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2) >
아차.. 그렇구나. 잠시 옛 추억에 사로 잡혀 결혼식이 2주 앞으로 다가온 줄도 몰랐네...
아무리 내가 일에 미쳐 살아가는 워크홀릭(workholic)이라 해도 결혼을 앞둔 상태에선 어쩔 도리가 없다.
안 그래도 프로포즈를 한 뒤에 사이킥 포스와 드래곤 엠블렘의 출시가 겹치며 거의 혼자서 결혼 준비를 도맡은 유키에게 굉장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준혁씨는 일본의 결혼 문화를 잘 모를 테니 제가 알아서 잘 준비해둘게요.’
내가 난처해 할 때마다 살짝 혀끝을 내밀며 아무렇지 않은 듯 웃어 보이는 그녀.
난 어쩌면 그녀의 따스한 배려를 바쁘다는 핑계로 너무 당연스럽게 느껴온 것이 아닐까?
&
타임슬립 하기 전에도 독신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연애를 아예 안하고 살아온 것은 아니었다.
잦은 야근과 뻑 하면 터지는 클라이언트 문제. 디버깅 작업. 위에서 내려오는 개발 진행 상황에 대한 독촉과 더불어 온갖 스트레스 속에서 내 곁에 있는 사람까지 소중히 대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 주제에 나는 그저 내가 처한 상황을 한없이 이해해 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원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나는 살아있는 부처님을 찾고 있었구나...’
유키는 굉장히 밝은 성격의 소유자이다.
타인의 부탁을 잘 거절 못하는 게 흠이지만, 그만큼 타인에 대한 배려심이 깊다.
일에 관해선 자기 관리가 철저하고, 내가 바쁜 시기엔 혼자서 시간을 보내는 것에 대해서도 괘념치 않았다.
라온 런칭 이후 잠시 주말에 짬을 내어 만났을 때. 조심스럽게 내뱉은 나의 사과에 그녀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었다.
‘준혁씨가 한가할 땐 함께해서 좋고, 준혁씨가 바쁠 땐 새로운 게임이 기대 되서 좋던데요? 저는 준혁씨의 여자 친구이며, 펜타곤 소프트를 사랑하는 열혈 팬이니까요.’
퍼팩트.
딱 이 한마디로 그녀에 대한 정리가 가능하다.
하지만, 그런 호의를 당연한 권리로 여기는 순간. 우리 사이에 ‘트러블’이 시작된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회귀자는 실패하지 않는다. 에 이런 부분도 적용 시킬 수 있는 건가?’
하긴 그러고 보면 34살 83년으로 돌아왔으니, 92년인 현재 나의 정신 연령은 얼추 43살에 해당하고 있었다. 거기서 유키 나이가 올해로 24살이니..
‘완전 도둑놈이네.’
정신 나간 사람처럼 혼자 피식거리며 웃어대자, 식사 중이던 카와구치씨가 고개를 갸웃 거리며 내게 물었다.
“준혁씨. 저기 괜찮으세요?”
“아,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카와구치씨 말대로 한국은 식을 올린 뒤에 다녀와야겠네요.”
“잘 생각 하셨습니다. 식을 올린 후라면 얼마든지 다녀오셔도 괜찮습니다.”
나의 대답에 카와구치씨 역시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어 보였다.
&
1992년의 6월의 첫째 주 주말.
나와 유키는 근처 교외에서 조촐한 결혼식을 올렸다.
일본의 결혼식에는 총 네가지 종류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신전식(神前式) 이라고 신사나 호텔에서 치루는 가장 전통적인 혼례방식이 이었다. 이 경우에는 전통 의상부터 시작해 진행해야 할 일정이 너무 많아서 패스.
두 번째는 불전식(佛前式) 으로 절이나 신사에서 승려를 초대해 치루는 결혼식으로 앞서 설명한 신전식과 비슷한 방식이기에 패스.
세 번째는 기독교식으로 교회에서 치루는 결혼식이 있었는데, 이것이 흔히 한국에서 치루는 결혼식과 가장 흡사한 방식이었다.
하지만, 90년대 초의 일본에서는 신랑과 신부가 모두 기독교인이어야만, 교회에서 식을 치루는게 가능했기에, 이것도 자연스럽게 패스.
그리하여 남은 방식이 바로 네 번째 방식인 인전식(人前式) 이었다.
인전식은 종교에 구애받지 않고 가까운 친인척을 불러 모아, 그 앞에서 결혼 선서를 낭독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결혼식이었다.
“정말 괜찮아? 보통 여자들은 좀 더 화려한 결혼식을 꿈꾸지 않나?”
“저를 키워주신 부모님과 함께 자란 언니. 그리고 준혁씨의 부모님을 대신 해줄 훌륭한 동료 직원들과 소중한 친구. 더 필요한 사람이 있나요?”
