 캐쥬얼 정장 대신 청바지 차림에 모자를 눌러쓰고 온 내 모습에 소연씨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나에게 물었다.

“어라? 부장님. 어디 가시게요?”

“네. 소연씨도 같이 가죠.”

“네? 어딜요?”

“소연씨 역시 서류에 적힌 라온의 출고 대수와 판매 수량보다는 현실을 경험해 보는 게 도움이 될 거예요.”

“현실이요?”

“한국 최고의 전자 상가라 불리는 용산. 현재 한국의 게임 시장을 살피기에 거기보다 현실적인 곳이 또 있을까요? 밖에 차 대기 시켜 놓았으니 같이 가시죠.”

나는 식사 후. 아직 소화도 못시킨 그녀를 데리고 호텔 문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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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용산 역 근처의 한 공영 주차장에 차를 세운 나는 차문을 열자마자, 훅하고 느껴지는 뜨거운 공기에 얼굴을 찡그렸다.

‘아이고, 막상 나오니 겁나게 덥구나...’

그때 차에서 내린 소연씨가 PC 부속품 전문 판매점인 선인상가와 나진 상가를 바라보며 나에게 말했다.

“여기가 용산전자상가군요.”

“그러네요. 저도 굉장히 오랜(?)만에 와 보긴 하는데...”

90년대 초반의 용산 풍경이 이토록 엉망이었나? 그래도 나름 국내 최고의 전자 상가였던 터라 내 머릿속에 추억 보정이 조금 심했던 모양이다.

아무튼 과거의 용산과 다시 마주한 나는 허리춤에 손을 올린 채 피식 웃음을 흘렸다.

“부장님. 빨리 가요.”

소연씨는 용산에 처음 와보는지, 마치 놀이동산에 놀러온 것처럼 굉장히 설레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하긴 이때의 용산전자상가에서 여자라곤 토스트 파는 아주머니 밖에 본적이 없었으니까.

그녀에게도 놀랍지만,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에게도 놀랄 일이지.

나는 벌써 저만치 떨어져 상가로 향하고 있는 그녀의 뒤를 서둘러 쫓았다.

잠시 후. 게임 골목이라 불리 우는 나진 상가 입구에 도착한 우리는 길게 일직선으로 뻗어 있는 터널 안을 바라보았다.

“와아.. 게임 가게가 잔뜩 있네요.”

2000년대에 들어서며 휴대폰 판매의 붐이 일어나자, 게임 매장은 지하의 두꺼비 상가로 단체로 쫓겨났지만, 이 시기에 게임 상가는 나진 상가 쪽에 많이 상주해 있었다.

멀리서 보기에도 가게 앞 진열대에 수많은 게임 카트리지들이 형형색색으로 놓여 있었고, 최신 기종인 슈퍼 패밀리와 라온, 그리고 NEGA 드라이브의 패키지 상자가 한눈에 들어왔다.

평일이라 그런지 터널 상가 안쪽은 한가로운 편이었기에 가벼운 마음으로 상가에 들어서자, 가게 앞을 지키고 있던 업주들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아프리카 초원에서 한가로이 뛰어 놀던 임팔라 한마리가 펄쩍거리며 맹수의 아가리로 들어온 꼴이나 마찬가지니까.

아니나 다를까 채 몇 걸음도 걷기 전에 사방팔방에서 우리를 부르는 업주들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 있으세요?”

“손님. 잘 해드릴게요. 여기로 와보세요. 손님. 손님!?”

소위 삐끼라 부르는 호객 행위가 만연하다.

평일이라도 손님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기에 나는 그들의 말을 무시하고 매장들을 살폈다.

“거기 이쁜 아가씨. 뭐 사러 왔어요? 제가 싸게 해드릴게요. 네? 이리 들어와 보세요.”

“헐.. 저 새끼는 뭔데, 여자 친구를 달고 게임을 사러왔지? 은근히 열 받네..”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소리에 긴장했는지, 소연씨가 내 곁에 바싹 붙으며 귓속말을 걸어왔다.

“여기 진짜 장사하는 사람들 맞아요? 왜 다들 조폭 같이 손님을 끌어들이려고 하죠?”

“뭐, 지역 특성상 가게 주인들도 남자들로만 모여 있고, 손님 역시 남자를 주로 상대하다 보니 아무래도 다른 곳 보다는 좀 거칠죠.”

실제로 이 시기에는 날치기나, 깡패들도 많아서 용산에 오면 돈 조심하라는 풍문(風聞)도 있었으니, 이 지역의 치안이 얼마나 흉흉한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겠지?

약 200미터 정도 되는 나진상가의 긴 터널의 한족 라인을 훓으며 통과한 나는 다시 몸을 돌려 반대쪽 라인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슈퍼 패밀리 재고 입하. 18만원!!-

-휴대용 게임기 라온 19만원!!-

-긴급 입수. 슈퍼 패밀리 최신 게임 다수 입고!!-

가게마다 붙어 있는 선전 문구를 바라보던 중 나는 어느 가게에 붙어 있는 선전 문구에 걸음을 멈추었다.

-슈퍼 패밀리용. 드래곤 워리어 V 예약 받습니다.-

다음 달에 출시 예정인 피닉스사의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는 한국에서도 인기가 굉장히 높았다. 더구나 이번 5 같은 경우에는 슈퍼 패밀리가 출시되고 2년 반 만에 나온 신작인지라, 일본에서도 현재 기대 순위 1위로 꼽혀 있는 작품이었다.

보통 이 시대의 용산 게임가게 업주들은 흔히 ‘보따리 장수’라고 불렀는데, 일본에 자주 오가며 중고 게임이나 신작게임을 사들여와 한국에서 비싸게 팔아 이윤을 남기는 족속들이었다.

물론 장사라는 것이 이윤을 남기기 위해 하는 것인데 하필 ‘족속’이라는 저급한 명칭을 갖다 붙이냐고 묻는 다면, 그 이윤 자체가 상도(常度)에 크게 어긋나는 폭리를 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잠시 가게 앞에 멈춰서자, 역시나 기다렸다는 듯이 호객행위가 따라왔다.

“손님 뭐 찾으시는 거라도 있습니까?”

비쩍 말라 족제비처럼 생긴 남자가 앞니를 세우며 나를 향해 웃어보였다.

나는 그의 미소에 화답하며 물었다.

“드래곤 워리어 5. 예약 받고 있나요?”

“아~ 네. 물론이죠. 예약하시게요?”

“네. 얼마죠?”

그러자 업주는 나와 내 등 뒤에 있는 소연씨를 슬쩍 바라보더니, 한쪽 입 꼬리를 치켜 올리며 대답했다.

“얼마까지 알아보셨는데요?”

“······.”

손님의 질문을 질문으로 대답하는 건 이 시기도 마찬가지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삼키며 그의 물음에 답했다.

“얼마까지 해주실건데요?”

그러자 업주의 눈썹이 작게 꿈틀거리더니 대답했다.

“일단 드래곤 워리어 시리즈는 슈퍼 패밀리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게임이고 일본에서도 굉장히 구하기 어려운 타이틀이 될 거 같습니다.”

구구절절 설명을 붙이는 걸 보니 결코 싸게 줄 거 같지는 않고, 그 후로도 그는 드래곤 워리어가 얼마나 구하기 힘든 타이틀인지에 대해 장황한 설명을 늘여 놓은 뒤, 맨 마지막에 가격을 제시했다.

“18만원입니다.”

······.

지금 환율이 100엔당 7~800원 정도인데, 9200엔짜리 게임이 어떻게 계산기를 돌리면 18만원이 되는 거냐?

끝이에요 -ㅍㄱㅍ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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