“아니. 완벽해.”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맞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나를 올려다 볼 때 마주치는 자애로운 눈매와 웃을 때다 살포시 보이는 보조개가 아주 매력적인 그녀..
초여름의 햇살이 따스하게 느껴지던 그날.
향긋한 풀내음이 가득한 교외의 정원에서 나와 유키는 평생을 함께할 것을 약속했다.
결혼식 사회자는 나의 절친한 친구인 준페이가 나서 주었다.
펜타곤 직원 중에서는 대표로 카와구치씨와 모리타 그리고 하야시가 참석했고, 라이텍스에서는 첸드라와 푸말라가 찾아왔다.
함께 손을 잡고 결혼 선서를 낭독 하는 것으로 짧은 식이 끝나고, 이어서 진행된 피로연에서는 지구 반대편에서 찾아온 손님들도 있었다.
이제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엘리스와 그녀의 남편. 그리고 이젠 미국에서 가장 큰 장난감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윌슨씨의 가족이었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하네. 미스터 강.”
“와주셔서 감사해요. 윌슨씨.”
“다른 사람은 아니어도, 자네 결혼식이라면 꼭 와야지. 그게 사람 된 도리니까.”
처음 만났을 때와 달리 세월의 흐름에 눈매와 입가에 잔주름이 생겨난 윌슨 씨는 내 손을 마주 잡고 흐뭇하게 웃어보였다.
엘리스는 라온이 출시된 후. 민텐도의 미국 지사를 그만두고, 윌슨씨의 비서이자, 라온 스토어의 총괄 책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이거 참. 미안하네. 나는 엘리스씨 결혼식에도 참석하지 못했었는데, 이렇게 와주다니...”
“그럼요. 당연히 미안해 하셔야죠~ 제가 결혼 했던 날 혹시라도 짠하고 나타나지 않을까 얼마나 목을 빼고 기다렸었는데요.”
그러자 엘리스 곁에 있던 제임스가 한 바탕 웃음을 터뜨리며 입을 열었다.
“뭐야~ 그럼 그때 네가 기다렸던 사람이 바로 이 분이였어?”
“왜? 질투 나?”
“조금?”
엘리스는 제임스의 반응에 옆구리를 쿡 찌르며 자연스럽게 그의 품에 안겼다.
“엘리스 언니~!!”
신부 쪽 지인들과 인사를 나누고 온 유키가 어느 틈에 달려와 엘리스에게 안겼다.
“축하해요. 유키씨~”
일전에 롭이 일본에 방문했을 때 만난 엘리스와 유키는 오랜만에 만났어도 친자매 마냥 서로를 부둥켜안고 빙글빙글 돌았다.
“언제 왔어요?”
“방금. 조금 늦었지? 미안해.”
“아니에요. 와주셔서 정말 고마워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유키는 6월의 햇살 아래 누구보다 밝게 빛나 보였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다른 하객들에게 인사를 나누려던 찰나, 나는 하객들 좌석 한쪽 끝에 앉아 있는 노인의 모습에 걸음을 멈추었다.
처음엔 유키의 하객인 줄로만 알았던 그를 자세히 살피니, 노인은 나에게 처음으로 게임 & 워치를 건네준 게임 가게의 할아버지셨다.
“어.. 어르신? 어떻게?”
“끌끌끌. 이 녀석. 과거로 오더니, 아주 물 만난 고기가 되었구나.”
“어르신...”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를 바라보자, 노인은 자신의 옆에 있는 플라스틱 의자를 빼내어 나에게 권하였다.
“그래. 이곳에서의 생활을 보아하니, 2015년이 다가온다 하여도 다시 그 쪽 생활로 돌아갈 것 같지는 않구나.”
“수많은 고민을 하였습니다.”
“그랬겠지. 이곳에서의 삶을 포기하기엔 너무 많은 걸 이뤄냈으니까.”
“지난 1988년에 한국을 다녀왔습니다. 그곳에서 어린 시절에 저를 보았죠. 그리고 어머니를 뵈었습니다.”
“독특한 경험이었겠군. 그래 어땠나?”
“처음엔 무척이나 놀랐지만,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습니다.”
“그건 자네를 대신 해줄 또 다른 자네를 만나서인가?”
“그렇습니다.”
나의 대답에 노인은 주름을 깊게 패이며 웃어보였다.
“솔직히 말하자면 자네의 회귀는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네.”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보통 누군가에게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면, 자신이 큰 실수를 범했던 시기나 그게 아니라면 인생의 터닝 포인트라 할 수 있는 시기를 기점으로 삼고는 하지. 그 말은 즉 자신의 과거로 돌아간다는 뜻일세. 하지만 자네는 어땠나?”
“저는... 아, 설마!?”
“그래. 자네는 온전히 한 사람의 인생을 새로 만들어낸 것이나 다름없지. 자네가 좋아하는 게임을 예로 들자면 아예 새로운 캐릭터를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을까?
그것은 매우 적절한 비유였다.
82년생이었던 내가 83년으로 돌아왔다면 나는 고작 첫돌을 지난 갓난아기에 불과 했을 것이다. 물론 그 상태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던 나는 83년의 내 나이를 만 21살로 맞춰 버렸다. 그리고 바로 거기서부터 시간의 축이 비틀리며, 또 다른 나를 만들어낸 것이다.
“저는 단지 게임이라는 콘텐츠가 성장하던 시기를 온몸으로 느끼고 싶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렇게 당황하진 말게나, 자네를 꾸짖기 위해 이곳에 찾아온 것이 아니니까. 오히려 이곳에서 자네가 벌이는 일들에 나 역시 하루하루가 즐겁거든?”
노인은 품안에서 라온을 슬쩍 꺼내 보이며 한쪽 입 꼬리를 올려보였다. 그리고 그 모습에 나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드래곤 엠블렘인가? 그거 아주 재밌더군. 앞으로도 기대함세.”
“그런데 어르신. 전에는 워낙에 갑자기 사라지셔서 여쭤볼 수가 없었는데, 도대체 정체가 무엇 입니까?”
“에끼. 이 녀석. 젊은 사람이 그렇게 감이 없나?”
“설마 그럼. 진짜로.. 시... 신이 십니까?”
“좋을 대로 생각하게.”
······ 뭐지? 마치 드라마 아이리스에 나왔던 전설의 석상 드립을 떠올리게 만드는 이 대답은? 그때 멀리서 나를 부르는 유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준혁씨!! 거기서 뭐 해요? 우리 다 같이 사진 찍어요~!!!”
“아, 미안. 잠깐 여기 계신 어르신이랑 대화 좀 하느라. 어르신 잠시만 다녀...”
그 순간 방금 전까지만 해도 옆에 앉아 계시던 할아버지는 내가 잠시 고개를 돌린 사이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전에도 아무런 설명 없이 게임 & 워치만 달랑 안겨 주고 사라지시더니..
“원래 신이란 항상 이런 식인가?”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혼잣말을 중얼 거리며 그가 앉아 있던 텅 빈 의자를 바라보았다.
“준혁씨~!! 빨리 와요. 손님들 기다리세요.”
“아, 미안.”
멀리서 나에게 손짓하는 무리를 향해 빙긋 웃으며 걸음을 달렸다.
이곳에 와서 생긴 소중한 인연들.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그녀..
처음 1983년으로 넘어 올 때만 해도 2015년이 되면 다시 34살의 나로 돌아갈 생각이었는데...
‘저들을 남겨두고 어떻게 돌아갈 수 있겠어...’
무리 한가운데에 뛰어 들어 유키 옆에 서자, 그녀는 귓속말로 나에게 물었다.
“혼자 벤치에 앉아서 무슨 생각 했어요?”
“음... 부모님 생각?”
“아, 해외여행 중에 실종 되셨다고 하셨죠...?”
지금도 그리고 미래에서도 멀쩡히 살아계신 두 분을 차마 돌아가셨다고 하긴 힘들어 둘러댄 결론이었다.
“준혁씨네 부모님이 이 자리에 계셨다면, 저를 마음에 들어 하셨을까요?”
“물론이지. 아마 엄청 좋아 하셨을 거야.”
그때 사진사가 우리를 바라보며 외쳤다.
“자~ 하나, 둘, 셋. 하면 찍습니다.”
“아, 준혁씨 앞에 봐요.”
“어, 그래.”
“자~ 하나~ 둘~”
그때였다.
본래라면 우리 부모님이 앉아 계셨을 텅 빈 의자에 어느새 두 분이 앉아 계셨다.
어머니는 가볍게 팔짱을 낀 채로 아버지의 어깨에 몸을 기댄 채 살며시 웃고 계셨다.
이건.. 환영일까? 아니면 신의 선물?
“아들.. 결혼 진심으로 축하해. 우리 며느리 너무 이쁜데~?”
“어머니...”
“축하한다. 내 아들. 그 곳에서도 항상 몸 건강하고, 아버지 닮지 말고 술은 적당히 하거라...”
“아버지...”
“셋~!!”
찰칵!!
“자~ 그럼 이제 신랑 신부 마주 보시고 준비 되셨으면 시작 하세요.”
“네? 뭘요?”
그러자, 유키가 나를 향해 웃으며 입을 열었다.
“이거 말예요.”
방심한 순간. 그녀의 입술이 나의 입술 위에 포개어졌다.
< EP. 29 : 하얀 악마의 한국상륙. (2) > 끝